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민주노동당, ‘진보정치’ 그리고 ‘사회이행’ 1


진보평론  제22호
이광일ꋯ정치비평 편집위원

1. 들어가며

지난 4․15총선을 통해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입함으로써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민주노동당에 어떤 위상과 의미를 부여하든 그것을 행위주체로서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그 동안의 비판적 논의, 특히 좌파 안에서의 논의들은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도 ‘노동자계급정당’의 출현에 대한 주의설적인 기대와 맞물려 외재적으로 진행되었던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제도 안에 둥지를 마련함으로써 이제 진보정치세력도 이른바 운동정치와 제도정치의 관계설정 문제를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민주노동당은 과연 어떤 정당인지, 그리고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이 과정에서 진보정치세력들이 부르주아정치를 넘어가기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포함된다.
첫째, 민주노동당 내부의 ‘정치적 경향들,’ 혹은 ‘정파들’에 대한 이해이다.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의 형성과정, 즉 민주노동당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현실화되었는지, 그 궤적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은 크게는 조직, 이념의 차원에서 자유주의정치세력들과 단절하고자 했던 진보정치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지만, 작게는 민주노동당 내부의 정파들이 어떻게 하나로 결합하여, 오늘과 같은 ‘동반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둘째, 민주노동당 안에 포진해 있는 각 정파의 노선과 ‘이행전략’ 등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단일한 하나의 블록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재고는 제도 밖에 머물러 있는 좌파 진보정치세력들이 민주노동당과 어떠한 관점에서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보정치세력들이 연대와 사회이행을 고민할 때, 결코 우회할 수 없는 국가의 문제, 민주주의의 위상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2. 민주노동당은 어떤 정당인가

1) 형성과정과 내부구성

국제노동운동사에서 정당과 노동운동의 관계는 특정사회의 자본주의 성숙 정도, 그것이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위상, 정치적 상황, 특히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헤게모니와 역할 정도, 그리고 노동운동의 내부 구조와 양상 등에 따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3가지 양태로 대별할 수 있다.
일반논문/ 민주노동당, ‘진보정치’ 그리고 ‘사회이행’
영․미계에서는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정치운동을 규정지었다면, 독일과 같은 후발사회에서는 노동자정치운동이 매우 중요한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대중노조운동은 이 속에서 영향 받으며 발전하였다. 반면 라틴계는 노동자대중운동과 정치운동이 오랜 동안 분리되어 존재하였다. 독일의 경우, 자본주의의 미성숙과 부르주아지계급의 헤게모니 부재는 이들을 봉건세력과 동맹하도록 강제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그것은 ‘비스마르크체제’로 표현되었다. 1878년에 실시된 ‘사회주의자진압법’은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탄압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국내외에서 혁명적 지식인, 활동가들에 의해 수행된 비합법운동에 의해 노동운동이 주도되었으며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물론 그와 분리될 수 없는 민주주의운동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1871년 빠리코뮌의 좌절이후 혁명적 정치운동과 노동자 대중운동이 분리되면서 ‘생디깔리즘’이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며 진보적 노동운동이 제거된 이후 새로이 출발한 한국의 노동운동은 애초 이승만정권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유사국가기구로서 출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임송자, “한국노총연구”(성균관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3); 최장집, ꡔ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ꡕ(열음사, 1986) 참조.
이후 냉전분단구조 속에서 강제된 파시스트국가권력의 물리적 억압과 통제는 노동자정치운동의 성장은 물론 대중적인 노조운동의 존재마저도 위협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대중운동은 상대적으로 반공에 대한 자기검열로부터 자유스러웠던 기독계, 그와 연계된 조직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권리신장을 위해 한발 한발 나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80년대 급진적 노동자정치운동이 출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이, 나아가 노동자계급운동이 미발전된 이유로 국가권력의 탄압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였다. 한국의 부르주아계급은 냉전분단체제 하에서 국가권력을 등에 없고 급속히 성장하였다. 이들은 지갑을 위해 ‘권위주의세력,’ 파시스트정치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세력들 또한 이들과 근본적으로 대립하지 않았다. 수구정치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은 경제문제에서 상이한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이들을 갈라놓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이광일, “한국의 민주주의와 노동정치: 급진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중심으로”(성균관대 정외과 박사학위논문, 1999) 참조.
물론 파이를 키우는데 목적을 둔 수출지상주의 정책과 분배를 고려한 정책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들을 갈등의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이러한 정책의 차이보다 권력에의 접근가능성 문제와 연결된 정부구성방식의 문제였다. 즉,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정치적 태도를 결정지은 것은 집권을 위한 제도적인 경쟁가능성의 보장 여부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행태는 수구정치세력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민중운동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것은 민중운동 안에서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좌파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나타났다. 70년대 ‘비판적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던 자유주의 좌파의 민중운동에 대한 헤게모니는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성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념, 조직에서 저열한 상황에 있던 노동자계급은 항상 이들 정치세력의 후미에 존재하며 그들의 권력경쟁을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80년대는 파시스트세력과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벌인 권력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노동자계급운동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민주노동당이 바로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급진적인 노동자, 민중운동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70년대 재야 출신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적 수준에서 민주노동당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세력은 이른바 80년대 사회변혁세력들이다. 이 가운데 현재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있는 세력은 수차례의 진보정당건설운동을 거치며 수구정치세력 혹은 자유주의정치세력에 동화된 부분을 제외한 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이른바 ‘노동자의힘’ 등 ‘계급적 좌파’ 또한 민주노동당에 참여치 않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회변혁의 시대’였던 80년대에도 진보진영은 비판적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들은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표현된 대중운동 속에서 자유주의 명망가들의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등 비판사회과학이 소개되어 ‘비판적 자유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들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지속되었으나 대중적인 영향력의 측면에서 이들은 여전히 미약한 존재였다. 특히 87년 7-8월에 발생한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저항과 투쟁은 기존의 소규모 조직 활동에 익숙해 있던 이들 급진정치운동세력들이 대중운동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매우 제한시켰다. 이들은 다만 대중투쟁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그것을 지원하고, 이 투쟁의 흐름을 어떻게 진보정치의 강화로 모아낼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하였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엮음, [87’-88’ 정치위기와 노동운동-인노련 선집](거름, 1991); 이광일, 「민주화이행, 80년대 ‘급진노동운동’의 위상 그리고 헤게모니」 ꡔ진보평론ꡕ9호(2001) 등을 참조.
물론 이들의 활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감성적 수준의 성격이 강하였다. 70년대부터 사용된 ‘재야’라는 용어는 여전히 대중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80년대 민중운동은 급진운동들의 출현과 성장으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대중들은 이러한 변화된 현실과 무관하게 ‘비판적 자유주의’의 상표가 된 ‘재야’라는 70년대식 용어를 통해 급진운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운동을 이해하고 있었다.
대중이 70년대식 ‘재야’라는 개념으로 급진적 사회운동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가 재생산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민중운동의 통합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국민운동본부는 물론 노동운동의 본령이 정치투쟁임을 선언한 서울노동운동연합조차도 그 내부의 정치적 입장, 철학적 배경 등을 고려할 때 결코 70년대 재야운동의 뿌리와 영향으로부터 단절될 수 없었다. 물론 거기에는 70년대 산업선교회 활동과 민주노조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비판적 자유주의자, 그리고 학생운동출신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질적이고 다양한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재야’로 뭉뚱그려져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투쟁이야말로 최소민주주의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축으로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운동이 분리되는 첫 계기였다.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받아들여지자 자유주의자들은 항상 그래 왔듯이 6.29선언에 동의하며 발 빠르게 민중운동과 결별하였다.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민중운동진영은 친자유주의세력―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과 김영삼을 염두에 둔 ‘후보단일화론’으로 표현되었다―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지향하는 세력으로 이분되었다. 백기완선거대책본부(백선본)로 상징되었던 후자의 진보정치세력들은 제도 내에 독자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를 반복하였으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기에 있었던 진보정당건설운동조차도 여전히 자유주의정치세력들과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과거 ‘재야운동’의 동지라는 차원에서 그들과의 부분적인 ‘합종연합’의 형태를 통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70년대식 재야운동세력은 ‘균열되었으나 아직 뚜렷이 분화되지 않은 민중운동’을 제도 내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영향력 아래로 견인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교회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진보정치세력에 있어 그것은 시민사회 내의 또 다른 국가였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노동당은 제도 진입에 실패한 과거의 진보정당들과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정치세력들과의 분리를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대중운동에 정치적 지지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진보정당건설운동들이 명망가 중심의 정당조직이었다고 한다면, 따라서 개인수준의 이합집산이 반복되었다면, 민주노동당은 87년 이후 노동대중들의 요구와 투쟁이 반영된 정치조직이라는 것이다. 특히 글로벌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항한 97년 노동자총파업은 민주노동당 건설의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물론 공식적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는 기존의 민주노총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어느 정도 대표하고 있는가의 문제, 지금 민주노동당이 50%를 넘어서는 비정규노동자 등을 포함한 다수 노동자대중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적절히 대변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민주노동당은 어떠한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80년대 중반이후 등장했던 정파들의 궤적을 고려할 때, 민주노동당은 크게 민중민주주의계열(PD)과 민족해방계열(NL)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87년 7-8월 노동자투쟁의 와중에서 결성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등에 참여했던 활동가들, 이후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장석준, 「역사의 거름이 된 20년」 ꡔ내일을 여는 역사ꡕ17호(2004/가을) 참조.
이들은 90년대 초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내부에서 ‘합법진보정당 건설’ 안이 부결되자 그로부터 이탈한 민중운동 명망가들과는 달리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급진노동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애초 이들은 비합법 전위정당의 건설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87년 6월항쟁 이후 진전된 정치적 자유화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계기로 합법정당건설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한 것이 이른바 ‘신노선’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대환, 「노동자정당 건설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 ꡔ진보정치의 논리ꡕ(현장문학, 1994)참조.
그리고 이들은 97년 총파업과 국민승리21을 거치면서 민주노동당 건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당내에서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민중민주주의계열에는 이들 이외에 급진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평등연대, 그리고 일명 ‘화요모임’으로 불렸던 ‘젊은 좌파그룹’ 등이 있다.
후자인 민족해방계열은 애초 독자적인 합법진보정당의 건설에 대해 소극이거나 반대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민주노동당 건설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태도는 90년대 초 전민련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서 벌어졌던 합법정당건설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들이 반대 입장을 피력한 이래 지속되었다. 당시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태도는 87년에 있었던 민통련의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재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김철순, 「전민련 제2기 대의원대회의 역사적 의의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 전환」, ꡔ사회주의자의 실천ꡕ(일빛, 1991), pp. 232-237 참조.
전민련의 해체 이후 일련의 부침 속에서 현재의 전국연합으로 결집되어 있는 이 세력은 민주대연합론에 근거한 ‘비판적 지지’로 92년 대선에서 자유주의 좌파와 정책연합을 이루기도 했지만, 그러한 발상과 정치적 태도는 92년 대선 패배 이후 자유주의 좌파세력이 이들과의 연합을 파기함으로써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들 비판적 자유주의세력이 고백한 반성의 핵심은 92년 대선을 앞두고 전국연합과의 선거연합이 대선에서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급진세력’과의 선거연합이 김대중을 선호하는 ‘안정희구세력’의 지지표를 이탈하게 만들면서 오히려 선거에서의 패배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제도 내 진입을 핵심 목표로 설정한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 확충을 위한 ‘국민정당’으로 변화욕구와 맞물리면서 전국연합이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현재 민주노동당 안에서 민족해방계열의 흐름은 정치적으로는 전국연합에 의해, 대중운동의 차원에서는 그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오랜 동안 자유주의좌파의 지지기반이었던 ‘전국농민운동총연맹’ 등에 의해 대변되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전농의 정치협상에 대한 민족해방계열의 평가에 대해서는 김창현, 「민주노동당과 전농의 정치협상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ꡔ이론과 실천ꡕ(2003/11)참조.
그리고 정치적으로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의 상당 부분이 이들 민족해방계열 흐름이나 이에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다른 한편 민주노동당의 구성 주체 중 간과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들은 90년을 전후로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진보정치에 관심을 두다가 민주노동당에 결합한 구성원들이다. 이른바 한국사회의 ‘68혁명세대’라고 불리곤 하는 이들은 80년대식 조직운동이 일단락되고 새로운 운동이 분화하는 계기로서의 91년 5월투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91년 5월투쟁을 서구 68혁명과 비교분석한 최근의 연구는 김정한, 「대중운동과 민주화: 91년 5월투쟁과 68년 5월혁명」, ꡔ91년 5월투쟁과 한국의 민주주의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참조.
이들은 80년대에 형성된 민중민주주의 계열과 민족해방 계열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다. 즉 이들은 한편으로 80년대 운동의 흐름에 견인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나, 다른 한편 각종 포스트주의를 흡수하면서 80년대 진보운동이 대중운동과 격리되며 증폭시켰던 자족적인 ‘이분법의 정파적 논리’를 비판하며 그것의 극복을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이들은 당 내부에, 특히 지도부에 강하게 남아 있는 과거 ‘정파적 운동의 짙은 그늘’이 청산될 때 비로소 민주노동당이 도약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민주노동당 안에서 하나의 정파로 조직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정책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이들은 당 활동의 실질적 내용을 담당하고 있는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향후 이들의 ‘자기인식 제고’를 통한 결속력 강화 여부에 따라 당내 영향력도 달라질 것이다. 특히 이들이 노동운동 등 민중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 가운데 어디에 더 무게 중심을 둘 것인가는 민주노동당의 향후 정체성, 정치적 행보를 가늠할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상이한 운동의 역사와 경험에 근거한 ‘정파들,’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물론, 정치적 행보, 정책 수립과 그것의 우선순위 설정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구조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민주노동당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일그러뜨린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크고 작은 정책적, 정치적 사안들을 매개로 표출되고 있다.

