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선물의 거래는 참여자들 간의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만들어내는 열린 거래다.(27쪽)


전체성wholeness 혹은 상호의존성·······. 선물은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게 만든다.(29쪽)


무슨 말인지 안다. 신성의 한 축이 관계성이고 관계성의 기저에 통일성이 있다는 말을 여기서 조금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고 있다. “전체성wholeness”이 통일성과 같은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상호의존성”과 “혹은”으로 연결했으므로 같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임에도 통일성과 구별하는 일은 더 어렵다. 이런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12세기 특별한 서구 사상가 유그를 인용한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다. 전 세계를 타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완전한 자다. 미숙한 영혼을 지닌 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한 장소에 고착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게 하려 한다. 완전한 자는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한다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말은 유그의 말 가운데 강인한 사람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강인함은 사실 서구문명이 시종일관 추구해온 덕목이다.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리는 완전한 인간을 서구사회가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물론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이 차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한다는 말을 아무리 정복의 의미에서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티브 테일러의 자아폭발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명쾌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자아의 범위를 확대한다는 말이 상호의존성에 닿아 있으므로 자아폭발과 다르다는 사실은 수긍해야 하지만 자타 분리를 끊임없이 넘어선다는 표현 정도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보라. 자신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게 하려 한다는 말과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는 말은 얼마나 다른가.


서구 지성사에서 유그는 무엇인가? 영향력에 관한 한,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큰 부자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아들들을 불러 막대를 하나씩 주면서 말했다. “지금 출발해 해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막대로 그은 금 안의 땅을 모두 주겠다.” 아들들은 기뻐 날뛰며 서둘러 출발했다. 해 지고 밤 되어도 그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떠나지 않고 홀로 앉아 있던 막내는 해 지기 직전 조용히 일어나 제 발 주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톨스토이 우화다. 막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덧셈의 발상에서 뺄셈의 발상으로 전복하는 지혜를 가르친다. 통속한 생각에 가한 뼈아픈 일격이지만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술 차이 정도에서 머무르면 이 전복은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다. 만일 톨스토이가 막내로 하여금 점을 찍게 했다면 우화는 완벽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점을 찍는 행위는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리는 행위기 때문이다.


신성을 구현하는 선물은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범위를 축소해 공동체 전체 속으로/에서 걸림 없이 배어들게/나게 만드는 것이다. 바리데기 사상이다. 소성거사 원효 사상이다. 소소심심小少沁心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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