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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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선물이 있었다(22쪽)


선膳은 본디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릴 때 쓰는 희생 육이다.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제사인 만큼 끝난 뒤 공동체 구성원은 이를 나누어 먹는다. 선은 거룩함과 질탕함을 동시에 지닌다. 선은 공적 참여와 사적 행복을 매개한다.


태초에 인간은 거룩하면서 질탕했다. 태초에 인간은 공적 참여와 사적 행복을 분리하지 않았다. 분리문명을 일으킨 이후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질탕함과 사적 행복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왔다. 포르노와 중독으로 치닫는 것을 ‘대박 났다’고 하는 광기 속에서 영성과 절제는 ‘그래, 너 잘났다’가 될 수밖에 없다. 도처에 수탈적 거래가 있을 뿐이다. 결핍을 따라 순환하던 선물은 사라지고 대박을 노리는 뇌물이 위를 향해 흐를 뿐이다. 수탈적 거래와 뇌물이 준동하는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 아닌 군집에 속한 인간 또한 인간이 아니다. 어찌 할까?


『오직 하나뿐Our Only World』에서 웬델 베리가 소개한 숲 관리인이자 벌목꾼인 트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쁜 벌목꾼은 숲에서 자기가 가져올 것만 생각하고 숲으로 갑니다. 좋은 벌목꾼은 남겨두고 와야 할 것을 생각하며 숲으로 가지만요.”


이보다 명쾌한 전복은 없다. 남겨두고 오는 것은 다음에 가져오려고 보류하는 것이 아니다. 숲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고 오는 것이다. 혹 다음에 가져올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둘은 전혀 다른 행위다. 전자는 숲과 내가 분리된 상태에서 하는 행위다. 후자는 숲과 내가 연속인 상태에서 하는 행위다.


선膳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히 함께 먹는 행위를 넘어선다. 선은 공동체 전원의 생명을 대신하여 바쳐진 희생이다. 나누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각자의 생명이다. 너와 나가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선물이다.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 태초에 우리는 선물이었다.


태초는 아득한 옛날이 아니다. 태초는 찰나마다 들이닥치는 이제다. 이제 바로 남겨두고 와야 할 것을 생각하며 숲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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