2) 민주노동당의 ‘정치노선들’

민주노동당 안에 존재하는 정치노선은 80년대 급진운동들이 제시한 정치노선의 수용과 재구성의 결과이며 이러한 정치 지향들은 구조적인 측면에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심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분단 상황, 그리고 그 동안 진전된 자유주의적 정치개방 등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대안을 고민하는 진보정치세력들은 그 동안 공통적인 과제들과 씨름해 왔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첫째, 자본주의체제 밖에 대안은 존재하는가, 둘째, 만일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전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노동자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대안 체제로 제시하고, 이를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노동자 해방을 목표로 하였던 사회주의 이념과 전통을 계승하되, 역사적으로 현존하였던 사회주의가 지녔던 비민주성과 관료적 억압 그리고 경제적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강령」 참조. 그 동안 민주노동당 강령에 대한 비판은 채만수, 「민주노동당 강령비판」, ꡔ진보평론ꡕ3(2000/); 정병기, 「민주노동당, 민중당인가 노동자당인가」(www.another0415.net) 등을 참조
이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대안사회의 상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체제가 극복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강령의 선언적 수준에 머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당 안에 존재하는 상이한 정치적 발상과 실천에 있다. 또한 여전히 민주노동당은 각 정파, 집단들의 조심스러운 ‘긴장과 협력’의 과정을 매개로 정체성의 형성과정에 있기 때문에 강령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그 현실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 동안 민주노동당 내의 공식, 비공식 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노선은 대체로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진보적 민주주의’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먼저 사회민주주의 경향은 기본적으로 사적소유와 시장으로 상징되는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그 모순을 해소 내지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유팔무, 「사회민주주의를 솔직하게 주장하자」, ꡔ이론과 실천ꡕ(2002/8) 참조.
주로 국가의 사후개입을 통해 자본주의 모순을 해소하고자 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삼는 사민주의 우파가 그 전형이다. 물론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주목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에 시선을 돌리는 ‘사민주의 좌파’ 또한 존재할 수 있으나 민주노동당 내부에서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이처럼 사민주의 노선은 이윤추구의 장으로서의 시장의 원리를 승인하며, 그로부터 야기되는 모순을 ‘중립자로서의 국가’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집권을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들 세력의 규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실현가능한 정책대안 제시를 통한 대중적 지지 제고, 그를 통한 집권이라는 ‘실용주의 논리’를 강조하면서 당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민주노동당이 선거에서 성과를 거두면 거둘수록 더욱 강화될 것이다. 또한 이 노선은 그 의식 여부와 무관하게 사회주의권의 붕괴이후 지구적 수준에서 지배력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모토,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안팎은 없다”라는 담론과 ‘미래의 뿌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나약하지 않다.
사민주의노선은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그 대안으로 역사적 생명력을 다했다고 평가되는 일국단위 프로젝트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 낭만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노선은 종속적 파시즘체제를 매개로 한 유혈적 테일러리즘 아래에서, 사회복지는 차치하고, 먹고 살 자유마저 부정당하였던, 그리고 IMF위기를 계기로 ‘무제한의 시장자유’가 강제되어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인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노선은 이러한 사민주의 노선을 비판한다. 이들은 사민주의를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과 북유럽 등지에서 사민당 혹은 노동당의 이름으로 추구되었던 계급타협주의-수정자본주의 정치노선을 통칭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김현우,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알레르기를 넘어 나아가자」, ꡔ이론과 실천ꡕ(2002/10), pp. 118-119.
이들에게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는 선택지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 물질적 관계에 의한 인간의 질곡을 해소하고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보장하는, 그리고 인류와 생태계의 존속을 보장하는 유일한 이념, 체제, 깃발,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우, 위의 글, p. 119.

사회주의노선은 사민주의와 달리 자본주의국가와 이윤추구의 장으로 기능하는 시장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병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문제의 근원은 사적소유에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필수적이다. 물론 이것이 전면적 국유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해방의 새 세상을 가능케 하는 이념과 체제가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과 결과 모두가 민주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이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및 자유의 확대심화, 기층의 직접민주주의의 확장 및 자주관리적 거점의 분산과 확대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근저에서 변혁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이들 사회주의그룹이 주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 플란차스(N. Poulantzas)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니코스 플란차스, ꡔ국가, 권력, 사회주의ꡕ, 백의, 1994. 참조.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과거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흐름 위에서 제기된 것이라면, ‘진보적 민주주의’는 민족해방 계열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아래에서 보이듯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와 사적소유에 대한 자신들의 궁극적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물론 당 강령에 동의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 또한 자본주의를 극복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적소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가운데 ‘2단계 변혁론’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2단계의 사회변혁은 1단계 변혁의 잔여범주로 간주되고 있는 듯하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적 소유를 절대시하고 사회주의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기존의 부르주아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그 자체는 인정하되 그것이 갖는 반역사성,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철폐를 내세우는 사회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지만, 사회주의의 긍정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수용하고 사회주의와 협력과 공존을 모색할 수 있다고 본다.……진보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와 구별 대립되는 개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철폐와 사회주의적 소유의 전면화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이념과 다르며, 자본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공통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적소유를 절대화하고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를 기초로 삼고 있는 부르주아민주주의와는 달리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그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민중의 이익의 견지에서 그것을 규제해야 한다고 보며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사회적 집단의 단합과 단결을 중요시하고 이 힘에 기초하여 사회적 진보를 추구하려 한다.” 김윤철, 「민주노동당 ‘집권전략논쟁’-이념 및 조직노선논쟁을 중심으로」, ꡔ역사비평ꡕ(2004/가을), p. 70에서 재인용.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정치적 입장이 이른바 민족문제(모순)와 맞물리면서 과거 민족해방그룹의 논리가 고스란히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발상 스스로가 비판했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로부터 발생하는 모순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민족모순이 들어서게 되면서 그것의 해결이 모든 모순의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낯익은 인식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 이르면, 다음에서 보이듯 ‘진보적 민주주의’는 ‘(반미)자주’와 동일시된다.

“우리사회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민족자주를 핵으로 하는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민족자주가 실현되지 않고서는 우리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사회 발전의 가장 주된 적은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사회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민족자주를 핵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사회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자주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김윤철, 위의 글, p. 71에서 재인용


이런 맥락에서 노자간의 모순, 시장의 전횡, 특히 지금 그 모순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 문제 등은 이들에게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들에게는 노자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긴장, 갈등보다는 민족 사이의 모순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무장한 세계화’를 통해 폭력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에도 이들은 양자의 내면화된 관계에 주목하기보다 정치․군사 측면에서 민족적인 측면을 주로 부각시킨다. 이라크파병과 같은 대외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 또한 이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가 ‘불균등발전을 동반한 민족문제―(신)제국주의는 그 전형이다―의 끊임없는 재생산 과정이었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본주의세계체제 안에서 민족모순은 지양될 수 없음에도 민족모순을 강조하며 그것의 극복을 당면의 핵심과제로 설정한다는 것은 곧 기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것을 해소시키겠다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체제 아래에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심국가’로 진입하는 것뿐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가장 강력한 ‘(민족)국가주의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과 실천의 경향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 세력이 민주노동당 안에서 상당한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8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 이 세력은 민족모순에 규정된 ‘생산력 미발전론’을 내세우며 부르주아적 사회관계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는 민족해방그룹의 식민지반봉건사회론 혹은 그것의 변형인 식민지반자본주의론, 종속자본주의론은 물론이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한국사회를 규정하며 민족민주혁명론을 제시했던 제헌의회그룹(이른바 CA) 등의 주장에도 각인되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이른바 좌파 내 ‘근대화론의 옹호자들’이었다. 따라서 사회정치적으로 그 영향력이 미약했던 이들이 종속적 파시스트지배체제와 결합된 자본의 무한착취를 비판하며 집권을 노리던 ‘민중지향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헤게모니 아래 포섭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이들의 정치적 행보를 추동한 과거 ‘자유주의 좌파’의 그 ‘진보성’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비판적 자유주의 세력은 브레튼․우즈체제 아래서 상대적으로 인정된 국민국가의 자율성 존중이라는 ‘국제합의’를 매개로 자신의 위상과 행동반경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른바 ‘수출동맹’이든, ‘분배동맹’이든 그것은 상대적이지만 국민국가의 자율적 역할을 인정하는 전후 자본주의세계체제에 규정되어 있었고 이것은 서구의 복지국가, 혹은 라틴아메리카의 ‘수입대체 민중주의’, 그리고 동아시아의 ‘개발독재’가 작동할 수 있었던 구조적 틀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광일, 「성장, 발전주의 지배담론의 신화와 딜레마: ‘발전주의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경쟁국가’로」, ꡔ한국의 정치사회적 지배담론과 민주주의 동학ꡕ(함께 읽는 책, 2003) 참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신체제의 ‘수출지향적 헤게모니전략’과 적대적 대북경쟁전략에 대항한 이들의 ‘대중경제론’과 ‘연합제통일 방안’이 더 의미를 지닐 수 있었고, 진보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제고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이 과정은 자유주의 좌파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발현을 완화시키는 안전판 구실을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성장한 ‘자유주의 좌파’가 해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3당합당과 DJP연합을 통한 두 번의 권력분점, 국민통합21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철회로 성사된 뜻하지 않은 최초의 독자집권을 경과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광일,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화: ‘민주주의’의 축소와 ‘국가물신’의 심화」, ꡔ정치비평ꡕ(2003/하반기), pp. 90-95.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재 노무현정권으로 상징되는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과 수구정치세력의 차이는 외견상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크지 않다. 이들 양 세력이 현재 대중의 삶을 규정하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무장된 세계화 등을 둘러싼 의제보다 ‘과거사 문제’에 더욱 매달리고 갈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작업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기저에는 현재 자신들이 노출하고 있는 보수성을 감추고자 하는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노림수가 깔려 있다. 즉, 이들은 ‘개혁과 수구’라는 정치적 대립선을 재생산시킬 수 있을 때, 자신들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로부터 파생된 문제는 이들의 주의설적 해결의지의 표현과는 무관한, 그들의 ‘계급적 경계’(class boundary)를 넘어서는 문제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민주노동당 내 민족해방 계열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깊게 내재되어 있던 과거의 관성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최근 국가보안법 등 각종 개혁입법의 추진을 둘러싸고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공조하려는 이들의 정치적 발상과 행보 속에 드리워져 있다. 특히 민족해방계열은 국가보안법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폐지입장을 취해 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행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을 자극하는 것이 원내 각 당의 세력분포를 반영한 현실론인데, 향후 선거라는 정치공학적인 측면을 고려해보더라도,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신)자유주의정치세력과의 차별성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불감증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 세력이 민주노동당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다수를 차지하며 현실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들 세력은 민주노동당의 성장이 반파시즘투쟁과 자유주의정치세력으로부터의 조직, 이념의 자립을 위한 좌파진보운동의 오랜 투쟁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후 민주노동당의 노선은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진보적 민주주의’ 흐름이 서로 경쟁하며 부침하는 가운데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압도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 방향은 당 내부의 긴장관계는 물론 좌파진보운동과 노동자, 대중투쟁의 향배에 의해 일정하게 조건지워질 것이다.

