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인 알튀세르 읽기를 위하여
서 영 표
국사 90
{민중정치학생연합} 교육국장
1. 글을 쓰기 전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자신을 평가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은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평가하는 것도 포함한다. 지금 알튀세르의 열풍을 평가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상태의 것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일은 항상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닐까?
이 글에서는 알튀세르의 이론자체를 문제삼지는 않겠다. 중심적인 논의주제는 알튀세르를 한국사회에 적용하면서 새로운 이론체계를 형성하려는 운동세력(특히 학생운동)들이 부딪혔던 현실의 벽은 무엇이었나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점더 확장시 켜서 외국의 이론을 수입하는데서 나타나는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필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이론풍토를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이 글은 학생운동가들의 학습커리 속에 깊숙히 침투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필자가 학생운동 전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필자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겠다.
2. 천박한 '알튀세르주의자'의 자기비판
"어떤 것을 학습해야할지 모르겠다." "책을 읽어도 나의 관점이 없이 읽게된다." 요즈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권위의 해체, 그 어떤 이론도 사상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학습을 한답시고 구름위를 떠다니고 있다.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막상 다가섰을 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무엇을 읽든 지적 호기심은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운동의 일치'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알튀세르'도 지금 우리곁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이론들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 중의 다수가 알튀세르를 통해 맑스를 읽으려고 한다. 즉 알튀세르는 우리곁을 단순히 지나쳐가는 이론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알튀세르'를 읽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또한 이문제는 단순히 알튀세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답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나 자신의 사상적 자기정정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맑스주의 위기'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운위되면서, 맑스주의의 사상적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면서 나는--우리 모두가 그랬다--나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보호막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우경화되어 버리는 것도, 맑스-레닌주의라고 씌여진 낡은 깃발만을 움켜쥐고 그것의 올바름만을 강변하는 것도 위기의 시대에 내 자신을 지탱해줄 수 있을 것같지가 않았다.
무언가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맑스주의자로서 자신을 재무장시키기 위해서 고민했다고 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사상적인 무기력함 속에서 자기자신을 겨우겨우 지탱해줄 자기 정당화의 수단을 찾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알뛰세르의 몇몇 저작에서 얻은 지식을 근거로 나름대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뭔가 손에 잡힌 것이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맑스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그 위기를 전면화 함으로써 교조주의에 의해서 억압되어 왔던 사상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가 무오류의 과학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맑스주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생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를 '위기론자'라고, 맑스를 제대로 학습하지도 않고 맑스주의의 난점과 공백을 떠벌이는 줏대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누구도 '맑스주의는 맑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현실설명능력과 그것에 대한 대안의 제시) 한계를 내어보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은 앞의 비판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는,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많은 사람들은 지탱해줄 아무런 지반 없이 위기의 전면화만을 외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을 시작했던 것이다. 현실은 우리에게 자기비판과 자기정정을 강요한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맑스주의 틀 내에서의 맑스주의의 재구성'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맑스주의 틀 내'라는 것은 이론적인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천활동에서의 맑스주의적인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생각은 위기돌파의 방향을 제시한답시고 맑스주의적인 정치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효과를 가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극단적으로 평가해보자. "'위기의 전면화', '맑스주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이 말이 가진 효과는 사람들이 더 이상 맑스주의를 실천활동의 지침으로 인정하지 않게 한
것이었다. 결과는 목적없는 정치활동을 만들어냈고 사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천에서도 구름 위를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활동'이 인구에 회자되었지만 기본적인 관점없는 새로움이라는 것은 부르조아에게 투항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맑스주의의 재구성'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버렸다. 맑스주의는 책상머리에서 이론가들에서 재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활동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실천활동으로서 의미를 상실한 맑스주의가 재구성되어지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하나 이론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맑스주의를 재구성하겠다는 목표 아래 많은 논자들의 글을 읽는다. 알튀세르, 그람시, 발리바르. 그런데 애초에 그들의 텍스트를 읽게 된 동기는 맑스주의에 긴장력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한 우회로의 설치였다. 하지만 이들의 텍스트를 통과하는 도중에 벽에 부딛히게 된다. 그들의 텍스트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어줍지 않은, 천박한 수준의 알튀세주의자, 그람시주의자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또다시 우회로를 설치할 것인가? 실제로 그러한 경우도 많다. 알튀세르를 이해하기 위해서 프랑스 현대철학을!! 아카데믹한 이론의 수렁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지어다!!
