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격려와 보살핌을 받은 아이는 살아갈 힘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지니게 된다. 부모가 아이 삶의 과정에 그때그때 그러그러하게 동참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기대와 결과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며 산 아이는 목표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힘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기르지 못한다. 부모가 아이 삶의 시작과 끝에만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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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좋았던 10월 7일 오후 나는 어느 혼인예식 주례를 섰다. 혼인서약과 성혼선언문에 갈음하여 합죽선을 선물했다. 써 넣은 글씨는 사람 인人 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풀이다. 나는 기대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대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대기만 한 모습을 묘사해 글자 형태를 바꾸었다. 거기에 내 인감도장을 찍어 증거로 삼았다. 부부는 그 아래 자필로 서명해 스스로 서약하고 선언했다. 하객은 박수로 최종 인증했다.


“기대지 말고 대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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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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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라운이 환자에게 최우선으로 당부한 말은 “의사를 존중하되 의학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436쪽)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의사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의사로서 자신(의 삶)을 존중하되 의학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마라.”


전통적인 국민보건의료체계가 제국주의 침탈과 식민화로 붕괴된 경험이 몰고 온 열등감 때문에 우리사회는 서양의학에 가히 초월적 권위를 부여한다. 의료대중보다 양의사가 더욱 그런 풍조를 조장한다. 직업의 특성상 매판독재 부역세력으로 비판 받지도 않고 시대 변화와 상관없이 ‘철밥통’ 특권층으로 군림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최근 대놓고 수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서양의학에 대한 양의사의 환상이 정치적 은유로 그 완결판을 내는 듯하다.


통념과 달리 의학은 매우 정치적이다. 정치적일 바에야 정치적 올바름을 지녀야 함에도 주류 서양의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제약회사의 하수인이 되어 질병 날조와 폐기를 밥 먹듯이 한다. 그중에서도 정신의학은 사이비 신흥종교 수준이다. 이 어둠이 짙을수록 환상은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드라마 속 자기존중은 중독일 따름이다.


한의학이라 일컫는 전통의학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국민보건의료체계 한 귀퉁이에 놓이면서 서양의학을 닮거나 종속되기를 강요당하는 현실을 전복할 힘을 한의학계는 지니고 있지 않다. 치료 개념과 방식이 근원적으로 서양의학과 다른 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학문에서든 임상에서든 뚜렷한 지표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의사가 한의학에 무슨 환상을 갖겠는가. 오히려 환자가 온갖 양의사를 섭렵하고 돌아다니다 침이나 한 번 맞아볼까 하고 한의사한테 와서 한 방에 고쳐주기를 요구한다. 그들은 한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용한’ 점쟁이 같은 한의사를 찾을 뿐이다.


우리사회의 의료 풍경은 이렇게 동강나 있다. 이판에 언감생심 무슨 치유 예술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입에 올려야 한다면 치유 예술은 혁파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혁파의 바람은 변방에서 불어온다. 변방은 어둠을 직시하는 자의 칼날이다. 그가 익명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드는 찰나 혁파는 시작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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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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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는 과학적 지식으로 얻은 사실에다 인간적인 이해를 추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환자도 의사를 대하는 예술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의사는 질병 치료만 중시하고, 환자는 낫기만 바란다. 환자가 예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진료과정에서 치유를 위해 의사와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 대등하게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치유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므로 방법을 배워야 한다.(435쪽)


  환자는 의사가 자신을 한 인간으로 봐주기를 원하며, 단지 질병으로만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의사로 하여금 고통 받는 한 인간이라는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환자를 보도록 이끄는 주체는 환자 자신이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436쪽)


사람이 살면서 꼭 공부해야 하는데 전혀 하지 않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부부 (특히 성) 관계와 자녀 양육 문제다. 공부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착각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대부분 실패하고 그 실패를 모른 상태로 태연히 살다 서로 배신한 상태로 죽는다. 그리고 질병 문제다. 공부해도 알 수 없이 어려우니 의사한테 맡겨야 한다고 착각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대부분 실패하고 그 실패를 모른 상태로 태연히 살다 질병으로 죽는다.


환자가 의사에게 자동적으로 하는 공통 질문은 딱 하나다.


“왜 이런 거예요?”


딱히 이치나 원리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네가 잘 알 테니 어서 고쳐라 할 것을 돌려 할 뿐이다. 질병 자체는 물론 그 메시지로서 삶의 변화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당연하다. 내 경우, 처음에는 소상히 설명했으나 지금은 선수를 친다.


“왜 이런 겁니까?”


환자는 대개 당황 혹은 황당해한다. 네가 알지 내가 아냐 하는 표정을 지을 때, 나는 모든 질병은 삶의 한가운데서 오므로 그럴만한 곡절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그래도 모른다고 잡아떼면 두세 가지 실마리를 쥐어준다. 이렇게 대화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환자는 남편한테서 모욕적인 말만 들어도 오줌소태가 올 수 있다거나 섹스스트레스 때문에 등이나 어깨 결림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배울 수 있다. 그 배움은 환자에게 “자신이 느끼는 불편감의 상당 부분이 질병이 아닌,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달아”(440쪽)가는 길을 열어준다. 이 길은 의사와 “서로 대등하게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치유에 참여”하는 경지로 환자를 데려간다.