3) 민주노동당의 ‘이행 전략들’

만일 자본주의체제의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이행의 경로’를 고민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문제는 지난 80년대 변혁논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한국사회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가 충분히 논의되고 실천되기도 전, 구동구권의 붕괴와 맞물려 한국의 진보운동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행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시대의 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역사 속에서 현실화된 바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암울한 그늘은 이행의 문제를 우회하게 만들면서, 결국 진보정치의 빈곤을 조장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이행의 문제는 정치노선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데, 사민주의와 민족해방계열의 흐름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상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우선, 국제운동사의 경험에서 볼 때, 사민주의는 선거로 집권을 하고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가 지니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른바 양적인 개혁의 축적을 통해 그것을 완화, 해소시키고자 한다. 이 점에서 혹자는 이들에게 이행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1959년 독일 사민당이 고데스베르크강령(Godesberg Programm)을 채택한 이래 사민주의자들은 오랜 동안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그를 위한 양적 개혁을 주창해 왔으며 민주노동당 내의 사민주의 경향 또한 이러한 범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독일사민당의 이념, 정책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논의는 정병기, 「의회진출 초기, 독일사민당의 이념과 정책변화」, ꡔ진보평론ꡕ21(2004/가을) 참조.

이 노선은 당의 역할을 구체적 정책대안의 제시로 협소화시키는 발상의 강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당의 기술관료화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향후 민주노동당의 조직적 지향과 관련, 사회주의그룹이 주목하는 ‘사회운동적 정당론’에 대한 비판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즉 ‘사회운동적 정당론’이 ‘조합주의 대중투쟁’에 대한 보좌역을 수행하면서 제도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과 그 지도부가 정치력을 발휘하는데 압력과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팔무, 앞의 글, p. 17.
하지만, 복지국가의 한 축이었던 사민주의야말로 조합주의의 상징이었고 바로 그러한 조직의 화석화가 새로운 사회운동 출현의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평가는 적실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사민주의의 화석화는 이른바 포드주의 복지국가체제에서의 조합주의 노동운동의 위기로 표현되었고, 이른바 68혁명을 계기로 ‘신사회운동’이 출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사민주의의 딜레마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조차 그 어떤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정치를 제도화된 행위로 축소시키면서 그것을 노동자, 대중의 외부에 자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고통스럽고 지루한 파국을 거칠지도 모르는 ‘이행의 과정,’ 그 현실 가능성과 무관하게 모두가 바라는 ‘평화적 이행’조차도, 아니 사민주의적인 정책조차도 바로 그 노동자계급정치, 대중정치와 분리되어서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간과한다.
민족해방계열은 이행의 문제와 관련하여 명확한 상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은 아직 사회주의를 전면화시킬 단계가 아니기에, 특히 미국과의 관계로 대표되는 민족간의 모순이 해소되지 않은 채,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일단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전민족의 단결’에 중점을 둘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당에 대한 이들의 다음과 같은 인식에 잘 나타나 있다.

“민족민주정당은 자주, 민주, 통일을 강령으로 하여야 한다. 일부에서는 사회주의적 이념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도 일부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사회의 성격으로 보나 당면 변혁의 임무로 볼 때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그 반대로 이른 바 개혁적 국민정당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민주, 통일을 강령으로 하지 않고 일반민주주의 과제나 참여민주주의와 같은 강령을 내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자주, 민주, 통일은 이미 시대의 대세로 되었다.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은 자주와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사대매국과 민족분열을 지향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갈 것이 분명하다.” 정대연, 「‘민족민주정당’ 건설에 주체적으로 나서자」(2002) 참조.


민족해방그룹은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외견상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선 1단계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구성하고 이후 2단계의 변혁과정을 거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1단계의 과제를 성취하기 위한 민족민주정당의 조직과 ‘전민항쟁’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2단계 변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경로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행의 과정에서 변혁의 주요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국가에 대한 문제,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모순의 극복 문제, 그리고 ‘이행의 동력’ 문제 등은 수면 아래 잠복되어 있다. 이러한 발상의 현실부정합성은 이미 지난 시기 수많은 논쟁을 통해 확인되었기에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것이 민주노동당 안에서 이들이 행사하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그룹 또한 사민주의그룹이나 민족해방그룹과 확연히 구분되는 명확한 이행의 경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민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체제 내 양적인 개혁 혹은 민족해방계열의 ‘2단계 변혁론’과 비교할 때,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혁명과 개혁의 관계, 구체적으로는 운동정치와 제도정치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자본의 시장 지배를 통제하고 해체하는 문제를 매개로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제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대강 살펴보면, 사민주의가 주장하듯 개혁에 의한 양적 축적은 변혁이라는 질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는 ‘이중권력’의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자본과 시장의 통제는 현실적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국가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우회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본이 강제하는 모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것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성두현, 「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하여」, ꡔ이론과 실천ꡕ(2002/8); 정종권, 「새로운 사회주의-민중의 참여와 조직화」, ꡔ이론과 실천ꡕ(2002/8)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당면투쟁이 동시에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파악한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붕괴한 국가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파생한 문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특히 역사적인 ‘프롤레타리아독재’이후 심화된 관료주의와 국가소멸이 아닌 대중에 대한 국가의 자립화로 나아간 과정에 대한 반성과 고민은 국가를 매개로 하는 정치가 초래할 필연적 한계에 대한 인식을 매개하면서 운동정치의 강화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들에게 ‘이중권력’의 조성은 레닌주의적 이행전략을 의미하는 것으로 좁게 해석되지 않는다. 즉 이들은 국가를 변혁 과정에서 조성될 ‘또 하나의 대중권력’에 외재적으로 대립하며 존재하는 사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레닌주의적 이행전략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에게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한 운동정치는 오히려 사회관계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긴장과 모순을 국가 속에 투영시키면서 국가의 관료화와 자립화를 방지하는 핵심 열쇠로 이해되고 있다. 이 때 이들에게는 ‘사회운동적 대중정당’을 지향하는 민주노동당 또한 이 과정을 매개하고 촉진하는 하나의 투쟁장소이다. 이현우, 앞의 글, p. 125 참조.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제기되는 이행논의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 문제가 단지 ‘사민주의 정책’과 ‘사회주의 정책’을 결합시키는 문제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발상을 잘 보여주는 예는 최병천, 「한국사회, 사민주의와 사회주의 처방 ‘둘 다’ 필요하다」, ꡔ이론과 실천ꡕ(2004/7) 참조.
물론 대중의 삶과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 대안은 끊임없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정책이 기계적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사민주의의 실패’는 이미 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물론 이행이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다가올지 선험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대중에 대한 지적, 도덕적 헤게모니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대중정치를 우회해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제도정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정책의 누적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발상은 사회주의를 사민주의 정책의 누적된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더 나아가 결국 그것을 특정한 하나의 모델로 설정, 대체하고자 하는 ‘사민주의 발상’의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역사를 뒤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구사회주의체제의 붕괴이후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프롤레타리아트독재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단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수준에서 대중권력의 총화로 구현되어야 할 ‘프롤레타리아트독재’가 그 노동자대중을 지배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냉정한 비판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다시 ‘프롤레타리아트독재론’을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드러낸 모습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 문제의식이 제기하고 있는 본질적 의미 때문이다. 물론 많은 논의에서 지적되었듯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론’이 노동자계급 등 대중에 대한 독재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내재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과연 자본주의국가는 중립적인가, 그리하여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은 여전히 우회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런 차원에서 그 동안 ‘이중권력’의 조성과 기존 국가의 해체, ‘프롤레타리아트독재’를 통한 이행전략에 대해 ‘진보진영’ 내에서 제기된 다양한 비판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논평들은 주로 역사적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한계와 오류를 비판하는 것에만 머물렀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었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 안에서 제기되는 이행과 관련된 발상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 다양한 정파들이 ‘긴장과 협조관계’ 속에 상존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이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발상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런 진단을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기형성 중인 민주노동당의 역량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가 민주노동당 내부의 긴장관계를 넘어서는, 전체 좌파진보정치의 현실과 미래가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 내부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해 볼 발상은 ‘사회주의그룹’이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이다. 따라서 이를 매개로 당 내외 좌파진보진영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논의에서 자본주의사회관계를 포함한 기존의 비대칭적, 억압적 관계들을 문제시하는 발상들, 운동들의 참여를 미리 배제할 필요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에로이카 > 끔찍스러운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

내 책상 위에는 지금 세 권의 책이 있다.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2006, 공감),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2005, 책갈피), 그리고 김수행, 김공회의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 (2005,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 페이퍼는 위 책의 내용들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그냥 방금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을 다 읽고 서평을 쓸까 하다가, 서평에 쓰기도 뭐한 문제고  하지만,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 서평에서 말이 꼬이지 않을 것 같아 따로 몇 자 적어두기로 한다.

 

10명의 경제학자들을 선정해서 다루는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의 저자들은 논란거리를 피하기 위해 애초부터 이 10명의 선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 수 접고 시작한다(iv). 그러나 이 열 명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통해 종속심화-독점강화 테제를 들고나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윤소영이 들어 있지 않은 것에 의구심을 품은 이가 비단 나 뿐이었을까?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은 이 의구심을 심증으로, 그리고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는 이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윤소영-김수행

 

윤소영은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과천연구실의 어떤 대학원생이 김수행 교수에게 박사논문을 제출했는데, 논문 주제의 유일한 전공자였던 정운영 교수를 김수행 교수가 기피했다는 일화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단절된 것이 반드시 부르주아 경제학 탓인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안병직 교수에 이어 김수행 교수도 만만찮은 기여를 했거든요.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은 정말 끔찍스럽습니다” (윤소영 2006: 105). 이 때까지만 해도 이게 앞서도 몇번 나온 김수행 교수에 대한 지은이의 유감 표명(65, 81)의 연장이려니 했다. 그러다 책의 맨 뒤에 실린 정운영 선생 추도문을 보면서 이 끔찍한 사회학과 정치학이 더욱 궁금해졌다. 403쪽에서 지은이가 언급한 [민중언론 참세상]에 실린 김수행 교수의 글("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어!")은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중앙일보로 옮긴 뒤 정운영 교수의 논조를 못 마땅해 하는 나였지만, 정운영 교수들 두고 당신은 경제학자보다는 신문기자에 더 적성과 소질이 맞다고 계속 생각해왔다는 그 이상한 추도사는 나를 아연실색케 하였다. 정운영 교수와의 옛 정이나, 글솜씨나 감수성에 대한 칭찬, 변절에 대한 책망, 그리고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원망 등이 뒤엉켜 있는 이 글의 형편없는 글솜씨는 충격이 컸거나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좋게 생각한다 해도 글에는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뭔지 모르겠으나, 김수행 교수가 정운영 교수에 대해 어떤 미안함이나 컴플렉스 같은 것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간 김수행 교수의 이 글에 충격을 받은 윤소영 교수는 [밥자유평등평화] (http://bob.jinbo.net)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김수행 교수처럼 정 선생을 추모한답시고 변절 운운하는 것은 김 교수의 생각(저는 김 교수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이나 두 분의 관계(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정 선생은 저널리스트일 따름이라는 단정은 명예훼손급의 망언입니다)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짓입니다.