이제 위기의 시대에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수단은 어디에 있는가? 또 한번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3. 그러나 아직도 알튀세르?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전제는 맑스주의가 공백과 난점을 기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이론적 작업에 도그마를 깨고 사고를 확장하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맑스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부정적 효과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러한 부정적 효과를 확대시키고 우리를 벗어나기 힘든 궁지에 몰고 있는 것은, 부르조아에 의해 맑스주의에 대한 전면공세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 자신도 맑스주의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일 것이다. 이론 영역에서의 일보후퇴는 이보전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한 번의 후퇴를 불러올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 우리에게 강제한 자기비판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맑스주의의 재검토는 단순히 알튀세르를 쫓아서 위기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먼저 학습의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는 이론을 위한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활동의 지표를 마련하기 위해서 학습이 필요한 것이다.(이 말을 실용주의적이라고 오해하지는 않기를!) 그렇다면 이사람 저사람 텍스트를 옮아다니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만족하거나 사상이론적인 혼란을 핑계삼아 아예 학습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자세는 버려야한다. 그리고 맑스와 레닌을 비롯한 많은 사상가(실천가라고 말하고 싶다)들의 텍스트를 검토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원전을 그대로 암송하는 것은 아무 것에도 쓸데가 없다.
맑스와 레닌의 저작은 정치적이다. 그것이 경제학에 관한 것이든, 철학에 관한 것이든, 실제로 정치적인 저작이든 모두가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텍스트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그들이 처했던 구체적 상황과 그것에 개입하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이론이다. 알뛰세르가 제한된 이론이라고 맑스주의를 평가한 것은 맑스주의는 언제나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개입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발전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 정세의 개입을 위하여 때로는 구부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경직되기도 하면서, 그리고 매 시기마다 자신안에 존재하는 이론적인 제 난점을 전면화시키면서 정치적 개입은 진행된다. 동시에 난점들은 이 과정 속에서 극복되어진다.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자기비판의 시작은 알튀세르를 따라서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을 시작하고 만 자신이었는데, 그 비판의 끝에 서 있는 내 자신의 지반은 역시 알튀세르였던 것이다. 즉 현실 긴장력을 회복하고 그 속에서 맑스주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시도를 하고자 했지만 그것을 지금 당장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알튀세르-발리바르를 통하는 것이 가장 확실해보였던 것이다. 이제 문제는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정말 쓸데 없는 고민과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알튀세르(서구맑스주의)인가 아니면 맑스와 레닌인가? 이러한 혼란스러운(불필요한) 대립구도는 필자의 머릿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로 시작되었던 고민은 이제 나는 '알튀세르주의자'인가라는 자문과 그것을 정리해보려고 하는 필사적인 고민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주의와 나', 그리고 '현실과 나'가 아니라 '알튀세주의와 나'가 되어버렸다. 이제 막다른 골목인가?
4. 알튀세르가 남긴 것은?
이번에는 결론부터 내린다음에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보자. '알튀세르를 읽고 알튀세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알튀세르주의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알튀세르를 처음 대했을 때부터 밑에 깔려 있었던 생각이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을법한 말이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강조하는가?
알튀세르를 읽는 것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려고 했지만 우리의 관념속에는 끊임없이 맑스주의는 완결된 체계를 가져야만한다는 강박관념이 스며들어 있다. 맑스와 레닌의 사상체계를 신봉했던 우리들로서는 그것은 '완결된 체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완결된 체계를 원하게 된다. 그람시, 알튀세르는 이러한 허구적인 관념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곳에서 '그람시주의', '알튀세르주의'는 자신의 존립기반을 가진다. 그람시와 알튀세르는 원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마치 맑스는 스스로 '맑스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했지만 맑스주의운동의 역사는 맑스주의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졌고 결국 맑스주의를 타락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람시 열풍, 특히 알튀세르의 열풍이 우리에게 시시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론 영역에서 극복해야할 지점을 명확히 해주었다는 것이다. 정리를 해보자.
