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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읽기와 이론학습

김 현 우
사회 90, 본지 편집위원


1. 들어가며

남한에 알튀세르가 본격적으로 소개된지도 대략 3년여가 되었다. 언제부터가 '본격적으로'인가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간간이 네오맑스주의나 구조주의의 일부로 주변적으로 소개된 것들과 윤소영의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88년)를 위시한 연구를 제외한다면, {맑스를 위하여}(백의)의 출간 이후 그의 저작의 잇달은 출간과 논의가 시작된 90년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알튀세르 수입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모로 무척이나 기묘하고도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의 정치역정과 인생역정이 그러했고, 프랑스에서의 오랜 침묵과 금기(그의 죽음에 즈음한 회고작업을 제외한다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에 상륙한--더군다나 남한 계투의 패배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때를 같이한--이 땅의 분위기 또한 그러했다.
우리도 잘 아는 어떤 교수는 "알튀세르가 스타킹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강의 중에 그의 이론을 소개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지금의 소위 '알튀세르 열풍'을 생각한다면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읽어보면 쓴웃음마저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은 88년말에 출판된 책의 역자서문 중 일부인데, 그 당시의 지적 분위기가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역자의 오류나 무지를 지적하고자 하는 바도 아니며, 역자 또한 최근의 개정판에서는 관련 구절을 대폭 수정하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이 책이 알튀세르의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구조주의 일반이 갖는 인식론적 문제점을 이 책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변증법적 인식력을 가진 독자라면 이러한 점들을 쉽게 간파하리라. 문제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계철학사Ⅱ,Ⅲ}(녹두, 1986)이나 {철학의 기초이론}(두레, 1987), {사적유물론}(새길, 1988)을 참조하면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 읽기}가 출간되었을 때, 후학들은 낯선 이름과 함께 잘 이해되지도 않는 생소한 여러 개념들을 진지하게 따라나갔다. 테제화된 변증법적 유물론과 붕괴론적 사구체론에 '자생적으로' 회의를 느끼고 있던 우리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바랬고, 알튀세르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에 관한 저작이나 몇가지 해설서의 출간은 자료에 목말라하던 이들에게는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이것은 이 땅에 이른바 '알튀세르 르네상스'를 낳았다. 이론투쟁의 침체와 사회과학 서적의 판매부진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의 저작과 해설서들은 예외를 기록했으며, 단기간에 그렇게 집중적인 소개와 연구가 이루어진 이론가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석박사 논문도 그에 관한 내용에 할애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긍정적으로만, 건강하게만 이루어진 과정이었는지, 그리고 실속있는 결과만을 낳았는지는 의심해 볼 일이다. 알튀세르를 다시 읽으며 '맑스주의의 새로운 전화'를 이루자는 주장은 너무 이론을 신비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알튀세리안들의 논의들이 노동자계급의 해방투쟁에 별 도움을 못주는 것은 아닌지는 의심해 볼 일이다. 중층결정과 ISA라는 개념이 마치 문화와 이데올로기 연구에 운동의 사활이 걸린 듯한 문화열풍에 도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면에 토대분석의 임무는 경제결정론 쯤으로 전락되고 있지 않은지는 의심해 볼 일이다. 혹은 신식국독자론자들이 혹은 포스트론자들이 알튀세르를 자기 구미에 맞게 추출 윤색하여 결과적으로 실천가나 후학들이 알튀세르를 멀리하거나 피상적으로 지나치게 하고마는 역편향을 낳지는 않았는지는 의심해 볼 일이다.
이제 알튀세르의 '열풍'도 어느정도 사그라드는 것 같다. 소개와 논의의 임계치를 어느정도 충족시키기도 했지만 다른 다양한 이론적 관심들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이른바 알튀세르 열풍에 대한 정리와 평가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열풍이 퇴조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알튀세르 열풍이 한때의 유행일 수는 있어도 한때의 해프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알튀세르에 대한 관심은 맑스-레닌이나 그람시에 대한 관심 만큼이나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이 알튀세르 이론에 대한 총괄적이고 구체적인 소개나 평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작업이라면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전문적 이론가들의 몫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학부에서의 이론학습, 특히 학회에서의 학습에서 알튀세르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이야기하려 한다. 즉 알튀세르의 이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없는 것', 그리고 학습에 있어서의 몇가지 난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등에 대한 약간의 관점을 제안해 보려는 것이다.

2. 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쓰는 이마다 다른 함의를 가지지만 어쨌든 표현 하나는 공인되는 이른바 '맑스주의의 위기'의 시대에 있어, 모두들 대안적 학습내용과 방식을 찾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노릇일런지 모른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모색의 와중에 알튀세르라는 인물은 '죽은' 비유로 치자면 '뜨거운 감자' 처지에 놓여있는 듯이 보인다. 몇몇은 아주 적극적으로--그것도 서로 다른 이유에서--알튀세르를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몇몇은 또한 적극적으로--또한 몇가지 이유에서--알튀세르는 안보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맑스주의에 대한 입장이 알튀세르에 대한 입장으로 드러나고 판단되어 지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알튀세르가 원한 것이었을까? '알튀세르는 피해가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대안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대안은 원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저작까지를 원전--맑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만이 원전인가? 혹은 스탈린은? 그람시는? 마오, 트로츠키는?--으로 포함시킬 것인가도 문제려니와, 원전의 직독해가 '진리'나 '과학'을 보증해 주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맑스주의 전통을 하나의 교리체제로서 텍스트의 선집과 동일시 한다는 것은 최악의 교조주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동일화는 텍스트의 선정을 지배하는 원리가 존재함을 전제로 할 것이지만, 이런 원리들은 결코 자명하지 않을 뿐더러 그 선정은 자의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그리고 더 우세하다고 생각되는 입장은 '알튀세르는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즉 그냥 피해갈 수 없는 정도인지, 아니면 정면으로 부딪히고 적극 흡수해야할 대상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심지어 '알-바주의'라는 냉소적 표현까지도 등장하는데, "알튀세르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재구성하자는 것"을 시도하는 이들은 이 정반대편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이들도 몇가지 해명할 점을 남긴다고 생각되는데, 왜 하필이면 다른 이론가가 아닌 '알튀세르를 통해서'인지, 그리고 '어떤 알튀세르'--전기 또는 후기 알튀세르? 아니면 사실은 후기 발리바르?--를 '어떻게' 통해서 인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시도가 문제제기성인지, 아니면 맑스주의의 전화와 관련한 확실한 경과점으로서인지에 대한 명확한 응답이 그것이다. 물론 현하의 학습풍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이는 분명 책임질 수 없는 '정치적 개입'이 될 터이기에 이쯤에서 그치도록 하자.
그러나 최근에 접하게 된 어떤 커리큘럼 자료집에서는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원론, 국가론까지 알튀세르의 후기저작 일색으로 채워넣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우리의 정치학 이해에 있어 알튀세르의 {당내에서 더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들}이 맑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이나 레닌의 정치학 저작들을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체적인 입장이 과연 견실한 혁명가가 수용할만한 것인지에 대한 지적도 사족으로 치부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알튀세르는 피해갈 수 없다'의 편에 서있는 이들에게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은, 스스로 경계하면서도 알튀세르에 대해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표상을 가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맑스'라는 관념이 낳는 편향을 극복하고자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로 우회를 감행한 것이 역설적인 효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3. 알튀세르 독해에 있어 고려할 점들

(1)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알튀세르 부수기

이제부터의 논의는 G.엘리어트의 {이론의 우회}와 A.캘리니코스의 {맑스주의의 미래는 있는가}의 입장을 기반으로 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 두권이 지금까지 소개된 알튀세르 이론의 분석 비판서 중 가장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론의 우회}는 엘리어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스스로 "'反-反알튀세르주의'라고 필자가 특징적으로 부르려는 그런 입장"에 서서, 맑스주의에 대한 알튀세르 이론의 잠정적인 대차대조표 작성을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큰 맘 먹고 거금(만원)을 들여 사볼 만한 책이며, 차분히 읽어 보면 이 글을 읽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으리라 확신한다. 캘리니코스의 책은 E.P.톰슨에 어느정도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즉 알튀세르를 노동계급의 실천과는 전혀 무관한 스콜라적인 인물로 매도하는 톰슨의 입장에는 반대하는 그런 책이다. {맑스주의의 미래는 있는가}라는 책에 "알튀세르"라는 글자가 부제로라도 들어갔더라면 훨씬 많이 팔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문제는 번역이 정말 엉망이라는 것인데 For Marx를 {마르크스론}으로 번역한 것은 그 중 애교인 편이다. 결정적인 것은 후주가 번역이 안된 채 영문 그대로 실려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를 피해갈 수 없다는 데에는 일단 동의하도록 하자. 그 이유는 무엇인가?
캘리니코스는 알튀세르의 영향은 스웨덴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전 유럽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에게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분명코 지난 15년간의 "맑스로 돌아가자"는 운동 속에서 역사유물론의 기본명제를 재정립하고자 시도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분명 알튀세르 개인에게 한정시킬 수 있는 이유가 아닐 것이다. 즉 그로부터 비롯되거나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은 많은 흐름들이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페리 앤더슨도 83년에 "알튀세르주의적 조류는 아마도 가장 강력하게 존속해온" 학파라고 평가한 바 있다. 엘리어트의 글에서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평가한 부분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알튀세르의 맑스 재독해는, 비록 그것이 아무리 원문의 맥락에 저의를 개입시킨 독해였으며 이론적으로 논쟁적인 독해였을지라도, {자본론}의 정당한 탁월성을 복구하면서,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의 초기저작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에서 벗어나서 후기저작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시기구분이 도발적 행위였든 아니면 하나의 자극이었든 간에,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역사유물론의 발생 및 발전에 관해 실질적으로 능가할 수 없는 수준의 논쟁과 연구를 유발하였던 것이다.
둘째, 알튀세르의 합리주의적 인식론과 이와 결합된 독해 및 비판양식--특히 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초기해석--은 과학적 이론의 인식상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주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시기적절하게도 세로운 세대의 맑스주의자들에게 맑스의 포부가 새로운 과학을 수립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일깨우면서, 스탈린주의적 실용주의에게 과학을 양도하지 않을 수 있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반경험주의적 인식론이 취한 최종적인 형태가 애당초에는 회피하려고 했던 관념론과 상대주의와 제휴하기 시작하였을지라도, 과학철학에 관한 맑스주의적 성찰에서 이룩된 결정적인 진보를 대표하였다.
세째, 프레드릭 제임슨이 사회구성체의 개념화에서 "알튀세르적 혁명"이라고 간주한 것으로, 알튀세르가 그 발견의 영예를 맑스에게로 돌린 "대륙", 즉 역사라는 대륙의 몇몇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도록 아주 다양한 분야의 맑스주의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저작, 인류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학이론, 담론이론, 법이론에 이르기 까지. 쇠틀러, 플란차스, 라클라우, 발리바르, 아글리에타, 리피에츠, 카스텔, 이글턴, 폐쇠 등은 우리도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이다. 부분적으로 알튀세르주의적인 빙산은 미학, 문화연구, 문학비평, 대중매체 및 영화연구 등에도 뻗쳐있는 것이다.
네째, 알튀세르는 스탈린주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며, 알튀세르주의가 스탈린주의의 결과일지라도, 스탈린주의의 연속은 아니다. 즉 맑스주의 이론의 탈스탈린화에 알튀세르가 기여하는 지점에 대한 평가이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우리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학습에 알튀세르라는 인물이 가로 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의 '수입'의 사후적 정당성은 후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알튀세르 학습은 어렵다. 그리고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 어려움의 원인은 몇가지가 있겠으나, 알튀세르 이론의 계기의 복합성, 알튀세르 자신의 입장변경(전기/후기), 개입수단의 복합성(알튀세르 특유의 폭넓은 지성사 전유)에 대한 이해 곤란, 그리고 사소하게는 이론 수입 초기에 불가피한 수많은 오역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험성은 알튀세르 맑스주의의 몇가지 '나쁜 습관'들에 주로 기인하는 것인데, 엘리어트는 또한 이를 네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알튀세르 스스로 그 자체의 출현에 앞선 시기는 '이론의 백지상태'였다고 암시한 데서, 그리고 (맑스, 레닌, 마오를 제외한) 맑스주의의 역사는 알튀세르 이전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주의적-역사주의자로서 갇혀있던 어둠이었다고 묘사한데서 드러나듯이 그의 지적 배타성이 문제가 된다. 이 지적 오만(?)으로 주변화된 것은 바로 그였다.
둘째, 알튀세르주의의 특징은 맑스주의의 권능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이 권능에 대해 근본적인 신중함을 전혀 갖지 않았다. 이 권능에 대한 단정 속에는 인과응보의 씨앗이 들어있었다.
세째, 비록 알튀세르주의가 '교수들을 위한 맑스주의'라는 비난은 잘못이지만, 실제로 알튀세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재구성에 따라 촉진될 것으로 기대된 프랑스 정세의 구체적인 분석을 결코 수행하지 않는 직무태만을 저질렀다.
네째, 알튀세르가 프랑스 맑스주의의 탈스탈린화에 엄청나게 기여했을지라도, 그 '마오주의화'는 이론적으로 퇴보적이며 정치적으로 위험한 혼란일 수 있다. 마오주의 중국에 대한 환상과 뒤이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는 환멸이 그것이다.