 

게시판의 또 다른 글에서 윤소영 교수는 김수행 교수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었는 지모르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은 김수행 교수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그가 언제 입장 같은 게 있었냐는 윤소영 교수의 댓글은 김수행 교수의 추도사 만큼이나 뒤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 숨겨져 있는 무언가의 일단은 윤소영의 이 책에서도 나온다. 지은이에 따르면, 서사연 해산 이후, 이전의 한신경제과학연구소와 비슷한 성격의 연구소를 만들려는 흐름이 있었으나, 연구소 창립이 구체화되는 단계에서 김수행 교수가 참여를 거부하고, 다른 교수들(정운영, 김기원, 정성진, 김성구)도 시큰둥해 하자, 자신 혼자 과천연구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65). 물론 이것말고 다른 일들도 많을 것이다.

 

어쨌든 정리하면, 김수행은 윤소영을 무시하고, 윤소영은 김수행을 물어뜯는다.

 

 

윤소영-정성진

 

김수행, 김공회의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은 맨 마지막에 정성진을 다룬다 (122-137). 그 정성진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윤소영 교수에 대한 유감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성진 2005: 221-222).

 

짜골로프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선전하는 데 앞장섰던 윤소영도 얼마전부터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으로 개종했다. 비록 문제점투성이의 일국적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이기는 하지만, 이는 일단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윤소영 (2004)은 이 같은 자신의 이론적 입장의 수정 혹은 변화와 관련된 자기비판이나 해명 대신, 엉뚱하게도 지난 10여년 이상 소련을 일관되게 국가자본주의라고 비판해온 나와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거의 오류를 은폐하려 하고 있다. 윤소영은 이미 14년 전부터 소련 국가자본주의 논쟁을 소개해온 나의 글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정성진 교수는 마치 클리프 그룹이 국가자본주의론을 대표하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이는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라는 등으로 비난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실 호도이고 역사의 날조다. 게다가 윤소영 (2002)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은 뒤죽박죽의 이론적 기회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잡식재단하면서 자신의 무지콤플렉스, ‘트로츠키주의 알레르기를 달래는 것은 자유이지만,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의 폭압과 개량주의의 포섭에 맞서 노동자계급 자기 해방에 헌신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멋대로 왜곡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사실 정성진의 이러한 분노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에서도 윤소영은 정성진 교수가 활동하고 있는 트로츠키주의 그룹 다함께에 대해 가소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윤소영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의 부활은 남한이나 그리스에서만 볼 수 있는 다소 특이한 현상이며, 이들의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알리바이정말 기가 막히는 태도란다 (39).  더 나아가 윤소영은 정성진을 다음과 같이 약올린다. 아래에는 다함께라고 나오지만, 이는 사실 정성진이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발표한 후에 제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지만, 그러나 다함께 같은 데서는 적대감이 더욱 심해졌는지 논쟁을 해보자고 덤벼들곤 하지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저는 그런 논쟁은 사절입니다. 완전히 시간 낭비일 따름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논쟁에는 동지적인 신뢰나 적어도 정직성과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다함께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다함께는 아주 특이한 기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다함께를 보면 한 손에는 코란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지하드에 나서는 이슬람 시아파 전사가 생각날 정도이지요. 게다가 제가 듣기로 다함께는 노동자의 힘과 만나도 늘 그렇게 으르렁댄다고 합니다. 무슨 시아파가 수니파와 싸우는 것 같아요. 제 말이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이론] 4호에 소개된 캘리니코스의 만델 비판을 한번 읽어보세요. 어떻게 같은 트로츠키주의자에게도 그렇게 적대적일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윤소영 2006: 344).

 

정성진이 보는 윤소영은 은폐된 스탈린주의자이며, 사실을 호도하고, 역사를 날조하며, 이론적 기회주의자이며, “무지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넘이다. 반면, 윤소영에게 정성진은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오리발이나 내밀면서, 동지적 신뢰는 커녕 정직성과 분별력도 없고, 지들끼리도 껀수 잡아 싸우는 데 바쁜 한심하면서 질까지 안 좋은 넘이다. 정성진은 윤소영 한 번 걸리기만 해보라며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고, 윤소영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하는 식으로 실실 쪼개고 있는 셈이다.

 

 

++++++++++++++++++++++++++++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있다. 윤소영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정성진은 바로 김수행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윤소영의 모습이다. “본래 남성이란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윤소영의 말(363)은 우리나라에서 난다긴다 하는 이 좌파경제학자들 김수행, 윤소영, 정성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라고 한다면 이들은 왜 자기가 거기 들어가야 하느냐고 하며 억울해 할까? 그 밴댕이 소갈딱지들 갖고 사회성격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기는 상당 기간 동안은 힘들 것 같다. 우울한 현실이다.

 

사실 이 세 경제학자들은 남한의 좌파 경제학자들이 21세기에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각기 다른 전형들이다. 김수행 교수의 경우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담당하고 있으며, [자본]의 국역자이다. 일단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에 관심을 갖게 되면, 제일 처음 접하게 되는 이름이고, 행여 그 부분을 전공으로 삼을라치면 거쳐야할 큰 스승의 위치에 있다.

 

물론 윤소영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의 학생은 일류이지만, 교수는 이류일 뿐이고, 비봉판 [자본]은 대학원생들 도움을 받아 개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북한판을 남한말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소영 교수는 80년 광주항쟁을 전후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이래, 자신의 입장을 갖고 PD론을 정초했으며, 절친했던 선배인 이병천이 중진국론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또 발전국가론으로 널뛰기를 하고 있을 때, 알튀세르-발리바르 계열의 마르크스주의의 한 길을 걸어왔다. 한신대라는 좌파 대학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현실 운동에서는 한 걸음 떨어져 과천연구실을 꾸리고 있다. 그는 87년 이후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실에 나오는 후학들이 행여 선거에 참여하여 민주노동당이라도 찍을까봐) 과천연구실 MT 출발을 선거당일 아침 6시에 했다는 얘기를 저서에서 자랑스럽게 한다.

 

이런 윤소영은 정성진 교수에게는 파렴치한 스탈린주의자일 뿐이다. 정성진 교수 또한 경상대라는 좌파 대학 경제학과에 자리잡고 있고, 교수라는 점잖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다함께라는 정치조직에 투신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동시에, 남한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를 위해 학진의 후원을 받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라는 반년간 학술지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이들 말고도 다른 전형들을 들 수 있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 연구소의 장상환, 참여연대나 대안연대에서 활동하는 교수들, 그리고 재야의 채만수 등등...

 

밖에서 보기엔 그 물이 그 물이고, 우리 힘 한 번 합해서 뭐 한 번 해봐야 하는데... 꼰대들이라 완전 콩가루다. 뭐 거창하게 단결투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고 제대로 된 토론문화 한 번 만들어 보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모두들 상대방만을 탓하고, 자기가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아니면 이제 연세들이 드셔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선생들 밑에 있는 대학원생들은 어떨까? 그 사회도 줄을 서야 할텐데... "나는 바담풍 하더라도 너는 바람풍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또 이 양반들이 쓴 책을 사볼 어린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은 또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역시 우리 윤소영... 역시 우리 정성진... 이럴까? 또 그런다고 한들 공부하는 양반들인데, 그게 또 자기한테는 무슨 득이 되겠는가?

 

안 그래요? 선생님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이론 세미나의 실패는 대개 선명하지 않은 목적의식과 이론에의 편향에서 비롯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문화이론 세미나에서는 목적의식과 이론과 실천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화이론 세미나의 커리큘럼은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작성해보았다.

1. 문화이론 세미나의 목표

세미나의 부제는 '문화, 이데올로기, 민주주의'다. 문화라는 영역에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감추어져 있는지 찾아내고 분석하는 것, 더 나아가 문화에 의한, 문화를 위한, 그리고 문화의 민주주의를 성취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것이 세미나의 대략적인 목표다.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정치체제를 바꾸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정치적 영역의 민주화를 얻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80년대였다. 그리고 위선적이긴 했어도 우리 사회는 제도적 측면의 민주화를 어느정도 성취했다. 하지만 그런 제도적 민주화의 성취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민주적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여성들은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청소년은 여전히 인권을 무시당하며 입시전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연, 학연이라는 비뚤어진 관행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제도적 민주화로 인해 우리의 삶은 진정 자유로워졌는가? 진정한 자유는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과정인 삶의 전체에서 다차원적으로 해방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해방은 문화적 층위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우리의 생활양식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이고 진보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문화의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문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우리 삶의 총체적 해방을 지향하고자 할 때 우리가 넘어야할 장애물이 있다. 그 장애물 또한 '문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문화를 통해 해방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처럼 지배계급 또한 문화를 통해 우리를 길들이려고 한다. 대중문화, 상업성 문화의 범람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주입되는 갖가지 이데올로기를 통해 권력은 우리를 '문화화' 시키고 지배하려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권력의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문화이론가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가장 일상적이면서 또한 가장 은밀한 영역인 문화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상당한 통찰력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가 문화이론을 학습하면서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통찰과 반성일 것이다.
 
2. 분석틀의 학습과 그 적용

문화'이론' 세미나에서는 당연히 이론을 '학습'하는 것만으로도 목표가 달성되었다 할 수 있다. 그 이론의 적용은 문화이론 세미나가 아닌 다른 세미나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론의 학습과 그 적용이 유기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 커리큘럼에서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아쉽지만 이론보다는 그 적용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이론은 문화를 분석할 수 있는 분석틀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이 실제 문화분석에서 어떻게 이용되며 그 효과와 의미는 무엇인지를 찾아보도록 한다. 이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화이론 세미나보다는 철학이나 현대사상 세미나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이론 세미나 첫 번째 시간: Introduction - 문화이론의 지형도>
 
  ◇주교재:『대중문화의 이해』(김창남, 한울) 中 제1장~ 제6장
◇참고자료 (학회교사나 선배들은 미리 읽고 공부하면 좋겠죠? ^^)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대중문화의 패러다임』(원용진, 한나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존 스토리, 현실문화연구)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中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프랑스 철학과 우리3』(당대) 中 김동수,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시대와 철학 7호』中 홍기숙,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연구

Introduction으로 김창남의『대중문화의 이해』앞부분을 읽어보자. 문화의 정의, 대중문화의 엘리트주의적 관점, 대중문화와 지배이데올로기에 관해 간략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문화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문화이론 세미나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3. 문화이론의 지형도

<대중 사회론> 매튜 아놀드, 리비스 (고급문화-저급문화, 문화적 엘리트주의)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                                   발전, 극복:그람시
    프랑크푸르트 학파                         벤야민                    스튜어트 홀                                                        문화주의
         알튀세르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            
        구조주의 문화이론           (후기구조주의)
                                                                               부르디외

  * 페미니즘 문화이론        

 현재 영향력을 가지는 문화이론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여러 문화이론들이 계급을 중시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밝혀내고, 개인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조화되는 과정을 분석하는데 주력하는 것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 이전의 문화이론은 매튜 아놀드나 리비스등으로 대표되는 대중사회론이라 할 수 있다. 이 견해는 고급문화를 중시하면서 대중문화를 질 낮은 문화로 취급하면서 대중문화로부터 고급문화를 구해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고급문화를 접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들의 문화 엘리트주의적 견해는 오늘날 많은 영향력을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범람하면서 문화가 자본의 이해에 지배되는 것이 점점 심해지는 현실에서 무조건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최근의 문화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일정 정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좌측의 이론들이 지배 이데올로기 분석에 중점을 두면서 구조의 견고함을 드러내는데 비해 가운데 부분의 벤야민, 문화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의 일부는 그 와중에서도 개인의 자율성과 능동성, 가능성을 중시한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 수 있다. 그리고 구조의 견고함과 개인의 자율성의 대립을 극복,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이론을 제공한 사람이 그람시다.
스튜어트 홀은 영국 문화주의를 계승하면서 구조주의와 그람시,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여 문화이론을 발전시킨 이론가이며, 부르디외는 구조주의의 의미를 새롭게 하면서 그람시적인 헤게모니 갈등과 투쟁을 중시하는 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문화이론들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 위치지울 수는 없지만 여러 문화이론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문화이론과 문화분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개념>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 토대-상부구조, 이데올로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문화산업 비판
▷발터 벤야민: 대량복제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해방의 가능성. 아우라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구조주의(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문화주의(호가트, 톰슨)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보드리야르, 프레데릭 제임슨, 푸코)

너무 많은 내용을 짧게 다루어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저 본격적인 세미나로 들어가기 전에 문화이론의 흐름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학회교사가 간단한 발제문을 만들어서 설명해주고 굵은 글씨로 되어 있는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알튀세르 등에 대해서만 간단한 토론을 한다. 이론의 이해는 <대중문화의 이해>에 실려있는 정도로만 해도 좋다. 