의사로 하여금 고통 받는 한 인간이라는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환자를 보도록 이끄는 주체”가 되려는 사람은 “왜 이런 거예요?”라고 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을 거둬들인다. 질병이라 여겨지는 불편감을 살피고 그것이 스며들게 만든 삶을 돌아본다. 고통 받는 한 인간으로서 어찌 하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의사와 숙의한다. 숙의 상대 아닌 치료 기술자로 의사를 대하면 의사 또한 그 수준에서 환자를 대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면서 스스로 존엄을 세워 함께 존엄한 세계를 세워간다.


존엄한 세계를 여는 일이기에 이를 예술이라 한다. 예술은 접힌 진실을 펴는 일이기에 적확히 표현한다. 적확한 표현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말, 시선, 손짓, 앉음새 하나하나가 존엄을 빚어내는 환자의 예술이다. 예술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므로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는 환자에게 복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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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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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연장하는 시술은 비용이 많이 드는 한편 이윤이 많이 남아, 병원 수입의 상당 부분은 여기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의료산업에서 가장 이윤율이 높은 분야고, 인생의 종말과 관련된 지출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연간 메디케어(65세 이상의 고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정부 주관의 의료보험) 지출의 1/3이 대상자의 6%에 불과한 그해 사망하는 고령자의 진료비다. 죽음을 연장하려는 시도가 발달하면서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지출 또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한 개인이 일생 동안 지출하는 의료비의 40%가 마지막 한 해 동안에 지출된다. 오늘날 의료제도는 고령층을 괴롭히고 있는데, 그것은 본디 특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상환체계가 환자 개인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 이렇게 왜곡된 데는 크게 다섯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생명을 거의 무한하게 연장시킬 수 있는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 죽음과의 무의미한 싸움을 확대시킴으로써 이익을 얻는 병원, 죽음과의 전쟁을 선포한 의사 등 의료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고통 받는 데 익숙해진 환자, 그리고 의사가 항상 이기기만을 기대하는 대중이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미국사회 내에 죽음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음모의 기저에는 이른바 과학적 진료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을 연장시키고 그 질을 높이기도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죽음을 악화시키는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380-381쪽)


극단적 산업사회의 모든 상거래는 폭리에 기반을 둔 수탈행위다. 수탈행위의 백미는 단연 의료다. 요람 이전에서 무덤 이후까지 개인은 병원의 화수분이자 볼모로 존재한다. 그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것이 노인의 죽음, 소아의 목숨을 놓고 벌이는 협박의 상술이다. 산업연명의 문제점은 수치가 웅변한다. (산업출산 문제는 미셸 오당에 대한 리뷰 참조.)


연간 메디케어 지출의 1/3이 대상자의 6%에 불과한 그해 사망하는 고령자의 진료비다.

한 개인이 일생 동안 지출하는 의료비의 40%가 마지막 한 해 동안에 지출된다.


이윤율 최고를 자랑하는 이 협잡에 가담해 인간의 존엄을 팔아먹는 5적당, 전능한 생명공학 기술· 탐욕스런 병원·야차 같은 의료인·노예로 중독된 환자·맹신에 빠진 의료대중 가운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누군가.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 나쁜 까닭은 단지 죽음의 존엄성을 깔아뭉개기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이 위요하고 있는 삶의 존엄까지 깔아뭉개기 때문이다. 더는 이 복마전에 몸담아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유서 한 장부터 쓴다.


“나는 강용원입니다. 혹시 뜻하지 않은 사고나 중대한 질병으로 내가 정상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 이 말을 남깁니다. 내게 그 어떤 연명기술도 쓰지 마십시오. 이미 쓰고 있다면 즉각 중단하십시오. 제 삶과 죽음의 존엄을 지켜주실 줄 믿어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나는 연명기술을 의술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한다. 의술을 빙자한 사악한 상술일 뿐이다. 이 가차 없음이 순진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삶과 죽음을 놓고, 내 가족의 사랑과 행복을 놓고 개인적으로 신중히 판단한 것이다. 사악한 장사꾼의 손에 내 삶의 마지막 시간과 죽음의 순간을 맡기고 싶지 않다.


가능한 한, 나는 내 생애 남은 부분을 의술을 빙자한 사악한 상술을 거절하고 삶과 죽음에 경의를 표하는 존엄의술을 추구하는 데 보낼 생각이다. 이 꿈을 꾸고 실천에 옮기는 일은 150인 ‘꿈꾸미’를 필요로 한다. 그들을 만나러 나는 길을 떠날 것이다. 머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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