그의 방법론을 철학적으로 문제삼는 이들도 많다. 알튀세르의 저서들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이후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러나 바로 이러한 비교야말로 알튀세르의 저서들이 갖는 한계성과 위험성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루카치의 연구가 신칸트주의 철학과 베버의 사회학에서 도출한 범주들을 가지고 맑스의 기본이론들을 재구성하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알튀세르의 연구도 역시 그의 이론체계의 몇몇 기본적 개념들 때문에 손상받고 있다는 것이다. 허나 모든 새로운--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치있는--이론적 시도는 그만큼의 위험성 또한 감수하기 마련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삭감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몇가지 '일반화된' 비난을 환기시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캘리니코스의 경우에는 S.홀(Stuart Hall)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을 4가지 논(isms) 즉, 경험론(empricism), 다원론(pluralism), 기능론(functionalism), 관념론(idealism)으로 요약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상의 문제들은 알튀세르 학습에 있어서의 고려대상, 혹은 검증대상으로 삼으면 되는 것들이다. 이제 이보다 더 어렵고도 핵심적인 문제가 있으니 우리가 알튀세르의 이론으로부터 실제로 얻고자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60년대의 기세등등한 이론적 선언과 77년 이후의 심각하기 이를데 없는 자기부정의 대립 때문이다. 전자와 후자는 동전의 양면, 또는 인과응보로 설명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튀세르에게서 무언가를 섭취한다고 했을때 어느 쪽에 기반을 둘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엘리어트는 프랑스공산당과 마오주의 중국이라는 양대 지평이 알튀세르를 언제나 속박하였다는 것, 그리고 1965년 이후의 그의 거의 모든 저작이 궁극적으로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 읽기}의 각주에 불과하였다는 것은 주목되어온 사실들이라고 평가한다. 1977년에 스스로 선언했던 '맑스주의의 위기'의 와중에서, 알튀세르는 또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적 전통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졌으며, 그것의 입증이 알튀세르의 작업의 목적이었던, 그리고 알튀세르주의의 제 1조였던 '인식론적 단절'을 사실상 청산함으로써
알튀세르주의를 포기하였다. 비록 여러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때늦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더이상 지속되어선 안될 것들]이 공산당의 전사 알튀세르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맑스주의]는 부지불식간에 맑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의 부고장을 썼던 셈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 역사유물론은 출발부터 결함이 있었고, 맑스 이래로 발전되지 못했고, 스탈린 치하에서 왜곡되었고, 비극적 역사에 의해 위신이 떨어졌으며, 관념론으로 가득차 버렸다. 맑스주의는 애초에 공백과 난점을, 즉 잉여가치의 회계적 서술 및 변증법의 곤란, 국가론 정치이론의 부재 등을 안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새로운 전화'가 '대중운동'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자는 묘한 낙관론과 이어지는 침묵(좌절?)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기와 후기의 알튀세르는 같은 문제설정의 양면이기는 하되--물론 양 쪽에는 마오주의에 대한 환상과 좌절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개입한다--후기에는 알튀세르주의를 특징짓는 요소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이 이상으로 알튀세르 학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의 생각은 초기 저작에 기반할 것을 권유하고 싶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학부 학회에서의 '알튀세르 학습'이라면, 그리고 앞에서 엘리어트가 알튀세르의 기여로 정당하게 평가했던 측면을 섭취하기 위한 학습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알튀세르 학습을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사전이해로서 필요한 것들을 짚어보았다고 한다면, 뒤늦기는 하지만 "우리가 알튀세르를 학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 본다. 그의 기여를 다시 단순화하자면 결국은 문제를 던지는 방식, 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몇가지 개념과 몇가지 영역에 걸친 불완전한 이론들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에 대한 학습을 단순화하자면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암송하거나, 습득하고 흉내내는, 그리고 동시에 상대화하거나 동일시하는 과정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튀세르를 읽으면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는 이론이 주장된 맥락의 이해일 것이고, 또 하나는 개념의 이해일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개념의 이해'는 특히나 중요한데, 그에게 있어 '문제틀'이란 "개념들의 체계적 조합"이기 때문이다.

(2) 병 속의 메시지들--불완전한 이론들

알튀세르는 저술이란, 병 속에 메시지를 담아 망망대해로 던지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 읽기}의 형태로 전파시켰던 메시지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 것인가가 이제부터의 문제이다. 그의 불완전한 이론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도 그 메시지를 잡으려면 망망대해로 나아가야 하는데, 우회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이론적 메조키즘은 권장되어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몇가지 이론영역에 관하여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조악한 코멘트 정도이다.

1) 철학-과학철학

캘리니코스는 알튀세르가 혁명적 실천의 문제를 실천적, 정치적으로 회피함으로써 그의 이론적 논의에 끼친 효과는 심지어 그의 강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다소 과격하게 이야기하는데, 왜냐하면 알튀세르의 긍정적 업적이 놓여 있는 곳은 바로 정치적 실천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영역이랄 수 있는 변증법의 구조, 과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의 제2의 정의는 이론적 스탈린주의의 붕괴에 기여하거나 맑스주의 이론의 탈스탈린화를 도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적대물과 동일한 스펙트럼 상의 반대편 끝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위상에 대한 후기입장은 '철학의 발전'이라는 관념, 또는 철학의 체계화와 불완전성 간의 모순 긴장 관계를 무시하게 하는데, 득보다 실이 훨씬 큰 듯 하다. 어쨌든 알튀세르의 기여는 가장 주요하게는 철학-과학철학의 영역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테드 벤튼, 알렉스 캘리니코스, 앤드류 콜리에, 특히 로이 바스카(R.Bhaska) 등의 중요한 철학적, 과학철학적 저작들은 모두 알튀세르의 시도에 제각기 다른 정도로 빚지고 있으며, 그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알튀세르에 심취하던 국내 이론가들 중 일부가 과학철학에 몰두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 아닐런지.

2) 사회구성체론

알튀세르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 등의 표현을 써가며 역사유물론이 '역사철학'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제한된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가 역사유물론이 과학이 되려고 열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구성체론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두가지만 소개하자.
첫째, '중첩결정' 개념과 관련하여: '중첩결정' 개념이 오히려 스탈린주의를 구명하고 있다는 지적. 즉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을 입증함으로써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 경제기초와 양립할 수 있었는지를 해명한다는 것이다. 샤를 베틀레임의 대작, {소련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 in the USSR)도 비슷한 혐의가 있는데, 베틀레임과 알튀세르의 이론은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을 경제성장 및 기술발전과 동일시했고(경제주의), 따라서 계급투쟁의 핵심적 역할을 무시했다(인간주의)'는 것은, 금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정인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변질 과정을 단순한 하나의 지적인 역사로 환원해 버림으로써 오직 상부구조에서의 일탈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컨대 '소련에서도 문화혁명(계급투쟁)이 일어났다면'과 같은 가정은 토대분석의 의의를 간과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둘째, '생산관계 우위론'과 관련하여: 역사유물론의 기초는 사회구성체들은 그들의 지배적인 생산관계에 의해 설명된다는 명제에 있다. 이것이 생산관계의 '설명상 우위성' 명제이다. '전체 사회구조의 내면적 비밀을 드러내 주는 것'은 국가, 의식형태들 또는 생산력 발전단계와 같은 것이 아니라, 자연변형의 '물질적' 과정을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들--직접적 생산자들에 대한 생산조건 소유자들의 직접적 관계--의 성격인 것이다.

3) 이데올로기론

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기여는 걸출하고도 어려운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부터 비롯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론은 정치전략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지배이데올로기 분석의 기능적 도구에 머무는 것 같다.
이 분석방법은 노동계급과 그 동맹세력이 '우선' 이 ISA를 장악하면 자본주의 국가기구와 아무런 폭력적 대결을 하지 않고서도 정치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정치전력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손쉽게 활용될 수 있다. 심지어 캘리니코스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가 프랑스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원칙을 포기한 데 대해 치밀하고도 논리정연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 자신은 부르조아 국가기구를 분쇄해야 한다는 맑스 및 레닌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개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4) 정치학

알튀세르는 공산당의 이론적 권위에만 도전했을 뿐 당의 정치적 권위에는 도전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학은 이상할 정도로 비정치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즉각적으로 얻어올 수 있는 정치학이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맑스주의 위기에 관한 후기의 몇가지 저술들이 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정치학'을 대체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3) 병 속의 메시지들--개념들

{맑스를 위하여}의 영어판에서 Ben Brewster는 친절하게도 Glossary(용어해설)에 30여개에 달하는 알튀세르의 개념들을 아주 잘 정리해 놓고 있는데, 이 또한 중요한 병 속의 메시지일 것이다. 정식으로 말하거니와 그 용어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알튀세르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른 학문분과에서 빌어온, 그리고 알튀세르의 맥락으로 특수하게 가공되어 사용되는 개념들이 우리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그러나 대강의 이해는 용어 유행만을 낳을 뿐이다.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은, '이론적 실천', '모순들의 응축, 대체, 융합','문제틀', '불균등 발전', '인식론적 단절', '일반성Ⅰ,Ⅱ,Ⅲ', '중층결정', '지배내 구조', '철학', '독해(reading)', '휴머니즘' 정도라고 생각된다. '문제틀'(problematic)개념은 너무 넓은 뜻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는데, 쿤의 '패러다임'(paradigm), 푸코의 '인식소'(epistemes) 등과 비교해 보면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층결정'개념은 국내에 대략 4가지의 번역어가 나와있는데(중층결정, 중첩결정, 중복결정, 과잉결정) 각 번역어의 장단점이 있지만, 여러 심급/층위가 여러 차례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중첩결정'이 가장 나은 번역어인 듯하다.
'심급' 개념은 법률학적 개념이자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빌어온 개념이기도 한데, 알튀세르의 심급은 대단히 유동적이기 때문에 각 심급의 일반이론 수립을 어렵게 한다. 심급의 위계성이라는 문제는 '자유와 필연'이라는 전통적 문제의 몫이 되고 마는 것이다.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도 논란이 많은데, 축어적 해석 보다는 개념이 등장한 정치적 맥락과 효과를 전제한 후에 개념의 정당성을 논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때로는 말장난 같은 논구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알튀세르의 많은 개념이 일반적인 '추상명사'화 되어 많이들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튀세르도 말했듯 "단어에 대한 투쟁은 철학적 투쟁의 일 부분"이기 때문이다.

