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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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심을 버리고 성인군자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다. 선물문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선물문화의 속성을 돈에 부여할 때, 우리는 선물의 영역이 순수하게 이타적인 영역이 결코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380쪽)


  사회적 유대를 전혀 만들어내지 않는 공짜 선물이라는 종교적 이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매개로 하는 거래와 매우 유사하다. 일단 돈을 내고 물건만 받으면 그뿐, 어떤 의무감도 어떤 유대관계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화된 공짜 선물은 예외일 뿐, 선물은 그런 거래와 다르다. 보통은 당신이 내게 뭔가를 선물하면 나는 고마워하며 당신에게 또는 사회 관습상 규정된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선물은 의무감을 낳고 공동체 내의 경제적 순환이 계속되게 만든다. 그러나 익명의 선물은 그런 유대를 만들어내지도 공동체를 강화하지도 못한다. 받는 사람은 고마워할지도 모르지만 대상이 없는 추상적 보편적 감정일 뿐이다.(381-382쪽)


받기보다 주기를 즐기는 자신이 이타적이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주기보다 받기를 즐기는 사람만큼 인색한 태도다. 선물을 받지 않으면 결국은 우리가 주는 선물의 원천이 말라붙기 때문이다. 받지 않는 태도는 인색할 뿐만 아니라 오만하다.·······그것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영적 교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종교적 망상, 자연을 지배하고 초월한다는 과학적 야심과 일맥상통하며, 점점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 집착, 자립, 초월의 허구에서 깨어나, 우리의 진정한 자아, 확장된 자아와 결합하고자 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갈망한다.·······진실은 우리가 자연에, 서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의지하고 받고 사랑하고 잃어가며 살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선물은 합일된 존재의 사회·물리적 현현이다.(388-389쪽)


궁핍에 절은 20대 법학도 시절, 경기도 어떤 종교시설 방 한 칸을 빌어 공부한 적이 있었다. 옆방 대입수험생과 안면을 터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제법 시간이 흘러 개인사 이야기도 나눌 만큼 친밀해졌다. 어느 날인가는 그의 어머님이 아들 챙기러 오셨기에 인사드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와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 일어났다. 씻으려고 나가는데 방문 앞에 하얀 낯선 물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편지봉투였다. 집어서 열어보니 10만 원 권 자기앞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망연한 심정이 되어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돈과 함께 넣어 옆 방 아이에게 주었다. 며칠 뒤 내 방문 앞에는 다시 하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돈과 함께 이런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청년의 맑은 마음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자존심은 남한테서 무엇을 받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다른 남에게 베푸는 마음입니다.”


40년 전 일인데 지금도 그 일련의 과정, 그리고 그 편지 글이 눈앞에 삼삼하다. 그 뒤 나는 나름대로 그분의 깨우침을 좇아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마음병 든 사람과 숙의치유를 함께 하는 의자의 삶 속에서 옛날 10만 원 권 자기앞수표 한 장은 수백 수천 만 원으로 불어나 그 어머님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어머님도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한 이치가 하나 있다.


익명 엄금.


돌이켜보면 나는 받을 때도 줄 때도 인색하고 오만했다. 받을 때 극진히 고마움을 표하지 못했다. 줄 때 겸손을 떨었다. 분리문명의 거대유일신 망념이 만들어낸 영적 허구를 간파하지 못한 채, 아가페와 절대 자비를 지어내고 있었다. 자발적 익명화와 강제된 익명화가 뒤섞이면서 내 삶은 공동체의 변방으로, 마침내 바깥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갔다. 이제 정색하고 다시 직면한다.


익명 엄금.


그러면 무엇인가? 답은 오직 하나다.


선명膳名 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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