<문화이론 세미나 두 번째 날>

②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문화영역에서의 헤게모니와 진지전의 가능성

◇주교재: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유팔무, 김호기 편, 한울) 中 김성국,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학회평론 제5호』(93년 겨울) 中 김현우, 현 문화운동 논의에서의 알튀세르와 그람시의 적용성 비교
『대중문화와 문화실천』(김창남, 한울) 中 제2부 결론: 대중의 문화실천과 대중문화의 저항성

◇심화학습을 위하여)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유팔무, 김호기 편, 한울)
  : 그람시의 시민사회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시민사회론까지 다루고 있다.
『국가/계급/헤게모니』(임영일 편, 풀빛)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앤더슨 외/ 신진욱 외 편역, 갈무리)
『그람시의 여백』(르네이트 홀럽, 이후)


그람시는 러시아 혁명과 조건과 상황이 다른 서구에서 어떻게 하면 혁명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고 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다. 그런 그람시를 문화이론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은 김성국의 글을 통해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 대해 이해해보자.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피지배계급이 일정정도 지배계급의 지배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헤게모니란 한 사회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확산시키고 대중화함으로써 동의를 얻고, 이것을 통해 전체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도력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회는 강제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있지만 이러한 헤게모니에 의한 지배가 더 본질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라는 것은 어느 사회계급 일방에 의해 소유되고 조작되는 것이 아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헤게모니 지배를 피지배계급에게 끊임없이 보증받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고 혁명이란 이러한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끊임없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헤게모니 지배가 핵심적이라면 투쟁의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그람시는 헤게모니을 둘러싼 이 끊임없는 투쟁을 '진지전'이라고 표현한다. 이데올로기나 교육을 통해서 기존 헤게모니를 파괴하고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현우의 글은 그람시가 문화운동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알튀세르의 이론과 비교하여 그람시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다양한 '수용'의 양태를 보여주면서 각각의 층위에서 의미있는 헤게모니 투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현우는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의 결과를 그람시를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기존의 문화운동 논의에서는 '대안의 추구' 수준만을 의미있는 저항이라고 상정하였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화운동을 이끌지 못하는 청소년, 노동자, 중년여성들의 문화수용-대중음악을 따라 부른다거나 들으면서 위안을 얻거나 하는-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냈다. 하지만 김창남은 여러 하위문화에서 일어나는 대중문화 수용이 비록 지배문화와 일정한 수준에서 타협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층위의 투쟁을 부정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층위에서 저항의 수준을 높여 대중을 대안추구의 단계로 이행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바로 그람시가 말했던 대항 헤게모니의 구축이고 지적 도덕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역사적 블록 형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람시의 이론이 문화이론에 적용되는 것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토론거리들을 가질 수 있다. 진지전이란 문화 영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혹은 유기적 지식인의 활동이 문화운동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현우가 인용했던 김창남의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김창남은 여러 하위문화에서의 대중문화 수용 각각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면 아래에서 아무리 저항의 층위를 높여간다해도 언젠가 수면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의미있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문화이론 세미나 세 번째 날>

③ 푸코의 권력이론: 우리의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

◇주교재:
『경제와 사회 97년 가을호』中 양운덕, 푸코의 권력계보학: 서구의 근대적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윤평중, 교보문고) 中 제4부 미셸 푸코
『현대 철학의 흐름』(박정호, 양운덕, 이봉재, 조광제 엮음, 동녘) 中 10장 미셸 푸코

◇심화학습을 위하여) 『감시와 처벌』(나남)
                    『성의 역사1: 앎의 의지』(나남)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푸코에 따른다면 그 자체로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 "나"는 의식이나 경향성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존재다. 내가 나를 "나"로 인식하고 나에게 어떤 "경향성"이 있는지 이해할 때 "나"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의식이나 경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외부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우리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 주체 외부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담론이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담론, 즉 말들의 질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 외부의 구조가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 하나씩 밝히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제껏 고유하다 여기던 "나"라는 존재가 일순간 구조의 산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일 것은 없다. 푸코는 주체를 구성하는 담론을 통하여 인간에게 겸허함을 촉구했다면, 권력이론과 미시권력 개념을 통하여 저항할 수 있는 곳에서 저항하라는 메시지를 아울러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평중의 글 1, 2장을 통해서 담론 개념을 파악하자. 이성과 비이성의 분리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여왔는지 살펴본다면, 지금 우리의 인식체계 역시 시대적 조건 안에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평중의 글 3, 4장과 양운덕의 글은 권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푸코는 독특한 권력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힘이 아니다.
권력은 오히려 지식을 산출하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권력/지식이라 표기되는 이 생산적인 힘은 중심도 없고 소유자도 없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편재하며 지식을 산출하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사고뿐만 아니라 육체도 지배한다(감시와 처벌을 참조).
즉 누군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권력자를 없애면 지금의 권력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사회와 사회가 맺고 있는 복합적인 역학'관계' 내에서는 어디에나 권력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의 저항의 대상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거대권력이 아니라 일상에서 우리를 알게 모르게 길들이는 미시권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푸코의 이론에 대해서는, 푸코의 저항 전략은 과연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지, 과연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담론인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이론 세미나 네 번째 날>

④ 부르디외Ⅰ: 아비투스, 장, 문화자본, 상징폭력 등 부르디외가 제기한 개념들에 대한 검토

◇주교재: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파트리스 보네위츠, 동문선) 中 3, 4, 5 장
◇참고교재: 『문화이론연구』(정재철 편저, 한나래) 中 제2장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문화자본」
◇심화학습을 위하여)
『문화와 권력-부르디외 사회학의 이해』(현택수 외, 나남)
『경제와 사회 96년 겨울 호』중 中 현택수,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이론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사』(부르디외, 새물결)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부르디외, 새물결)


문화이론에서 부르디외의 위치는 각별하면서도 독특하다 할 수 있다. 문화이론의 대표적인 흐름은 알튀세르로 대표되는 구조의 결정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그람시로 대표되는 문화의 상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흐름으로 나뉘어진다. 하지만 실제 문화와 구조와의 관계는 어느 한 입장만으로는 반쪽짜리 진실밖에 밝혀 낼 수가 없다.
문화와 구조 사이의 연결구조를 밝히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이 두 입장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구체적인 역사연구와 조사자료의 통계분석을 근거로 지적 실천이 갖는 상대적 자율성의 역사적 뿌리와 경제적 계급적 결정요인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즉, 부르디외는 우리의 인식과 계급이 역사적으로 대개는 경제적 계급적 요인에 의해 구조화되어 왔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구조 속의 행위자들이 나름대로 전략적 사고와 선택을 통하여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론은 방대한 통계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신뢰감을 형성시켜 준다는 점이 또한 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계급 재생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부르디외 이론의 궁극적인 목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현 자본주의 사회 계급의 재생산구조를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람시가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지배에서 찾으려 했다면 부르디외는 우리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계급구조에 편입되어 재생산되는지에 대하여 찾아내려는 것이다.
이때의 계급이란 단순한 경제적 관계 이상을 의미한다. 계급이란 힘과 '의미'의 관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인 '의미',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의 문화적 환경이다. 개인이 어렸을때부터 어떤 환경과 교육 속에서 어떤 다른 의미를 획득하고 취향을 형성하게 되었는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상류계급이 경제자본을 바탕으로 학력자본을 획득하고, 고상한 취향마저 형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지배를 인정받는 메커니즘의 실체,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벼락부자가 되어도 상류계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원인들을 밝혀가다 보면 놀랄만큼 냉정하게 현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투스, 장, 상징자본, 상징폭력 등의 부르디외의 개념들은 상당히 낯선 것이기에 1회의 세미나 안에서 부르디외가 제기하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부르디외의 저작들은 많이 번역되어 나온데 비해 부르디외 입문서나 해설서는 거의 없다시피 해서 초보자는 접근이 어렵다. 그나마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이 거의 유일한 책이지 않을까 싶다.
  
<문화이론 세미나 다섯 번째 날>

⑤부르디외 Ⅱ: 재생산과 대학문화 분석

◇주교재:『부르디외 사회학 입문』(파트리스 보네위츠, 동문선) 中 6 장
      『경제와 사회 33호』(97년 봄호) 中 구본홍·이철승·정동철, 객관적 기회와 주관적 희망
◇참고자료:


「주관적 기회와 객관적 희망」은 부르디외 이론을 이용하여 90년대 대학사회의 변화와 문화, 그리고 이러한 조건하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대학생들의 전략과 문화양식의 차이를 분석하고 있다.
글 자체로 흥미진진할뿐더러 우리가 매일매일 부딪치는 일상의 문제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저자들은 90년대 대학문화의 구조적 조건과 특징을 소비대중문화와 학점중심주의로 보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학생들은 외국어, 컴퓨터, 자격증, 인기 유망학과 등의 차별화된 자본획득전략을 구사하고, 계급에 따라 취향의 다양화가 나타난다고 본다.
이 글을 중심으로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찾아 이야기해 보고, 이런 계급 재생산 구조를 파괴하기 위한 대학의 역할이나 의미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다.
 

 

<문화이론 세미나 여섯째 날>

⑥ 정리: 문화사회를 위하여


 ◇주교재: 『문화사회를 위하여』(심광현 이동현 편저, 문화과학사) 중 中 제1부 문화사회란
            무엇인가
 ◇참고교재)
 『혁명의 문화사』(강내희 외, 이후) 中「21세기의 혁명-'문화사회'라는 프로젝트」
 『작은 풍요』(강수돌, 이후) 中 제1부 「문제의 뿌리」, 제4부 「발상의 전환」