4. 발리바르 읽기

이 글에서 발리바르를 깊게 다룰 수는 없다. 국내에서는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쌍으로 읽히고 있지만 최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후기 발리바르이며, 앞서서 알튀세르의 초기저작들에 관심을 집중할 것을 제안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리바르가 일급 이론가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스스로 알튀세르의 "가장 말잘듣는 제자"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더라도 발리바르가 알튀세르 학파의 적자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의 역사유물론 연구 또한, 알튀세르 학습이 포스트구조주의로 귀결되지 않는 유일한 발전전망으로 공유되고 있기에 약간의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발리바르는 {자본론 읽기}의 3부부터 이름을 내밀고 있지만 {역사유물론 연구}나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경제학 비판},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역사유물론의 전화} 등의 책으로 소개되고 있다. 발리바르가 비판적 정정을 위해 기본적인 관점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이 가지는 장점은, 무엇보다도 (후기)맑스이론을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 '정치/경제'라고 하는 개념쌍에서 출발하는 (전기) 맑스의 소외론적, 인간학적 문제설정의 지배이데올로기 효과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완전하게나마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의하면, 맑스의 이론 자체는 전기와 후기 간의 불완전한 인식론적 단절로 인해, 후기의 문제설정에 의해 제기된 다양한 과학적 질문들, 즉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 정치, (혁명)당, 계급투쟁 등이 초기의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의 효과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부단히 환원론적, 목적론적 해결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단절의 효과는 맑스 자신의 저작들 곳곳에서 이론적, 실천적 모순, 불일치, 결핍으로 이어진다.
결국 발리바르는 국가/시민사회의 이분법이 경제 이데올로기--사적 영역으로서의 경제의 자생적 조절이라는 관념--의 효과라고 보면서, 무엇보다도 국가/시민사회의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만 맑스에게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은 맑스 자신의 모순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장치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생산과정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은 착취관계로서의 자본-노동관계는 그 자체가 경제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는 결코 부르주아적 공공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이제 노동의 정치, 생산의 정치, 나아가 프롤레타리아의 대중정치를 사고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당장 의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스탈린은 국가를 사회화하려 했고, 그람시는 사회를 국가화하려 했다는 비유는 타당한가? 소비에트라는 권력형태가 자본주의 사회에 특징적인 경제와 정치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경향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인가? 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구체적인 방식과 절차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등등.
발리바르의 문제제기들은 아직 평가되기에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전화'라는 한편으로는 개방적이고 솔직한 구상이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다른 식의 문제설정들을 비근본적이고 몰가치한 것으로 폄하하는 폐쇄성으로 드러나고 있지않나 하는 느낌이다. {인종, 민족, 계급}을 통해 발리바르와 공동작업을 한 월러스타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 또한 의아한 일이다. '진리의 담지자'라는 위험한 표상은 발리바르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5. 루카치가 루카치이듯, 알튀세르도 알튀세르일 뿐

애초에 글이 의도했던 바는 알튀세르 수용하면서 흔히 나타나는 세가지 모습들--거부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 사용되는 유행어만 양산하거나, 실천의 모든 해결책을 알튀세르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비판하고자 함이었다. 그 의도에는 어느정도 충실하려 했으나, 정작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이 글은 교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문'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정운영의 [알튀세르를 위한 추도사]나 박형준의 [서구맑스주의, '위기의 역사'와 '역사의 위기'], 또는 정태석, 하주영의 논문 정도를 보면 좋을 것이다. 전기/후기 입장의 차이가 쉽게 정리된 글은 정태석의 [맑스주의 위기와 알튀세르], 알튀세르 이론의 의의에 관한 국내논쟁으로는 {사회평론} 92년 8월호 등등. 그러나 이러한 소개서나 해설서를 장황하게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맑스 레닌에 대한 우회에, 알튀세르에 대한 우회까지 겹쳐서는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 범위와 주장에서 압도적인, 이 지적인 묘기"는 역사유물론의 발전에 분명히 직접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맑스주의 문화 전체를 위해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그의(그리고 그만의) 저작, 구절, 테제 들에서 직접 실천적 함의를 도출하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그의 저작은 계속 읽혀야 한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우리가 맑스의, 레닌의, 루카치의, 그람시의, 트로츠키의 저작을 읽는 만큼(만) 읽혀야 한다. 역으로, 우리는 알튀세르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만큼 '다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도 말로만의 인정이 아닌 실제 '학습'으로 말이다. 말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그 기준으로 말이다. 더구나 알튀세르 이론에 대한 평가와 학습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의 지난한 투쟁 만큼이나 그리고 이 땅의 계급투쟁의 미래 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튀세르로부터 배워야할 정신은 무엇보다도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 읽기"라는 제목의 두 슬로건이라는 것, 그리고 {자본론}읽기를 {자본론 읽기}로 대체해선 안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동감이 가는 대목인 것이다. 


                                                   학 / 회 / 평 / 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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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된 분석, 종결될 수 없는 분석*

G.엘리어트
김 수 정 옮김
사회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 [역자주] 이 글은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와 얀 물리에-부탕의 알튀세르 전기 제1권을 대상으로 한 엘리어트의 평론이다(Gregory.Elliott, "Analysis terminated, analysis interminable", Economy and Society, vol.22 no.2, 1993 May). 최근 출판된 알튀세르의 자서전과 곧 출판예정인 물리에-부탕의 알튀세르 전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조언해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출판된 루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사망 이전 이미 지적 장으로부터 갑작스레 사라졌던, 이로써 지적 전성기를 이양하는 것처럼 보였던 한 맑스주의 철학자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고백'은 그의 삶과 저작의 최후진술로서 수용되고 있으며, 어느 저작보다도 모호한 그 텍스트는 투명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자서전'과 동시에 출간된 전기 제1권은 알튀세르 자신의 '난폭한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징후적 독해를 가능케 해주는데, 그 책은 알튀세르가 '선행한 미래'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재기술했던 정도를 지적해주고 있다. 알튀세르적 공산주의에 공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알튀세르의 '맑스로 가는 길'에 대해 새로운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훌륭히 해명해주고 있다.
그 자료는 알튀세르의 공산주의 기획에 대해서는 논하고 있지 않지만, 알튀세르적 맑스주의에 포함된 동시대성/비동시대성의 복합을 강조하고 있다.

일단 모든 것이 말해진 후에도, 모든 것들은 여전히 말해져야 할 것들로 남아있다...모든 것들은 여전히 말해야 할 것들로 남아있다. 모든 것들은 항상 말해져야 할 것들인 채 남아있다. (앙드레 고르, {반역자})

루이 알튀세르의 장례식에서 낭송된 한 텍스트에서,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는 수많은 삶들...수많은 개인적, 역사적, 철학적, 정치적 모험을 거쳐갔다. 찬란하고 도발적인 그의 사고, 그의 살아가고 말하고, 가르치는 방식의 위력에 의해 수많은 담론들, 행위들, 존재들이 나타나고, 굴절되었으며, 영향받았다. 별의 별 얘기들, 상충되는 언급들조차도 그 풍부한 진원을 소진시킬 수 없을 것이다(1990).