알튀세르주의자로 지칭되는 사람들도, 그리고 알튀세르를 거부하고 정통의 입장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도 같은 지반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맑스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완결된 체계'로서의 알튀세주의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알튀세르의 이론이 완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완결된 체계이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이론체계! 단 하나라도 설명하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 없다!! 모두가 원하고 찾아헤매는 것은 이것이다. 결국 맑스주의는 악무한적인 사변적 논쟁으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비극일까? 아니면 희극일까? 알튀세르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테제는 '제한된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그말을 옮기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맑스주의,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는 전혀 제한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서 알튀세르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알튀세르는 위기를 완벽하게 설명해내지 못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맑스를, 그리고 알튀세르를 희극으로 때로는 비극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여기서 다음의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어떻게 이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원칙적인 수준에서 대답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렵지 않다.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개방적인 태도는 자신감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다원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면!) 자신감이 있다면 다른 모든 견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론과 %%론의 대립, ##주의와 **주의의 대립이라는 관념을 버려야할 것이다.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체계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사상투쟁이라는 단어는 이러할 때에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단 이것이 상대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관점으로 비쳐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 이점은 현실운동에 의해서 보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타의 견해들은 단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운동의 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무슨무슨 '주의'라고 매도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운동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즉 다양한 운동의 영역과 그 영역을 운동의 전부로 생각하는 운동조류는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맑스주의는 자신의 생명력을 되찾고 대중운동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의 목표는 완결된 사상체계의 구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시기 구체적인 현실을 얼마만큼 정확히 분석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가가 관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지 그뿐이다. 알튀세르를 대안의 전부로 생각할 때 또 다른 늪 속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5. 우리에게 남은 것과 해야할 것
대단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제 정리를 해야할 것이다. 정리를 하면서 알튀세르의 열풍이 남긴 몇가지 교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번째로 현재의 이론풍토 속에서 '이론'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람시, 알튀세르를 읽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수입되는 과정이 대단히 실용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미봉책이라고 할까? 소련이 붕괴하고 맑스주의위기가 공공연히 운위되자 벌써 20년전에 맑스주의의 위기를 주장했던 알튀세르의 상품가치가 높아졌다. 합법정치공간이 넓어지고 억압보다는 세련된 이데올로기 공세로 통치전술이 바뀌자 그람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봉책으로 받아들였으니 얼마되지 않아 또 다른 미봉책을 찾을 수밖에!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는 이론풍토는 계속된 단절만을 초래할 뿐 이론의 발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두번째는 알튀세르의 맑스주의가 가져다준 기존관념에 대한 충격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대로 다분히 실용주의적인 이론의 수입이었고 한때 유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는 '스탈린주의적 맑스주의'에 찌들어있던 우리들의 관념에 유효한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를 이론적으로 평가하고 맑스주의 재구성 프로젝트에 흡수하는 것(알튀세르주의자가 아니라 맑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알튀세르를 읽는 것)은 새로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이 새로운 과정에 대해서 한마디만 더하겠다. 알튀세르의 작업은 화석화된 맑스주의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로부터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새롭게 재무장해
나가는 노동자 대중의 무기로서의 맑스주의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만 않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위기는 맑스주의가 그 내부에 가지고 있었던 이론적 난점들과 더불어 외부에서의 부르조아적 요소의 침투, 그리고 그것들의 혼합으로 인한 제반의 복잡한 원인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복원시킨다는 것이 맑스주의 내부에서 부르조아적인 요소를 가려 뽑아내는 것으로, 그리고 혁명적인 부분만을 남기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부르조아적인 요소일지라도) 제반의 문제제기를 흡수하면서 지속적인 자기 전화의 계획을 내요는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는 이론 내적인 작업일 수가 없다. 이론 내적인 작업으로 한정할 경우 맑스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의 일람표를 만드는 작업 이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자신도 끊임없이 이러한 이론주의적 편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작업을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철학자로서의 개입'이라고 강조하거나 '철학은 최종심급에서 이론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의 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이러한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알튀세르라고 하는 철학자의 작업이 가지고 있었던 이론주의적 편향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튀세르를 읽고 인용하는 사람들에게서 확대재생산 된다.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태도가 '맑스주의의 위기'만을 되뇌이는 것을 가리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들리는 것은 맑스주의의 위기를 외치는 소리일 뿐 현실의 운동, 노동자 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 속에서 문제를 풀고자하는 노력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이론편향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알튀세르가 제기하고 있는 맑스주의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현실운동 속에서 풀 수 있는 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의 목표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맑스주의를 전화시키는 것이었다면 우리의 이론적 작업의 목표는 알튀세르(알튀세르'만'은 아니다)를 통해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일 것이다. 맑스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었고 알튀세르도 '알튀세르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텍스트를 읽는 우리들이 그들을 맑스주의자, 알튀세르주의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맑스, 엥겔스, 레닌, 그람시, 알튀세르, 그밖에 무수한 사상가들의 이론을 맑스주의, 레닌주의, 그람씨주의, 그리고 알튀세르주의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 맑스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통스러웠던 수 많은 논쟁을 받아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에 앞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 정세에 개입한다. 부르조아의 정치적 개혁이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로 인정받고 있고 진보진영은 사상적으로, 실천적으로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여기에 우리는 정치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맑스-레닌주의라는 무기는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그 무기는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조금씩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주의 자체의 불완전함을 두려워하는 자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부르조아에게 투항을 하는 것과 영원한 교조주의자로 남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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