그람시부터 부르디외까지 문화이론을 살펴보면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사회를 기존의 '정치적'인 것이나 '경제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문화적인' 것으로 보자는 것이었다.
저항의 방식도 정치투쟁이나 경제투쟁이 아닌 문화투쟁의 측면을 중요시하며 살펴보았다. 하지만 다시 세미나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그처럼 문화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문화로 투쟁한다는 것은 사실 말뿐이게 되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내일 끼니가 걱정인 사람, 하루 종일 과중한 노동으로 심신이 피곤한 사람, 실업자인 사람들에게 문화투쟁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강내희는 우리가 문화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시간 단축이 필수라고 이야기한다.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단축이 이루어져서 각기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 때 문화사회를 만들 여유도 생기고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운동을 꿈꾸는 사람은 노동운동과 반드시 연대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전 에너지를 노동운동에 우선적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노동운동에 좀 더 힘을 실어줄 필요는 있지만, 그 노동운동의 방식이 '문화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거대한 목표를 위해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죽이는 일, 조직 내부의 억압관계, 차별관계를 무시하는 일, 미래를 위해 지금의 문화적 욕구들을 억누르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마도 이 강의에서 우리가 출발하는 물음은 '맑스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십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하지만 게 중에는 보다 생산적인 질문법도 있다.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를 통해 맑스주의를 다시 사고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또 무척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맑스(그리고 엥겔스나 레닌)이라는 개인, 혹은 한 시대의 사상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성(감성)과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언제나 동시대성을 갖고 발전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것이어야 존중과 적용, 전유의 가치가 있는 사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강의에서는 맑스 이후 맑스주의의 전개에서 여러모로 걸출한 인물인 안토니오 그람시를 통해 맑스주의의 특성을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맑스주의 전통 속에서 그만큼 여러 영역에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는 이도 드물다. 그는 맑스주의 정치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문화이론에도 막대한 기여를 남겼다. 그는 서구 맑스주의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반면, 가장 정통의 레닌주의자이기도 하다. 또 그는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 속에 있지만, 포스트 맑스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는 이론 구조를 제공한다.
때문에 그는 이 강의의 소재로도 적절해 보인다. 이 강의에서 맑스 이후의 수많은 맑스주의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예컨대 그람시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 나아가 맑스주의 자체를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1. 그람시라는 인물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1891년 이탈리아에 딸린 큰 섬인 사르디니아의 알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앓은 병 때문에 평생을 곱추로 지냈고, 이게 어쩌면 그에게 남다른 감수성과 통찰력을 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언어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11년 토리노대학에 입학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당(PSI)의 언론에 기고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5년에는 사회당의 일간지인 <전진(Avanti!)>의 토리노판 편집위원회에 결합하고 지역 사회당 주간지 <민중의 외침>에도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등 활동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1919년에는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 등과 <신질서(L'Ordine Nuovo)>를 '사회주의 문화비평' 주간지로 창간했고 이 편집팀은 사실상 하나의 정치집단으로서, 같은 해 벌어진 토리노 피아트공장 파업에 결합하면서 공장평의회 운동을 주도한다. 1921년에는 몇몇 이들과 함께 소비에트의 프롤레트쿨트와 제휴하여 프룰레타리아 문화원을 설립했고, 사회당의 리브로노 당대회에서 공산주의 분파가 탈당함에 따라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PCd'I)의 지도부로 참여하게 된다.
1922년,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코민테른 대의원으로 지명되어 소련으로 떠났고, 이후 2년간 소련에 체류하면서 배우자가 될 줄리아 슈히트와 만났다. 10월 28일, 무솔리니가 '로마행진'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1924년 귀국하면서 공산당의 새 집행부를 이끌게 된 그람시는 이후 몇 년간 무솔리니의 파시즘 하에서 결연한 투쟁을 전개한다. 공산당의 서기장을 맡게 된 그람시는 당의 '볼셰비키화', '통일전선' 정책의 적용, 세포에 기반한 당의 재구조화 등을 요구한다.
1926년에는 이탈리아 공산당 정치국을 대표하여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내어 볼셰비키 당내의 격화되는 분파투쟁에 우려를 표한다. 같은 해 11월 파시스트 체제는 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그와 다른 공산당 의원들을 체포한다. 다음 해 그람시는 특별재판소에 의해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후 17년동안 그는 옥중에서 32권의 노트로 구성된 {옥중수고}를 집필한다. 1937년 4월, 국제적 켐페인에 의해 출옥을 보장받게 되었으나, 이미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같은 달 27일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한다.

그의 생애가 이렇듯 극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를 후대가 기억할 주된 이유는 아니다. 이론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고전적 맑스주의의 한 정점을 이루는 인물이라는 것이 훨씬 중요한 평가지점이다.
1920년대 말 이후 러시아혁명의 타락과 함께 거의 모든 코민테른 공산당이 스탈린주의화되면서 페리 앤더슨이 지칭한 바와 같은 '서구 맑스주의'는 현실정치에서 급속히 후퇴하게 된다. 이와 같이 앞이 막혀버린 상황이 계속된 결과 역사유물론의 전통에서는 가장 중심적인 영역으로 여겨졌던 문제, 즉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경제운동법칙에 대한 정밀한 탐구,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적 기구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이행을 위한 계급투쟁의 전략 등에 대해서는 고의적인 침묵이 행해지게 되었다.
앤더슨은 그람시가 이러한 전반적인 추세에서 유일한 예외였다고 평가하는데, 논리적으로 볼 때 그만이 고전적 맑스주의의 유산을 규정짓는 유형, 즉 이론과 실천의 혁명적인 통일을 자신 안에서 구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람시 자신의 옥중 저술은 장기간에 걸친 파시즘 치하에서 잉태한 것이었다. {수고}가 처음 발견되어 간행된 것은 1947-49년 사이였는데 그 저술이 가져다 준 충격은 PCI 내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람시의 사후에 그의 저작이 이탈리아 공산당의 경전으로 취급되게 되자 그가 이탈리아 맑스주의에 이론적으로 남겨놓았던 유산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60년대 영어권과 불어권에서 그람시의 '재발견'될때까지 계속되었다. 신좌파와 유로코뮤니즘, 남미의 변혁운동까지 광범하게 그람시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물론 그의 기여에 대한 평가와 논쟁, 그리고 현실 운동 속에서의 전유라는 과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2. 이론적 기여

1) 지속적인 영향
1960년대 이후, 그리고 1980년대 말의 동구권 몰락 직후 그가 다시 주목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의 강점을 철저히 인식했던 거의 유일한 혁명가였고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을 이해하고 맑스주의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정치학의 영역을 구축한 독창적인 이론가였다.
다음으로, 그는 처음부터 "{자본}에 반한 혁명"인 러시아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동시에 혁명 후 소비에트 사회를 수동혁명의 한 형태로 비판한 스탈린주의 비판자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소연방의 '역사성'을 주류 좌파와는 다른 통시성을 가지고, 비경제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한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일부이되 그 변방이었던 이탈리아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통찰해냄으로써 선진국의 혁명모델과 제 3세계 혁명론에 다같이 풍부한 함의를 던져준 사상가였다.
그람시 자신의 사상과 이론의 폭 만큼이나 그의 영향력은 네오 레닌주의자로부터 포스트 맑스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걸쳐있다. 국가론에 정통한 정치학자 크리스틴 부시-글룩스만이나 역사학자 존 카메트가 그람시 좌파에 해당한다면 조셉 페미아, 보비오, 라클라우 등은 그람시 우파라 할 수 있겠다.
에드워드 P. 톰슨이나 에릭 홉스봄같은 역사학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쓰는 작업 속에서 그를 재발견하고 그들의 작업 속에 창조적으로 수용해냈다.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에서 그를 간략히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만, 페리 앤더슨이나 스튜어트 홀 등 NLR지 안팎의 인사들은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에 입각하면서도 그람시의 개념들을 적극 전유하고자 했다. 그람시의 사상은 플란차스의 국가이론으로 한 정점을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에는 문화연구(윌리스), 조절이론(제솝), 계급형성이론(뷰리웨이) 등 많은 영역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2) 다양한 면모
 그의 사상이 이토록 다양하게 해석되고, 여러 방면의 성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론틀이 갖는 포괄성과 깊이, 그의 상황적 고려의 복잡성 때문일 것이지만, 그의 사상이 갖고 있는 여러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칼 보그는 그람시의 지적, 정치적 발전을 네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1913-1919년 사이 이탈리아 사회당의 극적 고양과 뒤이은 퇴조의 시기, 1919-20년 사이에 <신질서>운동을 이끌면서 토리노의 공장점거와 평의회 운동 속에서 노동자들의 자발적 정치투쟁을 이론화하고 정치지침을 제공하던 시기, 그리고 1921-26년 사이로 PCI의 중앙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는 보르디가와 같은 좌익 고립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파와 대항하면서 반파시즘 투쟁에 몰두하던 시기, 끝으로 1926년 투옥 이후 죽을 때까지 정치적 고립과 가족과의 불화를 감내하면서 방대한 주제에 걸친 이론작업을 진행하던 시기.
칼 보그는 이 네가지 시기가 대략적으로 그람시의 세가지 얼굴, 즉 평의회 공산주의 내지 혁명적 공산주의자라는 면모, 레닌주의자로서의 면모, 서구 맑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는다고 이야기한다. 1919-20년 사이의 붉은 이년(Biennio Rosso)은 그로하여금 평의회 경험을 통해 대중민주주의적 충동들에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함의를 부여할 수 있는 사회적 변형의 개념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이 시기의 그는 소위 과학적 유물론의 결정론적 자세를 비판하면서 혁명적 정치의 주도성은 대중의 자율적 활동으로부터 성장해나와야 하며, 지도자들의 대중들의 '후렴' 이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람시가 품고있던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상은 평등주의적이고 비관료적인 사회와 권위관계들의 영역을 점차 확장시킴으로써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를 예시(豫示)할 수 있는 대중투쟁의 유기적 과정이었다. 이러한 '예시적(prefigurative)' 차원은 동시대의 평의회 공산주의와의 어떤 상응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평의회운동의 실패 및 파시즘의 흥기와 함께 그람시의 입장은 변화하여, 갓 태어난 PCI의 지도부를 맡게 된 1921년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전위주의자 레닌에 좀더 가까이 이동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르디가와의 논쟁에서 그는 엄격한 기간요원들의 조직보다는 대중적 정당을 지속적으로 옹호했으며, 레닌이 소비에트 정당 내의 분파를 금지시켰을 때 내부적 민주화를 지지했고, 무엇보다도 당의 관료화에 대한 견제로서 노동자 농민위원회들의 성장과 세포의 광범한 구축을 고무했다. 이는 분명 평의회 운동 때 형성된 관점일 것이다.
그람시의 점증적인 자코뱅주의는 {옥중수고}로 이어지며, 여기서 레닌은 총체적 목적을 위한 정치적 행동의 우위성을 확신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사상가로서, 마키아벨리의 현대적 상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현대의 군주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위해 가동되는 전투기구라기 보다는 '진지전'의 일부로서 시민사회 내에서 이데올로기적 교육학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집합적 지성'에 가까운 것이다.
한편 그에 대한 '서구 맑스주의자'로서의 해석은 우선 {수고}에서 발견되는 관심사들, 즉 이데올로기적 지배, 문화적 투쟁, 의식 등과 같은 테마들에 대한 논의가 발굴되면서 비롯되었다. 또 총체성, 변증법, 실천 등과 같인 신헤겔주의적 주제들이 그를 다시 읽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유로코뮤니스트로서의 면모까지 그에게 덧씌워지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의 면모 또는 '혐의'는 - 90년대 말 서구 좌파의 지형으로서는 이조차도 좌익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 확실히 부적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가 그람시의 통합된 측면들의 부분들이며, 그의 지적 정치적 일관성은 여전히 추적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알튀세르가 맑스를 청년 맑스와 후기 맑스, 또는 헤겔적 맑스와 과학적 맑스로 나눈 것과 같은 식으로 그람시를 단계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3) 그람시의 맑스주의
옥중에서의 그람시는 검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작업하곤 했다. 그래서 트로츠키같은 인명은 '브론슈타인'으로 표기되었고, 맑스주의는 '현대의 이론' 또는 '실천의 철학'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표기는 단지 검열의 문제만으로 이야기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실천의 철학'이라는 언급이야말로 맑스주의에 대한 그람시의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이해를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과 인간의 활동을 바꾸는 것, 즉 자기변화의 동시발생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맑스의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주장을 가장 전면적으로 파악한 맑스주의 사상가였다. 그러나 이 실천은 개인적인 맹목적인 실천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의식적인, 무엇보다도 집단적인 실천이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이 실천은 '정치'와 완전히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람시는 "인간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모두 나름대로 철학자"라는 유명한 언급을 남겼는데, 하지만 대중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이고 단편적인, 때로는 모순적인 의식의 요소들(상식)은 그들의 집단적 의지를 행동화시킬 수 있는 비판적이고 체계적인 자각으로 변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세계관은 고립된 개인들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지가 형성되려면 그 출발점 및 확산의 계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것이 정치의 매개이다.
결국 그람시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곧 대중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대중에게 교조를 주입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즉 모든 사람은 철학자이며, 그들의 상식(common sense) 속에서 양식(good sense)를 혼란스러운 편견 등과 분리해냄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확대 발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지식인을 겨냥한 투쟁이다. 그람시는 전통적인 지식인, 또는 부르주아의 전문가들과 구별되는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존재를 개념화한다. 유기적 지식인은 명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 실천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항상적 설득자'이자, 노동자계급 내에서 직접적인 조직성원이 되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획득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길고 힘든 과정이라는 사실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들 자체가 이념적 발전과 정치적 동맹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적 블록(historic block)'의 중요한 자원이며, 또한 블록 형성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람시는 대중의 집단적 이성을 신뢰했지만 결코 자생성을 무조건 찬양하지도 않는다. 대중의 자생적 감정과 현대의 이론(맑스주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오직 양적인 정도의 차이만이 있으며, 한쪽으로부터 다른 한쪽으로, 또 그 역으로 전화할 수 있는 상호 환원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룩셈부르크의 대중주의, 루카치의 관념적 역사주의 또는 레닌의 '외부로부터의 주입'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에는 언제나 당과 유기적 지식인의 적극적 활동과 변증법적 과정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람시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진지전'이라 표현되는 장구하고 어려운 혁명의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어떤 사회주의'와 함께 '어떻게 건설'되는 사회주의인가라는 두가지 핵심적 물음을 함께 제기하고 대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파괴와 건설의 과정이자 의식적인 교육과 조직의 과정이다. 자본주의 전복, 또는 해체에 관한 노동자혁명의 파괴적인 측면보다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측면에 대한 유다른 강조는 그람시에게 일관되고도 특징적인 것이었다.