'루이 알튀세르라는 이름과 관련된 독특한 모험'은 지워질 수 없는 고유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전후 변증법의 모험과 결부되어 있으며, 모국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선 상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알튀세르에 의해 역사주의라고 비판받았던 사르트르는 1960년 그 유명한 정식속에서, 맑스주의는 '우리시대의 넘을 수 없는 철학'임을 확언하였다(1976; cf. Althusser and Balibar 1970).
그 시대의 일반적인 이미지에 따르자면, 맑스주의에 의해 '표현'된 역사적 계기는 이미 극복되었으며, 1968년 6월 30일을 기해 당대 사고의 초월할 수 없는 지평은 로티(Rorty)의 '북대서양 포스트모던 부르조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로 양도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맑스주의를 진정 동시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전후 철학자는 1990년 10월 공식적인 장례식이 있기 전에 이미 지적인 잔여로 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지적 장으로부터 알튀세르가 사라진 것은 그가 등장한 것만큼이나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한때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이전의(former) 철학적 의식'에 대해서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묶고 있는 연관은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부가 지배적이면, 억압 역시 존재한다. '후대의 엄청난 겸손'(E.P.Thompson 1980)은 대상의 가치를 진정 의미있게 하는 지침으로서도, 또 선대에 대한 호의적인 찬미로서도 의미가 없다. 더우기, 그 문구는 알튀세르가 표현했던 것--'시대의 환상'의 정점 혹은 '니이체, 맑스, 프로이트적 시대(Nietzschean, Maxo-Freudian age)'의 완성(Baudrillard 1990)(알튀세르주의는 맑스주의의 최고의 단계인가?)--이 현재의 이론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악명높게도 알튀세르는 한 사람의 맑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설상가상으로 --(프랑스)공산당원이었다. 그는 1970년대 말에 철학적-정치적 기소사건(actes d'accusation)에 연루될 뿐 아니라, 1980년 11월, 35년간의 동료이자 4년간의 아내--엘렌느 리트만--를 살해함으로써 그 광기에 있어서는 니이체의 친구였다. '망각도, 혐오도, 어떠한 아니러니도 비판의 그늘조차 만들지 못한다'(Althusser 1969). 그 사건에서 첫번째 선택(망각)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늘 말해지듯이, 억압된 것은--누군가의 불편함 속에서--회귀한다. 최근 분과의 경계를 넘어서 알튀세르적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시도되었다(Resch 1992).
1988년 알튀세르주의의 유산에 관해 개최된 회의의 논문들은 이제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Kaplan and Sprinker(eds) 1993). 무엇보다도, 프랑스에서 얀 물리에-부탕이 쓴 알튀세르의 전기 제1권과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동시적으로 출판된 것은 영국이나 대륙 모두에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Kaplan and Sprinker 1993). 지난해 4월 출간후 몇달 이내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4만부가 팔렸으며, 프랑스 언론의 지속적인--아마도 진지한--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2시간의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알튀세르에 의해 쓰여진 가장 장문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기 시작하였다. 생애 말년을 산송장인 채 인고해야 했던 그 사상가는 {맑스를 위하여}나 {자본론 읽기}에 대해서는 듣도 보도 못했을 수많은 독자들 가운데서 사후적인 생존을 누리고 있다.
예상가능한 일이었지만, 영국에서는(1992년 10월 BBC의 Late Show) 주로 알튀세르의 '고백'에서 단서를 취해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로 '알튀세르 사건'의 선정적인 차원에 촛점을 맞추었다. 리뷰에 붙여진 천편일률적인 제목들--'한 맑스주의 살인자','성, 살인 그리고 철학','맑스와 살인자'--은 주류언론에 의해 유행이 지나간 사상에 부착되어 사망자에게 헌정된 공간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준다. 만약 프랑스 해설가들이 부주의로 인해 알튀세르의 아내 살인을 실패한 신(맑스주의)을 저버리지 못한 것보다 약한 비중으로 다루었다면--엘렌느 리트만의 전기가 있는데도 반공산주의적 덕목과 스탈린주의적 야수성을 설파하면서 도덕 운운하는 것은 그럴듯한 것이 못된다--, 영국과 미국의 몇몇 언론들은 다음과 같은 등식을 내놓을 채비가 되어 있었다. 雜報=철학, 또는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광기=살인. 오류투성이의 기사로 도덕적인 대중들을 격노시키는 것은 {선}지(영국의 대표적인 대중지: 역자주)의 '오지아스왕의 외양간'란과 {타임}지의 문학란의 몫이었다. 이로써 대중들은 파리인들이 물들어 있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에 분연히 반대하고 부지불식중에 가치들의 관대함에 반대하는 선서를 하게 되었다.
'나와 나의 글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니이체는 그의 자서전으로 추정되는 책 속에서 선언했다(1975). 그 점은 모든 사상가들에게 적용되며, 알튀세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고의 발생, 구조, 타당성, 효과는 사상에 대한 인신 공격적인 기소나 무죄증명과는 별개의 쟁점들로서,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어쨌든,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의 비밀은 그의 사춘기시절 침상(혹은 그 문제와 관련된 그의 부모님의 결혼생활의 부도덕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는 드러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에 대한 플레하노프의 경솔한 분석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면서, '개념은 침대속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Althusser and Balibar 1970). 사르트르적인 테마를 변형시키면, 문제는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즉 루이 알튀세르는 광적인 우울증에 의한 살인자가 되었으며, 그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광적인 우울증 살인자가 루이 알튀세르는 아니다. 문학란에 표현된 정신병자 운운하는 얘기의 부적절성은 위의 두 문장에 담겨있다.
알튀세르의 쇄신된 명성/악명에 대해 언급되어야 할 첫번째 것은 그의 텍스트 두 권의 지위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복잡하다는 점이다. 1976년에 쓰여진 {사실}(Les faits)은 미완의 것으로 알튀세르의 제자인 레지 드브레이가 편집하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라는--무산된--저널에 싣기로 되어있었다. 입원이 거듭되고 있던 중인 1985년 봄, {사실}의 4배(270페이지) 분량의 원고는 매우 조급한 가운데 쓰여졌으며, 원래는 출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알튀세르가 남긴 가족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가장 가까운 유족(조카)이 유언집행자가 되어, '현대 출판기념기관'의 후원과 올리비에 꼬르뻬와 얀 물리에-부탕의 신중한 편집 하에 유작들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공적 생활 이전에 이미, 그리고 그 기간 내내 지속되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알튀세르의 헛된 투쟁--그의 가장 뛰어난 에세이 [프로이트와 라깡](1971)에서 환기되었던 '기억도 기념도 없는 전쟁'--은 마침내 그것을 기념하게 되었고 일종의 회고록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과거의 그가 어째서 그랬다는 식의 자서전 작가의 얘기를 믿을 수 있는가? 의심의 여지를 추론할 수 있는 기반은 다름아닌 {사실}과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간의 균열에서 드러난다. {사실}은 특유의 간명한 (그리고 아이러니한) 제목 하에서 코믹한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다(예를 들면 거기에는 교황 요한 23세 그리고 드골장군과 만난 허구적인 얘기들이 들어있다). {미래}의 방식은 반대인데, 거기에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관통되고 있는 거짓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비극적인 상흔이 담겨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역을 다루면서도, 두 저작은 매우 상이하며, 알튀세르의 운명에 대해 상보적이기 보다는 대안적인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독해에 엄격하지 않다면, 독해란 종종 지나치게 담백한 것이어서 그의 말 그대로 알튀세르를 받아들이게 하고, '쓰여진 담화를 직접적으로 투명한 진리, 즉 목소리를 가진 실재적인 담화'로 받아들이게 만든다(Althusser and Balibar 1970). {자본론 읽기}의 저자들이 애초부터 주장했듯이, 순진한 독서란 없다. 알튀세르 자신이 취한 맑스에 대한 전략--잠재된 구조(또는 이론적 '문제틀')를 재구성하기 위한 '징후적 독해'--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알튀세르 건에 대한 그 자신의 분석과 그의 비이성--아내 살인과 자기 파괴에서 정점에 이르는 얽혀진 인과의 실타래--에 대한 이성의 해명은 유비적으로 읽혀질 필요가 있다. {미래}에 담긴 꿈의 분석은 문자 그대로 징후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1956년까지 알튀세르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물리에-부탕에 의해 완벽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로써 우리는 알튀세르 자신의 의도가 개입된 저술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가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알튀세르들이 있었고, 그 중 알튀세르가 쓴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데리다에 의해 기념된 복수적이고 모순적인 실체들을 모두 포함하지도(심지어는 거쳐지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기타 사정을 감안해서(en connaissance de cause) 접근해야 하는 단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기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우리가 완전한 전기를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알튀세르가 '자신과 타인의 전기적 상황'이라고 칭한 것과 그와 관련된 사실들의 적나라한 실재는 구성되는 과정에 있다. 그의 무의식의 완전한 비논리성은 밝혀지는 것을 꺼려한다. 이 점에 관해서, 알튀세르는 다른 곳에서 '무(nothing)는 분석의 출발점인 무의식적 요소만큼이나 간단하다. 그러나 무는 무의식적 요소의 개별 조합과 마찬가지로 복잡하다'라고 언급했다.
그의 서명 하에 사실이라고 제시되는 것들 속에서 알튀세르가 취한 당혹스러울 정도의 명쾌함은 엄청난 복합성 속에 있는 개별조합을 봉쇄하고 있다. 마치 파스칼에 반대하여 알튀세르의 심장은 나름의 이성을 가지고 알튀세르의 머리 속에서만 알려질 수 있는 듯. 더우기 젊은 알튀세르에게 드리워진 '알튀세르'의 그늘--'선행된 미래'(cf. 1969) 속에서 그 자신의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권위있는 판본(왜냐하면 저자날인이 되어 있으므로)으로 받아들여졌다.
{미래}는 아내 살인후 프랑스 형법 64조에 의해 면소(non-lieu: 무책임)판결을 받은 후, 그가 즉시 면죄받고 (사회적으로) 거부당한 사연을 공개적으로 설명하는 저작으로 소개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고 이제까지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 대신 말할 수 있었고, 또 법 소송절차가 내게 모든 공개적인 해명을 금지했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공개적으로 나 자신을 해명하기로 작정한 것이다.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선 내 친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나를 짓누르던 이 무거운 묘석을 들어내기 위해서다. 그렇다. 나 혼자서, 스스로 그 누구의 조언이나 협의도 없이 나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극도로 심각했던 상황으로부터, 나의 살인으로부터, 그리고 특히 그런 소송절차에 대해
실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전혀 반대할 수도 없이 혜택을 입게 된 그 면소판결의 애매모호한 결과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내가 생존해야만 했고 사는 것을 배워야했던 것은 바로 이 면소판결의 묘석 아래서, 침묵과 공개적 죽음의 묘석 아래서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주의를 전후해서--그 기간에도 마찬가지로--또 다른 알튀세르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작가는 {미래}가 저널도, 회고록도, 자서전도 아니며, 오히려 그가 한 때 그의 전기작가에게 '외상의 기록'라고 불렀던 것임을 명기하고 있다. 그는 '엄밀하게 사실에 충실한다'라고 주장하지만, 즉각 결정적인 조건을 덧붙였다. '환상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지나간 삶들을 돌아보는 평온한 회상이 아니라, 예고된 죽음에 대한 번민에 찬 회고를 다루고 있다. 편집자의 말에 의하면, {미래}는 '사실'과 '환상'이 뒤섞여있는 혼합물이다.
데리다는, 알튀세르에 대한 공적 담화는 맑스 혹은 레닌이라는 이름과 알튀세르란 이름을 결합시키려고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다른 인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파스칼, 도스토예프스키, 니이체, 아르토. 이러한 통찰을 예견이라도 했듯이, 알튀세르는 푸코가 편집한 피에르 리비에르의 증언들과 루소의 {고백록} 등을 거론하면서('아! 나는 루소가 아니다'라고 덧붙이는데), 자신의 텍스트를 자리매김한다. 아마도 다른 자서전으로는 사르트르의 {말}와 슈레버 대법원장의 {나의 정신병에 대한 회고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파편적인 그리고 '난폭한 (자기)분석'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담화 속에 있는 니이체적인 증언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알튀세르가 루소의 특권과 해악--"나는 전세계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고백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고백의 이중성과 마찬가지로 해악의 대부분 역시 보이지 않는 위험에 맹목적일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미래}는 고질적인 광적 우울증을 보여주는 증후이기도 한데, 그는 공적인 대화요법을 통해 그것을 몰아내보고자 했던 것이다.
{미래}는--고통스럽게도--범죄의 장면으로부터 시작되고, 철저한 자기 조사후 '옛친구인 의사'의 설명적인 주해로 마감되며, 결론에서 그는 면소판결을 재언급하고 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두 차례의 전쟁기간 동안 알제리와 남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는 '가족 소설(family romance)'의 형태로 주인공의 정신병의 기원(혹은 그의 광기의 기원)을 밝히는 데 할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가족 공포물(familial horror story)'임이 드러난다. 그의 이모로부터 알튀세르는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연인은 1차대전 중 사망했으며, 그녀는 그후 그 연인의 형으로부터 받은 결혼제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젊은 시절, 결국 그녀 생 전체의 사랑이었던 연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로써 알튀세르는 참담한 결론을 도출해내었다. 즉 그는 만들어진(made)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났을(born)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사랑의 진정한 대상은 어릴적 루이라는 세례명 속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이름은 3인칭 대명사인 '뤼'(lui: 그)를 말하기도 하는데, 익명의 제3자를 부르는 것처럼 울림으로써 나 자신의 모든 고유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내 등 뒤에 있는 그 남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뤼(Lui), 루이(Louis), 나의 삼촌, 어머니는 내가 아니라 삼촌을 사랑했다.