4) 현대의 군주
"{자본}에 반하는 혁명"이라는 말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었다고 생각되던 러시아에서 세계제국주의의 약한 사슬을 끊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하게 된 예외적 상황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적극적 행동주의와 지도력 -- 즉 '자코뱅주의' -- 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언급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자코뱅주의를 재평가하면서, 도시와 농촌,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는 '국민적-민중적(national-popular)' 연합의 지도력을 뜻하는 적극적 의미를 이 용어에 부여했다. 이는 얼마간 레닌의 [사민주의자의 두가지 전술]에 대한 독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민적-민중적 지도력이라는 것은 그람시에게 있어서는 리소르지멘토의 부흥, 그리고 파시즘과의 투쟁,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의 역할이라는 것과 연관된 맥락이었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연구를 통해 당 문제에 접근했다. 마키아벨리의 중요성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통일국가의 창립을 위한 국민적 집단의지를 어떻게 창출하는가를 보여주는 선구적인 시도를 제시했다는 점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조숙한 자코뱅"이었고, 그는 '군주'라는 신화적 인물을 통해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인 지도력, 전략 및 전술을 설명했다. 그람시는 새로운 노동자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그와 같은 정치적 지도력, 즉 '현대의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의 군주는 실재하는 인간, 구체적인 개인일 수 없다. 그것은 집단의지가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유기적인 조직체, 사회의 한 복합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이런 조직체를 제공해왔는데 그것이 바로 정당, 즉 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맹아가 모아지는 최초의 세포인 것이다.
그람시는 당이 취해야 할 '이중적 관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잘 알려진 '강제와 동의'의 결합에 대한 인식이다. 이중적 관점은 가장 초보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들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결국 마키아벨리의 반인반수(centaur)라는 풍유와 관련되는 것이다. 반은 짐승이고 반은 사람, 그것은 힘과 동의, 권위와 헤게모니, 폭력과 문명, 개인적인 계기와 보편적인 계기, 선동과 선전, 전술과 전략 등의 차원이다. 이러한 차원들은 기계적으로 분리될 수도, 시간적으로 분리된 연속된 단계로 표현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당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유지 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풍부한 설명력을 제공해왔다.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야말로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의 또다른 측면이기 때문이다.

3. 논쟁적인 개념들

여기서는 그람시의 개념들 중 오용되거나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몇가지를 뽑아 본다.

1)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단지 '패권'이나 '주도권'이라는 의미로 남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람시의 저작 속에서 이 개념이 갖는 독특한 맥락은 무엇인가?
- 헤게모니 또는 'hegemonya'라는 개념은 러시아 노동운동에서 플레하노프의 저작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전통 속에서 이 개념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자신의 협소한 조합적 이해를 넘어서는 혁명적 자각과 정치적 의지를 형성할 필요성(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을 언급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그람시가 발전한 정치체제에서 이데올로기적 동의의 메커니즘을 묘사하면서 부여한 추가적인 의미는 갖고 있지 않았다. 레닌은 이 용어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빌어왔고, 제 3인터내셔널의 대외문서에서 사용했는데, 그람시는 확실히 여기서 원천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 용어는 19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지오베르티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이탈리아적 계보를 갖기도 하는데, 그는 이 용어를 이탈리아 통일과 관련하여 한 지방이 다른 지방에 대하여 행사하는 '도덕적 우월성'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 개념의 핵심적 특징들은 사회주의적 의식의 조직화에 있어서 교육과 문화의 역할에 대한 그람시의 초기 저작들에 뚜렷이 나타난다. 즉 그람시는 러시아-코민테른적 용법을 이탈리아에 독특하게 동화시켰던 것이다. 역으로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은, 이탈리아 부르주아지가 문화적 헤게모니적 우월성을 갖출때만 얻을 수 있는 민중의 동의없이도 어떻게 이탈리아를 지배하는가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 용어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리소르지멘토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산당이 나라 안의 모든 반대세력을 끌어모아야만 하며, 여기에 볼셰비키적 수단이 국민적인 도덕적 우월성을 얻기위한 지오베르티적 목적 내에서 결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2) 그람시의 저작에서 동구와 서구는 아래 표와 같이 대조적으로 분석되며 이를 두고 그람시는 '서구혁명의 이론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람시의 혁명이론은 발전한 선진국가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 그람시는 {수고}에서 유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동구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었고 시민사회는 아직 원시적이고 무정형적인 것이었지만,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국가가 동요할 때에는 당장에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국가는 단지 외곽에 둘러쳐진 외호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요새와 보루의 강력한 체계가 버티고 있었다."
그람시의 저작 속에서는 분명히 이러한 이항대립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한 메타포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가 발전한 선진자본주의, 또는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복잡한 시민사회가 성숙한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또 거꾸로 [남부문제에 대하여] 같은 저작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단절되어있는 남부와 부속도서 지방에도 어떻게 시민사회의 구조가 존재하며 이를 국민적-민중적 연합으로 지속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가에 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결국 '진지전'이라는 표현도 그람시가 혁명의 한 모멘트 못지않게 이중권력의 전 과정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사용한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3) 페리 앤더슨은 그람시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세가지 모델 사이에서 혼돈을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 최장집은 이를 단순한 모호성이나 이율배반으로 보기 보다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념 간의 역동적인 관계', 즉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한 형성과 발전과정에 따른 역사적 변화의 구도로 치환할 수 있다고 본다. 모델 1에서 정치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매개하는 독립된 정치지형으로서의 중요성을 갖는다. 임영일은 모델 2의 경우를 체제위기의 국면에서 국가가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시민단체와 노동조직을 직접적으로 관할(파괴 또는 관제화)하는 국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이 경우 정치사회 역시 형식적으로 존재하면서 국가의 관할 속에 놓일 뿐이다(후발자본주의의 파시즘체제나 제 3세계의 권위주의 또는 포퓰리즘 국가체제의 사례). 한편 모델 3은 시민사회의 계급관계가 정치사회에 온전히 투영됨으로써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와 구분되는 독자적 영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필요가 없게 되는, 그리고 국가역시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와의 분리 정립의 의미를 굳이 지니지 않게되는 (그람시의 '통합국가') 헤게모니 국가의 성립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국가소멸의 이념형적 국면의 가장 현실적인 이론적 모델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국가와 시민사회를 이원적으로 대립시킨 모델에만 주목하면서 이를 소시민적 시민운동주의로의 필연적 경도라고 염려하며 시민사회/민중사회라는 대당을 제시했던 김세균의 논의는 협소한 것이었다.

4) 그람시는 자본주의가 공고화하면서 전투의 모델도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이동했다고 이야기하지만, 1차대전 이후의 군사학에서는 오히려 기동전 또는 전격전(Blitz Krieg)이 압도적인 관심대상이다. 또 진지전만을 고집하는 것은 급속도로 표변하는 현대자본주의에 오히려 먹히는 꼴이 아닌가?
- 실제로 진지전은 오히려 1차대전까지만 효력을 발휘했던 전술이다. 기동없는 진지전이란 현대전에서는 포격과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무모한 싸움일뿐이다. 또 90년대 초반, '진지전'에 대한 강조는 많은 경우 개량적 합법주의적 실천의 변명처럼 되어버린 감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그람시의 맥락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가 줄곧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시민사회라는 참호 또는 보루의 견고함, 즉 현대 자본주의 상부구조의 복잡함이었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이라는 투쟁전술을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람시 자신도 "군사적 기술과 정치 사이의 비교는 에누리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페리 앤더슨이 진지하게 정리하고 있듯이, 권력쟁취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최대한의 공격속도와 기동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오히려 현대의 진지, 참호, 보루, 도로, 보급망, 신속하고 돌발적인 상황전개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돌리는 것이 옳겠다. 그 사고 속에는 정당, 노조, 언론, 향우회 조직, 인터넷까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람시를 탈근대 또는 포스트모던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던데?
- Renate Holub은 그의 책 {안토니오 그람시 - 맑스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라는 책에서 그람시의 지식인 및 지식 개념에서 '차이의 화용론(differential pragmatism)'을 추출하고자 했다. 하버마스의 '보편화용론'과 대비되는 차이의 철학, 자생성의 철학을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는 그람시의 지식과 문화 개념들이 페미니즘이나 소수인종의 담론연구에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스튜어트 홀의 견해와도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람시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지독한 계몽주의자였다. 그는 대중의 능력, 의식의 복잡성을 이해했지만 그것은 대중적 집합적 '이성'에 대한 신뢰와 결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근대' 또는 '탈근대'로 딱지붙이기를 시도하기보다는 애초에 '모더니티의 확장'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게 나을 것이다.

# 보충 : 한국에서의 그람시 수용에 대하여

1) 소개의 편중성 : {수고}에만 집중
2) 수용의 단편성 : 편의적이고 수사학적인 차용
3) 정세적 왜곡
4) 그람시 전유의 몇가지 차원

#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 관련 읽을거리
- 페리 앤더슨, {서구마르크스주의 연구}, 이론과 실천
- 데이빗 맥렐런, {마르크스주의 논쟁사}, 인간사랑
- 하비 케이,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 이론과실천
- 알렉스 캘리니코스, {현대철학의 두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갈무리
- 주세페 피오리, {그람시}, 두레
- W. L. 아담슨, {헤게모니와 혁명}, 학민사
- 임영일 편역, {국가, 계급, 헤게모니}, 풀빛.
- 칼 보그 외,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 갈무리
- 르네이트 홀럽, {그람시의 여백}, 이후

# 토론 주제 (제안)
- 맑스 이후 얼마나 많은 맑스주의가 있나?
- 무엇이 맑스주의를 맑스주의이게 하는가?
- 맑스주의, 맑스-레닌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고전적 맑스주의, 서구맑스주의를 구분하는 의미는?
- 맑스주의는 근대의 이론인가? cf. '현대의 이론'
- 그람시주의와 맑스주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과의 관계는?
- 맑스주의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cf. 퇴행적 발견법과 진보적 발견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실천적인 알튀세르 읽기를 위하여

서 영 표
국사 90
{민중정치학생연합} 교육국장

1. 글을 쓰기 전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자신을 평가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은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평가하는 것도 포함한다. 지금 알튀세르의 열풍을 평가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상태의 것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일은 항상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닐까?
이 글에서는 알튀세르의 이론자체를 문제삼지는 않겠다. 중심적인 논의주제는 알튀세르를 한국사회에 적용하면서 새로운 이론체계를 형성하려는 운동세력(특히 학생운동)들이 부딪혔던 현실의 벽은 무엇이었나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점더 확장시 켜서 외국의 이론을 수입하는데서 나타나는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필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이론풍토를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이 글은 학생운동가들의 학습커리 속에 깊숙히 침투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필자가 학생운동 전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필자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겠다.