강간당한 아내로서 기억되는 '상처로 피흘리며 수난당하는 어머니'--루시엔느 알튀세르, 원래는 베르제. 1975년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처녀적 이름으로 다시 바꾸었다--는 거세시키는 어머니로 묘사되고, 자신의 공포심에 내몰려져 알튀세르와 누이동생 조르제트에게 사회적, 성적 '위생'의 권한을 철저히 행사했다. 그녀의 독재적인 칙령이 집행되던 가정에서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혹은 수사적인 의미에서 부재하였으며,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알튀세르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그 결과는 한없는 고독이었으며, 그것은 알제 시를 굽어보고 있던 불로뉴 숲 혹은 외조부가 은퇴해서 돌아간 곳인 모르방시의 라로슈미에의 '어릴적의 낙원'에서 외조부('나의 진정한 아버지이자 유일한 아버지')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완화될 수 있었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아버지 없는 자식', '고독'과 관련된 테마는 후일 그의 철학적 저술에서 나타날 것이었다고 말한다(예를 들어, 1971; cf. Elliott 1988). '여인을 쫓아다니는 것'(Cherchez la femme)은 그의 개인사를 해명하는 실마리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그 방법을 이해한 것은 훨씬 뒤에, 나자신을 분석함으로써였다...불행한 여인인 어머니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 즉 어머니가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영원히 사랑한 죽은 남자의 이름을 본떠서 루이라고 이름 짓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아이, 그 아이를 가지게 된 운명을 어머니 나름대로 살았던 것이다...나는 여기서 내가 겪었던 것, 그리고 내가 그것에 대해 이해한 것을 재구성하고 있다...내 경우 죽음이란 나의 어머니가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나 이상으로 사랑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말한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는 뭔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떨게 만들며 내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내 운명을 영원히 결정한 것이다. 이제 더이상 환각이 아니라 내 삶의 현실 그 자체가 문제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환각은 삶이 된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알튀세르의 존재를 구조화했던 기획--'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그녀를 유혹하는것'--을 만들어냈다.

나는 어머니가 아주 옛날부터 다른 루이에게 바라고 기대한 것을 실현했으며, 또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즉 지혜와 순결성, 덕성, 지고의 지성, 영육의 분리, 학업에서의 성공, 그리고 나아가 '문필가적' 경력을 이루어냈으며...최종적으로는 고등사범학교, 그것도 나의 삼촌 루이가 들어가려고 했던 생-클루의 고등사범학교가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윌름의 고등사범학교에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아시다시피 나는 지식인이, 그것도 대중매체 속에서 자기 '손을 더럽히기'를 완강히 거부했던 지식인이 되었으며 나의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읽던 몇몇 책의 첫 페이지에 이름이 나오는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어머니의 사랑을 얻는 것은 알튀세르에게는 에고(정신적, 육체적)를 형성하였으며, 그것은 그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기획의 역설적 효과--그의 스승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었듯이--는 애초의 자아 탈중심성(ex-centricity)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알튀세르 자신이 스스로를 배신하고자 하는 유혹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는 느낌을, 실재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다만 인위적으로, 그리고 속임수들을 통한 유혹적인 기교들인 바로 그 인위적인 것들 속에서만 내가 존재할 뿐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 매달리고 있는 '폭로'에서 알튀세르란 사람은 철학적 소양에까지 사기를 치고 있는 사람으로 규정된다(보다 정확히는 철학적 소양이 없다고 간주된다). 그 사실이 어쨌든 간에, 윌름가의 고등사범학교 입학 시험에서 6등을 하고 난 이후 그의 정규교육은 1939년 9월 전쟁이 일어나자 중단된다. 그 당시 일반적이던 카톨릭 극단적 분파와 왕당파 간의 정치적 선택의 와중에 그는 리용의 빠르끄 리셰로 옮겨갔으며--'인민전선보다는 히틀러가 낫다'--, 1940년 여름 제3공화국의 붕괴 후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분명히 하였다. "일, 가족, 당"에 헌신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알튀세르이다. 체포의 경험이 형식적인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체포로 인한 여러가지 곤경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거기에는 장점도 있었다고 강조한다. 사르트르가 점령기간(Occupation) 중이 가장 자유로왔다고 느꼈던 데 비해, 알튀세르는 전시감옥 속에서 만큼 안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27살에 마침내 그는 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로버트 다니엘이라는 친구를 가지게 되었는데, 알튀세르는 그를 '여자처럼 부드럽게 나를 대해주었던 사람(내가 가져본 적이 없는 진짜 어머니)'으로 회고하였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은 알튀세르를 고양시키기 보다는 방향을 상실하게
만들고 마음붙일 또다른 사람을 찾아 헤매게 하는 '융합에의 향수'를 부채질하였다.
전후, 유대관계는 핵심적인 3가지로 줄어들었다. 고등사범학교는--'그것은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환경, 양수의 대체물이었다'--그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1948년 철학 교수 자격시험(agr gation)에서 2등을 한 이후로 학문생활을 보장해주었다. 1946년 그는 엘렌느 리트만을 만나게 되고--유대인 레지스탕스, 前 공산주의자였던 그녀는 어려운 생활에 처해있었는데--, 1948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엘렌느는 '내가 알지 못하던 세계, 연대와 투쟁의 세계, 행동의 세계...용기의 세계라는 커다란 선물을 해주었다'. 그러나 너무도 기적적으로 벌어진 구원의 전망은 곧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8살 연상이자 28살에 알튀세르의 동정을 앗아간 엘렌느과의 관계는 애초부터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그를 심각한 우울증으로 몰아넣어 피에르 말르가 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한 후에 20여일간 첫번째 입원을 요하게 했다(줄리앙 아쥬리아게라의 진단에 의해서 심각한 우울증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사건은 거기서 종결되었을 것이다 Roudinesco 1986).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와 엘렌느는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알튀세르는 부모를 대신해서 정기적으로 아픈 그녀에게 안마를 해주었던 반면, 엘렌느은 그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유달리 인생 경험이 많았던 그녀는 마치 엄마가 자기 아이, 기적같은 자기 아이를 사랑하듯 나를 사랑했으며, 동시에 아버지처럼, 그것도 좋은 아버지처럼 나를 사랑했다. 그것은 그녀가 현실세계에 대해, 내가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무한한 세계에 대해 나를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녀가 내게 가지고 있는 욕망, 그 비장한 욕망에 의해 나로 하여금 남자로서의 역할과 그 남성적 면모에 눈을 뜨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러한 통과의례와 불가분하게 알튀세르는 프랑스 공산당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갔는데, 그는 그 때가 로마 카톨릭 신앙을 버린 이후였다고 말한다. 레지스탕스에 의해 키워진 희망이 냉전의 희생양이 되고, 1944-7년의 '연합전선'이 1948년 '양대진영'으로 분열되었을 때, 알튀세르는 프랑스 공산당 자체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 시프렝의 말을 환언하면, "당밖에서는 어떤 정치적 구원도 가능치 않다". 정황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국면은 새로 입당한 지식인에게는 가혹한 것이었을 것이다. 니짱(Nizan)의 책 {음모}에서 세르쥐 프뤼베나지는 전전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경험을 정확히 전달해준다(사회적 원죄(출신성분)문제는 결코 제기되지 않았다 (1988).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 서문에서 말했듯이--아마도 {음모}를 염두에 둔 (부인하는) 것일텐데--문화적 냉전기에 사회적 원죄의 비방은 만연하고 번성한 것이었다('쁘띠 부르조아 출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행위 속에서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꼈다...그들 생각으로 상상적인 '그 빚'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진 것이다...)(1969).
그러나 정작 정황을 강조하는 맥락은 엘렌느가 당으로부터 축출되었을 때 그녀를 재입당시키려는 알튀세르의 노력을 설명하는 부분에 존재한다. 이 쟁점은 너무 폭발적인 것이어서, 어떤 구원도 당이 아니면 불가능했듯이 그 가운데는 저주의 조짐도 있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기본적으로 그 사건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언급만을 되풀이 했는데, 즉 그의 아내의 불운이 엘자 뜨리올렛과 다른 이들의 적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일 거기에 가담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엠마누엘 르 르와 로드리에 의해 세부사항들이 확인되었다(1982). 엘렌느 사건을 받아들이면서, 알튀세르는 그녀가 이중첩자라는 누명을 벗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그녀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등사범학교(ENS)에 있는 프랑스 공산당 세포들로부터 히틀로-트로츠키주의자(그 시기에 독특한 스탈린주의적 합성물)와 어울렸다는 심문과 검열에 대해 자신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미래}에서 알튀세르는 {사실}과는 다른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평화운동으로부터 엘렌느를 추방하자는 만장일치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그의 동료(엘렌느)와의 관계를 절연하라는 지국의 지시는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지 엘렌느의 일시적인 추방에 슬퍼하면서도 그녀의 사랑에 위안받은 알튀세르는, 이러한 '파리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모스크바식의 재판'으로 인해 프랑스 공산당과 그
지도방침에 대해 현실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평가는 로랑 카사노바의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로랑 카사노바는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교정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는 '부르조아적'인 산수를 사용한다고 생물학자인 마르셀 쁘레낭을 호통쳤다.
그의 인식론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에 대해서, 뤼센코이즘과 같은 미친짓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969, 특히 1977을 참고할 것).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그의 혜안은 후속적인(1978년에 극적으로 표현되었던) 탈환상의 결과로 역으로 재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가 자신의 동료에 대한 제재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취한 상대적인 평온함은 잘못된 기록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사실}에서 독일에서의 감옥생활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알튀세르는 보초에게 탈출이 시도되었다는 생각을 갖게하고 그리고 나서 몇주 후에 적들이 '탈출자'를 잡는데 실패했을 때 실제로 탈출을 시도하는 계획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에게, 그것은 '모든 철학적(정치적, 군사적) 문제 중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 속에 남아있으면서도 원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의 집착을 밝혀낸 후에도 {미래}는 '원환들 중의 원환'--가족, 학교, 동료들, 당, 병원--, 그리고 그것들 간의 상호함축과 중복결정이 '우연적 필연성'을 통해 독특한 운명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자신의 정식을 적용하자면, 그의 발화는 호가 구부러져 있지만 만들어져 있지 않는, 그리고 좋은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사악해져 결국은 엄청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원환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에게는 실례의 말이지만, 지옥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 스스로 인정하는 바에 의하면, 알튀세르와 엘렌느는 죽는 순간까지 서로가 있어도 또 없어도 살 수 없는 부부였다. 그녀를 버팀목 삼아 또 피난처삼아 의존하면서도, 그의 자기파괴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엄청난 테러를 감행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즉 그녀에 의해 버림받는 것. 그의 재발하는 우울증에 의해 고통과 좌절의 짐을 지고 있었던 엘렌느는, 거기에다 정신병이 광적일 때 그가 범한 '도발'과 치욕(예를 들면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에 무너졌다. 하필이면 일들이 1980년에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는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알튀세르 자신의 분석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가 또다른 우울증--지금까지 것 중 가장 심한 정도의 것--에 빠졌을 때, 그 때 엘렌느는 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자살에 대해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1980년 9월에 대한 알튀세르의 끔찍한 이미지에 의하면, 뒤따라 일어났던 일이 '의도적으로 만든 고독의 밀실에서 둘만의 지옥'이며, 그것은 살인에 의해 끝이 났다. '나 자신의 파괴는 상징적으로 타인--무엇보다도 가장 절친한 친구들과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파괴로 나타났다'.
그 무렵, 최소한 이년에 한번 정도 병원 신세를 지게 했던 고통스런 광기의 발작에서 알튀세르를 벗어나도록 하려는 수많은 '치료'가 무위로 끝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정신병력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환자들이 '스탈린'이라고 별명을 붙인 어느 병원 보조원이 담당했던 전기충격요법에 고분고분 따랐던 사실을 비꼬아서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1950년-1962년 사이에 로랑 스티브냉에게 받은 최면분석 그리고 의학적인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고 있다. 그 뒤 마침내 그는 르네 디아켕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는 정신과 의사의 무례함으로 알튀세르를 대하지 않았다(흥미롭게도, 알튀세르는 이러한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를 상세히 밝히지 않는데, 이러한 선택은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회귀'(1971)에 대한 그의 현대적인 승인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의 의식적인 테마들을 자포자기에 대한 공포로 이름짓는다. 즉 그에게는 불가능한 사랑의 요구에 쉽게 허물어져 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 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로 대중 앞에 폭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것이 1965년 가을에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가 출판된 바로 직후, 명성의 절정에 있을 때, 그가 겪은 '극적인 우울증'의 원천이다) 등이 그것이다. 그가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순결'을 앗아간 어머니에 의한 '거세'에 이르기까지 추적해들어간 분석의 무의식적인 암시와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러한 과정은 분명히 심각한 우울증에서 광기의 절정으로 옮아 가는 경과를 포함한다.

나는 매우 빨리 우울증에서 때로 격렬한 진짜 광기의 모습을 띠는 하이포매니아 hypomania로 옮아 갔다.그리고 나는 스스로 외부 세계, 나의 친구들, 계획들, 문제들 등 모든 것에 전지전능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고, 쉬웠던 것처럼 보였다...이러한 예외적인 용이함과 자부 속에는 커다란 공격성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공격성향은 성적인 불구와 이에 따른 우울증의 환각증상처럼 진정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우울증 성향과 이를 조장하는 성적인 불구의 환각들에 대한 단순한 방어였기 때문이다...지독한 성적 불구라는 공포와 전지전능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 즉 과대망상증은 쉽게 말해 동전의 양면이었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내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내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

역설적으로, 정신병원이 알튀세르의 성적 불구상태를 증명했다 하더라도, 정신병원의 '안전함'은 전지전능의 욕망에 부응하였다. 아카데미와 당의 동아리들 안에서 그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가운데도 동일한 드라마가 연출되었다. 정치적, 철학적 저술 속에서 알튀세르가 밝히고 있는 자신의 저술목적이 주석가들에 의해 종종 무시되기 때문에 다음은 환기될 필요가 있겠다.

내가 스스로에게 빚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도 빚지고 있는 것은 고등사범학교에서의 철학교사라는 직업과 철학, 정치,당, 내 책들, 그것들의 영향들에 대한 나의 특별한 집착을 개인사를 통해 설명하는 것, 다시말해 나의 주관적인 환상들을 나의 객관적이고 공적인 활동들에 투여하고 각인시키는 일로 이끌어갔던 나 자신을 내가 어떻게 발견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알튀세르가 설명하고 있는 바는, 루이 알튀세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알튀세르주의의 장인이 되었는가이다. 기원과 타당성의 문제를 합성시키지 않는다면, 기원에 대한 그의 성찰은 '상상적 맑스주의'(imaginary marxism)--레이몽 아롱이 알튀세르주의에 붙여준 이름이며, 알튀세르는 이에 동의했다--를 정교화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일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요소들을 제공한다(cf. Aron 1969).
{미래}에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와 (자신의 것을 포함한) 맑스주의적 저작들의 철회를 거부하였는데, 이 점에 대해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미래}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철회에 참여하기는 커녕--이 사실은 틀림없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조바심이 나도록 만들고, 다른 독자들에게는 확신을 줄 것이다--알튀세르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프랑스 공산당 안에서 수행한 철학적-정치적인 '진지전'을 사과하지 않았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스릴과 말초성(spill)을 경멸하면서 맑스의 유물론적인 '영감'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을 확언하였다.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면서도(예를 들면,5월 사태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배반적인 역할), 알튀세르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공산당원이 되는 것이 사리에 맞음을 정력적으로 옹호하면서, 그가 왜 자신이 선택한 길을 고집했던가를 설명한다.
 
내가 당에 남았을 때...공공연하게 반대파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함으로써...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당내에서의 반대파적인 활동이 진지한 이론적, 정치적 기초들 위에서 가능함을, 따라서 당의 전화가, 아마도 결국에는, 가능함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그의 가톨릭 스승이었던 장 귀똥(J.Guitton)에게 보내는 1972년의 편지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철학이 하나의 전투라는 것은 옳습니다. 물론 나는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내 건강이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는 표시입니다'(귀똥 1988). 1978년 3월 좌파연합의 패배 이후, 십여년간 쌓인 희망들이 꺾이면서, 알튀세르에게는 더이상 그런 희망이 나오지 않았다. 1978년 12월 3일자의 귀똥에게 보내는 다음 편지에서 그는 '나의 사고 세계는 무너졌습니다. 나는 더이상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젊었을 적) 이전 시절의 말을 빌어 나는 당신의 기도를 애원합니다.' 모든 중재는 무위로 끝났고, 알튀세르는 그의 운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부가 사후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니체의 초인적인 희열의 메아리 처럼(1975), {미래}의 말미에는 필사적인 의지로 낙관주의가 드러난다.

그래서, 그 드라마들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직 아름다울 수 있어. 나는 예순 일곱이지. 하지만, 나는 느끼지--혼자 힘으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나는 비록 상황이 이내 끝나버리는 게 틀림없을지라도, 예전같지 않게 젊다고 느껴.
그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아마도 미래는 오래 지속될 것이다--그러나 이 문구의 저자때문은 아니리라.
극도의 열정을 가진 이 결론은 알튀세르의 병세의 회복을 나타내기 보다는, 그의 되풀이 되는 우울증의 조증 단계를 무심코 드러낸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프랑스의 선정적인 언론에서 푸대접을 받은 이 저술이 완성된 지 몇주 후, 그는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루이 알튀세르의 시대는 왔다가 사라졌다. 대부분은 사후에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지배적인 인상은,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 속에서 엘렌느의 파괴에까지 이른 알튀세르의 자기파괴이다. 얀 물리에-부탕의 포괄적인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성향이 일관되게 스스로를 비하하는 가운데 텍스트에 무언중에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자기훼손은 데리다가 조사에서 언급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증된 사실을 숨기고 있다. '알튀세르는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의 소망은, 그의 유작으로 그의 수수께끼가 백일하에 해명되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더 이상 해명이 필요치 않게 되고 익명성이 주는 해방감 속으로 풀려나게 되는 것이었다'. {미래}는 그러한 열망을 좌절시키며, 대신에 1980년 1월의 사건에 따라다니는 관음증을 더욱 더 부채질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명인 피에르 마슈레이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 투성에다 반쯤만 진실인 것'은 아닐지라도, 물리에-부탕이 충분히 증명한 것처럼, 그 책은 한 사람의 삶을 파산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다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사소한 쟁점들은 제쳐두고(물리에-부탕은 알튀세르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la Wittgenstein), 나아가 철학사 전반에 대해 무지한 척했다고 지적한다), 전기작가는 네가지 주요한 측면에서 알튀세르를 수정하고 있다. 첫째--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알튀세르의 가족 소설이 반전되는 것은 1964년 7월로 시기확정 될 수 있다. 그것은 엘렌느 리트만으로 인한 것이다. 물리에-부탕이 인용한 1964년 7월 26일자 편지에 의하면, 그녀의 동료(알튀세르)에 의해 충실하게 재현된 원초적 재앙으로서 가족의 역학은 이미 그녀가 '난폭하게 분석'했던 바이다. 1950년대 알튀세르의 절친한 벗, 쟈끄 마르탱--그는 자살하였고, {맑스를 위하여}는 그에게 감동적으로 헌정되었다--처럼 그녀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는데, 성년기의 광적인 우울증의 음영을 어린 시절에 투사하도록 알튀세르를 부추켰던 것은 바로 엘렌느였던 것이다.
첫번째 사실과 연관되어, 젊은 알튀세르의 존재에서 중심적인 인간관계는 정작 그의 말 속에서는 소극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으며, 대부분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알튀세르는 누이동생 조르제트와 강력한 심적 유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신경병'력은 알튀세르의 병력에 흔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1964년 여름 엘렌느의 폭로 서한을 받은 지 두주 뒤에, 알튀세르가 1980년의 시나리오를 예견하는 몽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록된 것 가운데 발견될 수 있는 그 몽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누이를 죽여야 한다...더욱이 그녀의 동의 아래 죽여야...'
물리에-부탕이 밝혀낸 다른 주요한 논점으로는 알튀세르의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 그리고 엘렌느의 레지스탕스 경력에 관한 것이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보면, 알튀세르는 전전에 푀네스 크레티앙(Feunesse Chretienne)에 소속된 카톨릭-민족주의 행동가였는데, 그것은 악숑 프랑세즈(Action Fran aise: 프랑스 행동당)와는 다른 노선이지만 그가 기꺼이 인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익적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보다 중요하게는, 전후 그의 좌파로의 무게중심 이동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의 최종적인 결합은, 그가 세례를 받은 유일하게 신성하고 사도적인 가톨릭 신앙과의 어떠한 '단절'(인식론적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도 수반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의 최초 저작(1949)이 암시하듯이, 카톨릭 좌파인 푀네스 드 레글리즈(Feunesse de l' glise)와의 관계는 그가 프랑스 공산당과 밀착한 뒤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1950년과 1952년 사이에 푀네스에서 발을 떼었으며, 1953년 바티간 교황청이 푀네스와 '노동자 설교단'을 파문했을 때야 관계를 단절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카르디날 레츠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성 테레사 아빌라의 저작들을 레닌전집과 함께 서가에 꽂아 놓으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세계를 변혁시켜라'는 맑스의 정언과 더불어 파스칼의 갈릴레이적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라는 문구를 서재 벽면에 꽂아 두었던 이 철학자는 자신의 정체성--지난 날의 카톨릭신도--에 거의 운명적인 사랑으로(amor fati) 반응하였다.
물리에-부탕의 설명에 의하면, 알튀세르가 충성을 서약한 조직이 그의 동료(엘렌느)의 복권에 시큰둥했던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모호한 에피소드에 대한 최종적인 조명은 전기의 제2권에 기약되고 있다. 일단 물리에-부탕은, 알튀세르가 경솔한 짓을 했다고 지적하면서도, 평화운동에서 엘렌느를 배제하는 데 동의했다는 알튀세르 자신의 주장은 파국적인 신경쇠약으로 인한 차폐(遮弊) 기억 (screen memory)일 것이라고 암시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 자신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 신경쇠약은 엘렌느와의 관계를 위험한 것(liasion dangereuse)이라고 본 고등사범학교(ENS)의 당세포의 의지에 굴복한 뒤에 걸린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물리에-부탕은 알튀세르의 악덕을 자신의 미덕으로 삼았다. 즉 그는 '자서전'을 읽는 독자를 위해, 아직 결론이 내려져서는 안되는 '억압된 역사의 귀환'을 목표로 거의 완벽하게 추적해 들어갔다. 그가 알튀세르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더라도(아직은?), 그는 그 수수께끼를 조사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업적은 그 주제를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에게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칭찬은 이 정도로 하자. 반대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에 대해서는 알튀세르는 전기작가의 악덕을 자신의 미덕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제2권은 수정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1권은 이러한 측면에서는 부당하다고 할 정도로 반감으로 채색되어 있다. 반스탈린주의자들의 정서에는 공격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비시(Vichy)정권과 점령기간(Occupation)이 끝난 후,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날 프랑스 지부(SFIO)가 냉전과 프랑스 식민주의를 부추기는 상황--두 비평가에 의해 원정 사회주의(socialisme expeditionnaire)로 요약된 상황 (Ross and Jenson 1988)--아래, 프랑스 공산당(PCF)은--레지스탕스와 관련 이후로는 계속 고립되어 있었는데--좌파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나은, 방어적인 선택지였다.
여기서 에릭 홉스봄이 이 문제에 할애한 약간의 기록이 물리에-부탕의 장황한 설명보다 훨씬 값어치있겠다. 그 세대의 공산주의적 지식인들이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알튀세르의 '활자화되지 않은 원고'를 언급하면서, 홉스봄은 1964년에 이렇게 살펴보고 있다.