2. 천박한 '알튀세르주의자'의 자기비판

"어떤 것을 학습해야할지 모르겠다." "책을 읽어도 나의 관점이 없이 읽게된다." 요즈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권위의 해체, 그 어떤 이론도 사상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학습을 한답시고 구름위를 떠다니고 있다.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막상 다가섰을 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무엇을 읽든 지적 호기심은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운동의 일치'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알튀세르'도 지금 우리곁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이론들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 중의 다수가 알튀세르를 통해 맑스를 읽으려고 한다. 즉 알튀세르는 우리곁을 단순히 지나쳐가는 이론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알튀세르'를 읽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또한 이문제는 단순히 알튀세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답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나 자신의 사상적 자기정정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맑스주의 위기'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운위되면서, 맑스주의의 사상적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면서 나는--우리 모두가 그랬다--나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보호막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우경화되어 버리는 것도, 맑스-레닌주의라고 씌여진 낡은 깃발만을 움켜쥐고 그것의 올바름만을 강변하는 것도 위기의 시대에 내 자신을 지탱해줄 수 있을 것같지가 않았다.
무언가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맑스주의자로서 자신을 재무장시키기 위해서 고민했다고 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사상적인 무기력함 속에서 자기자신을 겨우겨우 지탱해줄 자기 정당화의 수단을 찾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알뛰세르의 몇몇 저작에서 얻은 지식을 근거로 나름대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뭔가 손에 잡힌 것이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맑스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그 위기를 전면화 함으로써 교조주의에 의해서 억압되어 왔던 사상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가 무오류의 과학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맑스주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생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를 '위기론자'라고, 맑스를 제대로 학습하지도 않고 맑스주의의 난점과 공백을 떠벌이는 줏대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누구도 '맑스주의는 맑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현실설명능력과 그것에 대한 대안의 제시) 한계를 내어보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은 앞의 비판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는,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많은 사람들은 지탱해줄 아무런 지반 없이 위기의 전면화만을 외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을 시작했던 것이다. 현실은 우리에게 자기비판과 자기정정을 강요한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맑스주의 틀 내에서의 맑스주의의 재구성'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맑스주의 틀 내'라는 것은 이론적인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천활동에서의 맑스주의적인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생각은 위기돌파의 방향을 제시한답시고 맑스주의적인 정치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효과를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극단적으로 평가해보자. "'위기의 전면화', '맑스주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이 말이 가진 효과는 사람들이 더 이상 맑스주의를 실천활동의 지침으로 인정하지 않게 한
것이었다. 결과는 목적없는 정치활동을 만들어냈고 사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천에서도 구름 위를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활동'이 인구에 회자되었지만 기본적인 관점없는 새로움이라는 것은 부르조아에게 투항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맑스주의의 재구성'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버렸다. 맑스주의는 책상머리에서 이론가들에서 재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활동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실천활동으로서 의미를 상실한 맑스주의가 재구성되어지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하나 이론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맑스주의를 재구성하겠다는 목표 아래 많은 논자들의 글을 읽는다. 알튀세르, 그람시, 발리바르. 그런데 애초에 그들의 텍스트를 읽게 된 동기는 맑스주의에 긴장력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한 우회로의 설치였다. 하지만 이들의 텍스트를 통과하는 도중에 벽에 부딛히게 된다. 그들의 텍스트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어줍지 않은, 천박한 수준의 알튀세주의자, 그람시주의자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또다시 우회로를 설치할 것인가? 실제로 그러한 경우도 많다. 알튀세르를 이해하기 위해서 프랑스 현대철학을!! 아카데믹한 이론의 수렁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지어다!!

이제 위기의 시대에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수단은 어디에 있는가? 또 한번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3. 그러나 아직도 알튀세르?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전제는 맑스주의가 공백과 난점을 기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이론적 작업에 도그마를 깨고 사고를 확장하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맑스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부정적 효과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러한 부정적 효과를 확대시키고 우리를 벗어나기 힘든 궁지에 몰고 있는 것은, 부르조아에 의해 맑스주의에 대한 전면공세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 자신도 맑스주의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일 것이다. 이론 영역에서의 일보후퇴는 이보전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한 번의 후퇴를 불러올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 우리에게 강제한 자기비판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맑스주의의 재검토는 단순히 알튀세르를 쫓아서 위기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먼저 학습의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는 이론을 위한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활동의 지표를 마련하기 위해서 학습이 필요한 것이다.(이 말을 실용주의적이라고 오해하지는 않기를!) 그렇다면 이사람 저사람 텍스트를 옮아다니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만족하거나 사상이론적인 혼란을 핑계삼아 아예 학습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자세는 버려야한다. 그리고 맑스와 레닌을 비롯한 많은 사상가(실천가라고 말하고 싶다)들의 텍스트를 검토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원전을 그대로 암송하는 것은 아무 것에도 쓸데가 없다.
맑스와 레닌의 저작은 정치적이다. 그것이 경제학에 관한 것이든, 철학에 관한 것이든, 실제로 정치적인 저작이든 모두가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텍스트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그들이 처했던 구체적 상황과 그것에 개입하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이론이다. 알뛰세르가 제한된 이론이라고 맑스주의를 평가한 것은 맑스주의는 언제나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개입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발전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 정세의 개입을 위하여 때로는 구부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경직되기도 하면서, 그리고 매 시기마다 자신안에 존재하는 이론적인 제 난점을 전면화시키면서 정치적 개입은 진행된다. 동시에 난점들은 이 과정 속에서 극복되어진다.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자기비판의 시작은 알튀세르를 따라서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을 시작하고 만 자신이었는데, 그 비판의 끝에 서 있는 내 자신의 지반은 역시 알튀세르였던 것이다. 즉 현실 긴장력을 회복하고 그 속에서 맑스주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시도를 하고자 했지만 그것을 지금 당장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알튀세르-발리바르를 통하는 것이 가장 확실해보였던 것이다. 이제 문제는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정말 쓸데 없는 고민과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알튀세르(서구맑스주의)인가 아니면 맑스와 레닌인가? 이러한 혼란스러운(불필요한) 대립구도는 필자의 머릿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로 시작되었던 고민은 이제 나는 '알튀세르주의자'인가라는 자문과 그것을 정리해보려고 하는 필사적인 고민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주의와 나', 그리고 '현실과 나'가 아니라 '알튀세주의와 나'가 되어버렸다. 이제 막다른 골목인가?

4. 알튀세르가 남긴 것은?

이번에는 결론부터 내린다음에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보자. '알튀세르를 읽고 알튀세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알튀세르주의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알튀세르를 처음 대했을 때부터 밑에 깔려 있었던 생각이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을법한 말이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강조하는가?
알튀세르를 읽는 것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려고 했지만 우리의 관념속에는 끊임없이 맑스주의는 완결된 체계를 가져야만한다는 강박관념이 스며들어 있다. 맑스와 레닌의 사상체계를 신봉했던 우리들로서는 그것은 '완결된 체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완결된 체계를 원하게 된다. 그람시, 알튀세르는 이러한 허구적인 관념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곳에서 '그람시주의', '알튀세르주의'는 자신의 존립기반을 가진다. 그람시와 알튀세르는 원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마치 맑스는 스스로 '맑스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했지만 맑스주의운동의 역사는 맑스주의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졌고 결국 맑스주의를 타락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람시 열풍, 특히 알튀세르의 열풍이 우리에게 시시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론 영역에서 극복해야할 지점을 명확히 해주었다는 것이다. 정리를 해보자.
알튀세르주의자로 지칭되는 사람들도, 그리고 알튀세르를 거부하고 정통의 입장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도 같은 지반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맑스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완결된 체계'로서의 알튀세주의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알튀세르의 이론이 완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완결된 체계이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이론체계! 단 하나라도 설명하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 없다!! 모두가 원하고 찾아헤매는 것은 이것이다. 결국 맑스주의는 악무한적인 사변적 논쟁으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비극일까? 아니면 희극일까? 알튀세르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테제는 '제한된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그말을 옮기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맑스주의,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는 전혀 제한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서 알튀세르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알튀세르는 위기를 완벽하게 설명해내지 못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맑스를, 그리고 알튀세르를 희극으로 때로는 비극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여기서 다음의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어떻게 이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원칙적인 수준에서 대답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렵지 않다.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개방적인 태도는 자신감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다원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면!) 자신감이 있다면 다른 모든 견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론과 %%론의 대립, ##주의와 **주의의 대립이라는 관념을 버려야할 것이다.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체계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사상투쟁이라는 단어는 이러할 때에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단 이것이 상대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관점으로 비쳐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 이점은 현실운동에 의해서 보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타의 견해들은 단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운동의 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무슨무슨 '주의'라고 매도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운동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즉 다양한 운동의 영역과 그 영역을 운동의 전부로 생각하는 운동조류는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맑스주의는 자신의 생명력을 되찾고 대중운동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의 목표는 완결된 사상체계의 구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시기 구체적인 현실을 얼마만큼 정확히 분석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가가 관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지 그뿐이다. 알튀세르를 대안의 전부로 생각할 때 또 다른 늪 속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5. 우리에게 남은 것과 해야할 것

대단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제 정리를 해야할 것이다. 정리를 하면서 알튀세르의 열풍이 남긴 몇가지 교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번째로 현재의 이론풍토 속에서 '이론'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람시, 알튀세르를 읽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수입되는 과정이 대단히 실용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미봉책이라고 할까? 소련이 붕괴하고 맑스주의위기가 공공연히 운위되자 벌써 20년전에 맑스주의의 위기를 주장했던 알튀세르의 상품가치가 높아졌다. 합법정치공간이 넓어지고 억압보다는 세련된 이데올로기 공세로 통치전술이 바뀌자 그람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봉책으로 받아들였으니 얼마되지 않아 또 다른 미봉책을 찾을 수밖에!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는 이론풍토는 계속된 단절만을 초래할 뿐 이론의 발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두번째는 알튀세르의 맑스주의가 가져다준 기존관념에 대한 충격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대로 다분히 실용주의적인 이론의 수입이었고 한때 유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는 '스탈린주의적 맑스주의'에 찌들어있던 우리들의 관념에 유효한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를 이론적으로 평가하고 맑스주의 재구성 프로젝트에 흡수하는 것(알튀세르주의자가 아니라 맑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알튀세르를 읽는 것)은 새로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이 새로운 과정에 대해서 한마디만 더하겠다. 알튀세르의 작업은 화석화된 맑스주의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로부터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새롭게 재무장해
나가는 노동자 대중의 무기로서의 맑스주의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만 않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위기는 맑스주의가 그 내부에 가지고 있었던 이론적 난점들과 더불어 외부에서의 부르조아적 요소의 침투, 그리고 그것들의 혼합으로 인한 제반의 복잡한 원인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복원시킨다는 것이 맑스주의 내부에서 부르조아적인 요소를 가려 뽑아내는 것으로, 그리고 혁명적인 부분만을 남기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부르조아적인 요소일지라도) 제반의 문제제기를 흡수하면서 지속적인 자기 전화의 계획을 내요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는 이론 내적인 작업일 수가 없다. 이론 내적인 작업으로 한정할 경우 맑스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의 일람표를 만드는 작업 이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자신도 끊임없이 이러한 이론주의적 편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작업을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철학자로서의 개입'이라고 강조하거나 '철학은 최종심급에서 이론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의 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이러한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알튀세르라고 하는 철학자의 작업이 가지고 있었던 이론주의적 편향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튀세르를 읽고 인용하는 사람들에게서 확대재생산 된다.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태도가 '맑스주의의 위기'만을 되뇌이는 것을 가리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들리는 것은 맑스주의의 위기를 외치는 소리일 뿐 현실의 운동, 노동자 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 속에서 문제를 풀고자하는 노력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이론편향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알튀세르가 제기하고 있는 맑스주의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현실운동 속에서 풀 수 있는 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의 목표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맑스주의를 전화시키는 것이었다면 우리의 이론적 작업의 목표는 알튀세르(알튀세르'만'은 아니다)를 통해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일 것이다. 맑스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었고 알튀세르도 '알튀세르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텍스트를 읽는 우리들이 그들을 맑스주의자, 알튀세르주의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맑스, 엥겔스, 레닌, 그람시, 알튀세르, 그밖에 무수한 사상가들의 이론을 맑스주의, 레닌주의, 그람씨주의, 그리고 알튀세르주의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 맑스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통스러웠던 수 많은 논쟁을 받아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에 앞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 정세에 개입한다. 부르조아의 정치적 개혁이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로 인정받고 있고 진보진영은 사상적으로, 실천적으로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여기에 우리는 정치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맑스-레닌주의라는 무기는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그 무기는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조금씩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주의 자체의 불완전함을 두려워하는 자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부르조아에게 투항을 하는 것과 영원한 교조주의자로 남는 것뿐이다. 

 

                                                   학 / 회 / 평 / 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