자진탈당한 공산주의자들--자진탈당은 오랜 분열이 낳은 자동적인 결과였는데--은 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당이 갈수록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아갔던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 당을 떠난다는 것은 정치적인 무능력과 사회주의에 대한 배반을 뜻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적 지식인들에게 학문적 문화적 인물로 성공하고 정착하는 것은 보상이 될 수 없었다. 탈당하거나 출당된 사람들의 운명은 반공주의였거나, 소소한 잡지의 독자들 말고는 기억할 수 없는 망각에 빠지는 것이었다. 반대로, 당에 대한 충성은 최소한의 영향력이라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1977).

한국전쟁 때 사르트르가 분투했던 것처럼, 이 상황을 파악하는 홉스봄의 극단성 역시 너무 경직되어 있고, 국외자의 입장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적 실천을 이론화한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앤더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에 남든, 당을 떠나든 간에 알튀세르나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은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 신념은 정치적 현실에 의해 강화된 것이었다. 그때 공산주의 운동은 대중적인 사회주의적 정치를 유일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무슨 일을 해도 욕을 먹었다. 당을 선택함으로써 알튀세르가 치른 대가--당시 노선의 긴박함에 복종--는 어느 모로 보나 커다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댓가로 받은 기회 역시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1960년 자유, 평등, 박애의 공식적 수호자들에 의해 알제리의 수도 한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었는데(현재의 아름다운 파리쟝 정신(Parisian souls)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더러운 손(dirty Parisian hands)을 가지고 있었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알튀세르에게 당이라는 선택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물리에-부탕의 속편을 잠시 제쳐두고, '상상적 맑스주의'라는 테마--레이몽 아롱이 딱지붙이고 알튀세르가 승인한--를 잠시 언급해보자. 레이몬드 윌리암스(1976-7)는 전후 영국의 맑스주의의 조류를 '합법적' 맑스주의, '실천적' 맑스주의, '강단'맑스주의라는 세가지로 구분하였다. 알튀세르의 기획은 세번째 범주로 분류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에서는 그의 기획은 매우 실천적으로(operative) 동기화된 것이었다. 그의 동기는 당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재구성함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의 전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맑스주의가 흔히 정통적인 것(legitimating)으로 여겨지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프랑스 공산당에 남아서 계속 활동할 수 있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정통성의 옷을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당의 전화는 전통을 옹호함으로써만 진행될 수 있었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이러한 전략을 전쟁 계략(ruse de guerre), 즉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이단을 창시하는 계략으로 밝히고 있다(스피노자는 오래 전에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텍스트가 없다면 이단도 없다). 알튀세르의 모험은 '이론주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론적인 정치함에 준하는 전도를 통해 정치사의 시간을 10월혁명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는 도박, 이는 맑스의 문구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것(Marxological)은 아닐지라도 맑스의 자구로 되돌아가자는 호소였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경전에 대한 '징후적 독해'와 그를 통한 맑스주의 요체의 재구성 작업이 가진 경향성을 솔직하고 분명히 인정한다. 그 자신이 주장하는 바, 그의 목적은 당(PCF)내의 선배들과 분리의 선을 분명히 하여, 그들이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발행한 부도수표로 부터 당대의 맑스주의를 해방시키고 그것을 진정 현대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기꺼이 인정한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맑스주의의 원칙들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맑스 속의 모든 것과 그에게 남아 있는 이데올로기--무엇보다도 '변증법적인 것'이라는 변호론적 범주들, 심지어 변증법 그 자체--를 정말로 금압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의 우연적인 발전이라는 기정 사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변증법은 그 유명한 '법칙들'의 외피 속에서 당지도부의 결정을 소급해서 변명(정당화)하는 것일 따름이다.

알튀세르주의--그리고 맑스주의 일반--의 '비'(NON)동시대성에서 '비'라는 접두어는 근자에 지적 사조에 대해 자주 붙여지는 접두사이다(1980년대 중반의 두 비평가의 말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는 '비틀즈의 음악이나 고다르의 초기 영화들처럼 이미 한물간 것이고, 멀지 않지만 흘러가 버린 과거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한다'(Ferry and Renaut 1985)). 전진이 항상 진보를 이룩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다음과 같은 경고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모험 동산에 세워질지도 모른다.'부인(contradiction)은 오류의 논파를 의미하지 않으며, 혁신이 항상 앞서감은 아니다'(Gay 1989에서 인용). 그러나 '멀지 않지만 흘러가버린 과거'는 자서전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된 무언가를 지시한다. 그 말은, 알튀세르의 '상상적 맑스주의'가 맑스주의와 '포스트맑스주의' 사이에 철학적 점이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정도를 의미하는 데, 그 점이적 철학적 구성물의 성마른 효과로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지적인 이행이 촉진되었다.
알튀세르를 추도하는 미려한 문장 속에서 테드 벤튼(T.Benton 1990)은, 대부분의 포스트맑스주의적인 이론화가 알튀세르의 테제들을 일면적이고 반맑스주의적인 것으로 급진화켰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예들은 다양하게 열거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미 형이상학적으로 공허한 포스트맑스주의의 봉화를 예견했던 차원으로 논의를 국한시켜서, 한 가지 쟁점, 즉 '역사의 종언'에 대해서 {미래}와 물리에-부탕의 전기가 제공하고 있는 매혹적이고도 명쾌한 자료를 살펴보자.
알튀세르 자신이 말하는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의 일관된 테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데 있어' 역사철학의 유혹이 공산주의자들을 곤혹스러운 정치적 망설임으로 이끈다는 것이다(1992). 말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알튀세르는 생산력 발전을 통한 공산주의로의 전진이라는 큰 이야기(meta-narrative)를 가진 교조적인 역사유물론에 반대해서, 그것은 경계적 이성의 간계라는 형태로 헤겔적인 神政論을 사이비 유물론으로 '전도'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류의 '철학적 소설들'에 공통된 원죄는 매우 '사실적인'(realistic) 화법구조 속에 존재하는데, 그 소설들은 역사유물론의 본연의 임무--'구체적 상황'을 나은 쪽으로 전화시키려는 모든 정치적 실천에 필수불가결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인 국면의 특수성을 파악하는 데서 벗어나 상황을 추상하여 한 사람의 영웅과 예정된 종말로 얘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철학적 소설가들'--알튀세르는 사르트르를 예로 드는데--은 맑스가 조롱한 혁명의 연금술사들처럼 '행동의 지침'으로는 부적합하다.
사르트르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킨다. 알튀세르는 스탈린식으로 '우파 헤겔주의적'인 역사철학(소비에트의 존재근거로서 경제주의)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에 반대해서 나온 모든 종류의 '좌파 헤겔주의적' 변종(혁명의 이성으로서 인간주의)에도 반대했다는 사실. 알튀세르가 알튀세르가 되기전인 1950년에 이미, 그는 알렉산더 코제브의 {헤겔 독해 서문}(1947)에 의해 프랑스에 배양된 헤겔적 맑스주의의 핵심적 가정을 거부하였으며, 그후 후꾸야마가 전도의 전도방식을 통해 새로운 삶을 부여한 '역사의 종언' 역시 거부하였다. 알튀세르는 전후 프랑스의 지적 풍토에서 이러한 경향이 현저함에 주목하면서,
코제브가 이러한 지적 풍토에 부여한 '경악할만한 관료제적 내용'을 비판한다.
물리에-부탕이 밝혀내고 있는 바, 1949년 12월 25일에서 1950년 1월 22일 사이에 예전에 스승이었던 쟝 라크로와에게 보낸 72페이지나 되는 장문의 편지에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설명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헤겔적인 관념을 맑스에게 덧씌우는 이뽈리트를 비난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년 서문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청년 알튀세르는 맑스가 공산주의를 역사의 종언--변증법과 모순들이 보편적인 조화로 나아가면서 사라지게 될 어떤 영역의 종언--이 아니라, 전사(pre-history: 前史)의 종언--역사적으로 결정된 경제적 소외/착취의 종언--으로 사고하였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종언'과 관련된 문헌들을 섭렵하면서, 페리 앤더슨(1992)은 '역사의 종언'을 프랑스에 전파하는 데 있어 쿠르노(Cournot)가 수행한 역할을 논의하고 있다. 그가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있는 것은, 쿠르노가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의 '역사적 종언' 비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알게모르게'란 의미는 알튀세르가 쿠르노를 지나가면서 슬쩍 단한번--긍정적으로--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971). 최근 엠마누엘 테리(E.Tarray
1992)의 논문은, 마치 파스칼적인 모험과도 같이 알튀세르가 역사유물론을 전화시키고 공산주의에 개입하는 데 미친 쿠르노의 은밀한 영향력을 표면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알튀세르적 역사유물론은 철학적으로 역사주의(경제주의적이든 인간주의적이든)가 아니다. 후기 알튀세르의 범주를 사용하자면 역사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서, 논란많은 소외(agonistic
alienation)--원시공산주의에서 계급사회로의 하강--도, 소외의 평온한 승화(irenic sublation)--기원 속에 맹아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없는 텔로스의 실현--도 아니었다. 역사적 과정의 복합성을 가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보증의 철학'이 아니라, 역사적 우연의 이론이었다. 이것의 정치적 함의는 명백하였고, 마침내 도출되었다.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의 구성적인 복합성은 역사의 환원불가능한 복합성과 조응한다. 알튀세르가 의미한 바는 반유토피아적인 공산주의였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뒤르케임의 기능주의와 '문명과 그 욕구불만들'(cf. Freud 1973)에서의 프로이트적인 리얼리즘을 결합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전망과 명백히 상치되며, 암묵적으로는 '정치의 종언'(엥겔스의 {반듀링론}과 레닌의{국가와 혁명}에 그려진 생시몽적 '사물의 관리') 이라는 기획이 필요치 않았다.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배후에 있는 충동을 헤아리기 위해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진정한 실천적 인간주의에 권위를 부여한 유일한 (입장)이었다는 알튀세르의 과잉된 주장({미래})을 승인할 필요는 없다. 옳든 그르든, 알튀세르의 공산주의는 스스로를 온건한 그러나 엄혹한 목적에 묶어 두었다. 즉 지상에 천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지옥을 뿌리뽑자. 달리 표현하자면 그것은 (프로이트가 인간의 조건에 부여한 '공통의 불행'을 배제하지 않고) 인류의 세속적인 유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적 인간주의에 대한 그의 투탁은 엄격한 이론적인 언명들로 악명높은 한 저작 속의 몇몇 미려한 인간주의적 문구 속에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알튀세르의 장례에서 데리다가 인용한 것--는 알튀세르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를 의미있는 독자성을 가진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렇다, 우리는...우리의 동의없이 우리를 지배하는 동일한 신화들에 의해, 동일한 테마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체험되는 동일한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어떤 역사(History)에 의해서도 사라지지 않는 시간 앞에서, 동일한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동일한 빵을 먹고 있다. 우리는 동일한 분노, 동일한 반역, 동일한 광기를 가지고 있다(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늘 임박한 듯 서성이고 있는 기억 속에서는). 그렇다, 마치 억척어멈처럼, 아주 가까이, 바로 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우리 모두 치르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끔찍스러운 맹목성, 눈 속의 재와 입안의 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새벽과 밤을 같이 나누고 있으며, 동일한 심연, 즉 우리의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이것이 모든 일이 시작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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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2000) '아내폭력'경험의 성별적 해석에 대한 여성학적 연구-가족 내 성역할 규범을 중심으로
이경아(2000) 모성의 사회적 확장에 관한 탐색적 연구 -대안교육운동에 참여하는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안윤정(2000) 여성가장 실업대책에 대한 비판적 연구 -실직 여성'가장'의 경험을 중심으로
조주은(2002)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가족의 가정중심성(Domesticity)에 관한 연구 : 울산시 H사 자동차 공단 집단 거주지를 중심으로 
허정은(2002) 여성 한부모의 힘기르기(enpowerment)와 지지 집단 형성 과정에 관한 연구 
나성은(2002) 부계(夫系) 가족 내 노인 '보살핌'과 여성 경험에 관한 연구 
심경미(2002) '비혼(非婚)' 여성에 관한 연구 : 30대 중반 이후 40대 여성의 경험을 통해 본 비혼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문화적 요인을 중심으로
조혜련(2003) 저소득 여성의 한부모 노릇(single parenting)에 관한 여성주의적 연구  
이동옥(2003) 여성들의 노후준비와 자원접근성에 관한 연구

▶ 생태주의

전우경(1997) 생태여성주의에 대한 일 연구 
박경(2003) 새만금지역의 여성 삶과 갯벌의 관계에 대한 생태여성주의적 접근 : 부안 '그레'마을 여성들의 '갯살림'을 중심으로

▶ 여성정책/ 여성조직 

한정자(1983) 여성단체 교육 프로그램 분석 및 여성 의식화교육에 관한 연구
안혜경(1997) 모성관련법률에 나타난 평등개념에 관한 연구
장현정(1998) 재산분할청구제도에 대한 여성학적 연구 -추상적 전제와 구체적 조건
박진영(1998) 여성의 조직활동 참여 요인에 관한 연구 -병원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김화숙(1999) 여성의 사회적 저항 경험에 관한 여성주의적 접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어머니 활동을 중심으로
김현정(2000) 여성운동과 국가의 관계에 관한 연구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운동을 중심으로
김소연(2000) 지방자치단체의 여성정책에 관한 연구 -성인지적 정책 추진의 문제를 중심으로
채혜영(2002)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여성자활사업의 방향에 관한 연구 : 자활후견기관 자활근로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국미애(2003) 직장 내 성희롱 규제의 실효성 제고를 위한 사용자 책임 강화 방안

▶ 북한여성

김정미(1999)  탈북여성의 정체성 변화에 관한 연구 김정미
정추영(2001) 탈북여성의 군사적 경험을 통해 본 북한의 군사화와 성별 위계에 관한 연구 
이새롭(2002) 북한 이주 여성을 둘러 싼 사회적 통념과 선택적 협상에 관한 연구
민지원(2003) 국제협약상 난민자격 결정기준으로서 '젠더'박해와 그 근거에 관한 연구 : 북한 여성의 난민자격에 대한 성인지적 해석을 중심으로

▶ 섹슈얼리티

박순주(1996)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인식에 관한 연구
원미혜(1997) 한국사회의 매춘여성에 대한 통제와 착취에 관한 연구
한설아(1998) 여성의 외모 관리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 -다이어트 경험을 중심으로
이효희(1998) 십대여성의 성적서비스 경험에 관한 여성주의적 접근 -유흥업소 경험을 중심으로
권수현(1998) 남성성과 성폭력간의 관계에 관한 연구-청소년 성폭력 가해자를 중심으로
윤세정(1999) 온라인 성폭력에 대한 여성학적 접근 -PC통신 채팅경험을 중심으로
백재희(2000) 외국여성의 한국 성산업 유입에 관한 연구 -기지촌의 필리핀 여성을 중심으로
안수진(2002) 성별화된 폭력으로서의 스토킹 연구 : 구애형 스토킹 피해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최원영(2002) 낙태 경험을 통해 본 '미혼' 여성의 섹슈얼리티(Sexuality) 인식 변화에 관한 연구
김현경(2003) 프로젝트로서의 '연애'와 여성 주체성에 관한 연구 : 여자 대학생의 경험을 중심으로
배지선(2003) '성폭력' 개념 확장과 '성폭력' 경험 인식 과정에 관한 연구 


▶ 여성노동

이수자(1983) 한국 영세 제조업 부문의 성별노동분업 연구 -평화시장 의류봉제 공장의 사례를 중심으로
강남식(1985) 한국 여성 농업 노동자 계급에 관한 일연구 
양애경(1985) 한국 여성 저임금의 경제구조적 배경에 관한 일 연구 -70년대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홍영주(1985) 다국적 기업의 여성노동에 관한 일 고찰 -전자업계 사례를 중심으로
허향(1985) 직장여성의 직무수행 동기 및 직무행동에 관한 일 연구 -성차별적 근무조건과 직무에 대한 자부심이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장경선(1996) 전산편집직의 '여성화'에 관한 연구
이재인(1997) 공식통계에 대한 여성학적 재검토 -우리나라 노동력 조사를 중심으로
정형옥(1999) 고학력 여성의 '하향취업'에 관한 연구 
정금나(1999) 고용에서의 성차별판단기준에 관한 비판적 연구 -전화교환원 정년차별 판례를 중심으로
이은아(1999) 기업내 남성네트워크과 여성배제에 관한 연구
김명숙(2000) 연봉제 도입을 통해 본 능력주의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 
김지영(2000) 대학내 취업지원체계의 여성배제구조
윤경자(2000) 금융보험업의 세계화와 여성노동 이미지의 정치경제학 
한승희(2000) 고용상의 간접차별 판단기준에 관한 연구 
주희진(2000) 여성의 기업활동에 관한 연구 -창업자원과 환경적 영향요인을 중심으로
정경아(2000) 여성주의적 직무평가를 위한 연구 -청소원과 경비원의 직무비교를 중심으로- 정경아
최은영(2001) 특수고용형태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에 대한 연구 : ID 골프장 캐디의 노동경험을 중심으로 
김창연(2002) 여성에 대한 직장 내 폭력의 은폐기제와 고용차별에 관한 연구
이진아(2003) 경력개발에서 여성의 자신감에 관한 연구 : 멘토링시스템 참여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 문화

윤자영(1997) 포르노 재현물에 대한 여성의 경험에 관한 연구  
엄연수(1997) 로맨스문화를 통해 본 여고생의 성의사회화에 관한 연구 
이선영(1999)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여성배제구조와 저항에 관한 연구 -PC통신을 중심으로
민가영(2000) 10대여성의 가출문화에 관한 연구 -일시*도피적 가출을 중심으로
김은실(2002) 하자 알바서바이벌게임 참여자를 통해 본 십대여성의 정체성 연구
김나연(2002) 여성의 스포츠 활동의 통해 본 성별정치학 : 팀 스포츠(Team Sports)를 중심으로 
황금희(2002) 여성주의 매체의 정치학과 딜레마에 관한 연구  
신라영(2003) '팬코스' 활동을 통해 본 10대 여성의 주체 형성 과정 연구


▶ 여성학 이론

이윤경(2003) 보살핌 윤리가 갖는 의미에 관한 연구 :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의 논의를 중심으로

▶ 여성사

다바타 가야(1996)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 여성들의 삶과 식민주의 경험에 관한 연구
이정주(1999) 제주 '호미'마을 여성들의 생애사에 대한 여성학적 고찰 -4. 3 경험을 중심으로
유정미(2001) 국가 주도 발전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험에 관한 연구 : 새마을부녀지도자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임인숙(2002) 일제 시기 근로정신대 여성들의 정신대 경험 해석과 의미화 과정에 관한 연구
허나윤(2000) 199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 -'위기'담론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을 중심으로

▶ 군사주의/ 평화

권오분(2000) 군대경험의 의미화과정을 통해 본 군사주의 성별정치학 -남녀공학대학 사례를 중심으로
김현영(2001) 병역의무와 근대적 국민정체성의 성별정치학 
김지항(2002) 1차대전기 여성주의와 평화운동의 연계에 관한 연구

▶ 교육 

유은주(2000) 교사의 교육경험을 통해 본 학교성교육에 관한 여성주의적 접근
정미경(2000) 일제시기 '배운 여성'의 근대교육 경험과 정체성에 관한 연구 
백종주(2001) 저학력 비문해 여성의 경험세계에 관한 연구 : 성인대상 한글교육을 받은 30-40대 여성을 중심으로

▶ 정치
이춘호(1985) 여성의 정치참여에 관한 연구 -정치조직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 여성학 이론
 
김혜경(1985) 가사노동 이론에 관한 연구 -여성해방론에서의 접근을 중심으로
이준원(2000) 공동체주의에 관한 여성주의적 연구 -'공동체'와 '자아' 개념을 중심으로

▶ 종교

김경애(1983) 동학, 천도교의 남녀평등사상에 관한 연구 -경전, 역사서, 기관지를 중심으로

▶ 레즈비어니즘

김지혜(1997) 레즈비언/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본 서구 레즈비언 이론의 발전과정과 역사적 의의에 대한 연구

▶ 장애여성

김은정(1999) 장애여성의 몸의 정치학 -직업경험을 중심으로 한 생애사 연구

▶ 여성문학

정정희(2000) 1990년대 여성작가 소설에 대한 비평담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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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 Wally Secombe
[83] Women of Algiers / Anya Bstock
[89] Women's Domestic Labour / Jean Gardiner
[89]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 a critique
     / Margaret Coulson & Branka Maga  & Hilary Wainwight
[93] Psychoanalysis and Feminism / Richard Wollheim
[96] 'Psychoanalysis and Feminism' : rejoinder to Wollhe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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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The Quota Demand and Feminist Politics / Frigga Haug
[210] Radical Environmental Myths : A Gender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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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Gender, Experience and Subjectivity : Tilly-Scott Disagre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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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Man Bad, Woman Good? Essentialisms and Ecofeminis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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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An Ecofeminist Bio-Ethic and What Post-Humanism Really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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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In the Tropics There is No Sin : Sexuality and Gay-Lesbian
     Movements in the Third World / Peter Dru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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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Bisexuality, Capitalism and the Ambivalent Legacy of Psycho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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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A Rejoinder to Iris Young / Nancy Fraser
[224] The War against Feminism in the Name of the Almighty : Making
     Sense of Gender and Muslim Fundamentalism / Janet Afary
[224] From Inequality to Difference : A Severe Case of Displac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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