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강의에서 우리가 출발하는 물음은 '맑스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십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하지만 게 중에는 보다 생산적인 질문법도 있다.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를 통해 맑스주의를 다시 사고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또 무척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맑스(그리고 엥겔스나 레닌)이라는 개인, 혹은 한 시대의 사상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성(감성)과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언제나 동시대성을 갖고 발전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것이어야 존중과 적용, 전유의 가치가 있는 사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강의에서는 맑스 이후 맑스주의의 전개에서 여러모로 걸출한 인물인 안토니오 그람시를 통해 맑스주의의 특성을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맑스주의 전통 속에서 그만큼 여러 영역에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는 이도 드물다. 그는 맑스주의 정치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문화이론에도 막대한 기여를 남겼다. 그는 서구 맑스주의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반면, 가장 정통의 레닌주의자이기도 하다. 또 그는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 속에 있지만, 포스트 맑스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는 이론 구조를 제공한다.
때문에 그는 이 강의의 소재로도 적절해 보인다. 이 강의에서 맑스 이후의 수많은 맑스주의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예컨대 그람시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 나아가 맑스주의 자체를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1. 그람시라는 인물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1891년 이탈리아에 딸린 큰 섬인 사르디니아의 알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앓은 병 때문에 평생을 곱추로 지냈고, 이게 어쩌면 그에게 남다른 감수성과 통찰력을 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언어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11년 토리노대학에 입학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당(PSI)의 언론에 기고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5년에는 사회당의 일간지인 <전진(Avanti!)>의 토리노판 편집위원회에 결합하고 지역 사회당 주간지 <민중의 외침>에도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등 활동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1919년에는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 등과 <신질서(L'Ordine Nuovo)>를 '사회주의 문화비평' 주간지로 창간했고 이 편집팀은 사실상 하나의 정치집단으로서, 같은 해 벌어진 토리노 피아트공장 파업에 결합하면서 공장평의회 운동을 주도한다. 1921년에는 몇몇 이들과 함께 소비에트의 프롤레트쿨트와 제휴하여 프룰레타리아 문화원을 설립했고, 사회당의 리브로노 당대회에서 공산주의 분파가 탈당함에 따라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PCd'I)의 지도부로 참여하게 된다.
1922년,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코민테른 대의원으로 지명되어 소련으로 떠났고, 이후 2년간 소련에 체류하면서 배우자가 될 줄리아 슈히트와 만났다. 10월 28일, 무솔리니가 '로마행진'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1924년 귀국하면서 공산당의 새 집행부를 이끌게 된 그람시는 이후 몇 년간 무솔리니의 파시즘 하에서 결연한 투쟁을 전개한다. 공산당의 서기장을 맡게 된 그람시는 당의 '볼셰비키화', '통일전선' 정책의 적용, 세포에 기반한 당의 재구조화 등을 요구한다.
1926년에는 이탈리아 공산당 정치국을 대표하여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내어 볼셰비키 당내의 격화되는 분파투쟁에 우려를 표한다. 같은 해 11월 파시스트 체제는 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그와 다른 공산당 의원들을 체포한다. 다음 해 그람시는 특별재판소에 의해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후 17년동안 그는 옥중에서 32권의 노트로 구성된 {옥중수고}를 집필한다. 1937년 4월, 국제적 켐페인에 의해 출옥을 보장받게 되었으나, 이미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같은 달 27일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한다.

그의 생애가 이렇듯 극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를 후대가 기억할 주된 이유는 아니다. 이론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고전적 맑스주의의 한 정점을 이루는 인물이라는 것이 훨씬 중요한 평가지점이다.
1920년대 말 이후 러시아혁명의 타락과 함께 거의 모든 코민테른 공산당이 스탈린주의화되면서 페리 앤더슨이 지칭한 바와 같은 '서구 맑스주의'는 현실정치에서 급속히 후퇴하게 된다. 이와 같이 앞이 막혀버린 상황이 계속된 결과 역사유물론의 전통에서는 가장 중심적인 영역으로 여겨졌던 문제, 즉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경제운동법칙에 대한 정밀한 탐구,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적 기구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이행을 위한 계급투쟁의 전략 등에 대해서는 고의적인 침묵이 행해지게 되었다.
앤더슨은 그람시가 이러한 전반적인 추세에서 유일한 예외였다고 평가하는데, 논리적으로 볼 때 그만이 고전적 맑스주의의 유산을 규정짓는 유형, 즉 이론과 실천의 혁명적인 통일을 자신 안에서 구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람시 자신의 옥중 저술은 장기간에 걸친 파시즘 치하에서 잉태한 것이었다. {수고}가 처음 발견되어 간행된 것은 1947-49년 사이였는데 그 저술이 가져다 준 충격은 PCI 내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람시의 사후에 그의 저작이 이탈리아 공산당의 경전으로 취급되게 되자 그가 이탈리아 맑스주의에 이론적으로 남겨놓았던 유산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60년대 영어권과 불어권에서 그람시의 '재발견'될때까지 계속되었다. 신좌파와 유로코뮤니즘, 남미의 변혁운동까지 광범하게 그람시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물론 그의 기여에 대한 평가와 논쟁, 그리고 현실 운동 속에서의 전유라는 과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2. 이론적 기여

1) 지속적인 영향
1960년대 이후, 그리고 1980년대 말의 동구권 몰락 직후 그가 다시 주목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의 강점을 철저히 인식했던 거의 유일한 혁명가였고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을 이해하고 맑스주의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정치학의 영역을 구축한 독창적인 이론가였다.
다음으로, 그는 처음부터 "{자본}에 반한 혁명"인 러시아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동시에 혁명 후 소비에트 사회를 수동혁명의 한 형태로 비판한 스탈린주의 비판자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소연방의 '역사성'을 주류 좌파와는 다른 통시성을 가지고, 비경제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한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일부이되 그 변방이었던 이탈리아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통찰해냄으로써 선진국의 혁명모델과 제 3세계 혁명론에 다같이 풍부한 함의를 던져준 사상가였다.
그람시 자신의 사상과 이론의 폭 만큼이나 그의 영향력은 네오 레닌주의자로부터 포스트 맑스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걸쳐있다. 국가론에 정통한 정치학자 크리스틴 부시-글룩스만이나 역사학자 존 카메트가 그람시 좌파에 해당한다면 조셉 페미아, 보비오, 라클라우 등은 그람시 우파라 할 수 있겠다.
에드워드 P. 톰슨이나 에릭 홉스봄같은 역사학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쓰는 작업 속에서 그를 재발견하고 그들의 작업 속에 창조적으로 수용해냈다.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에서 그를 간략히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만, 페리 앤더슨이나 스튜어트 홀 등 NLR지 안팎의 인사들은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에 입각하면서도 그람시의 개념들을 적극 전유하고자 했다. 그람시의 사상은 플란차스의 국가이론으로 한 정점을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에는 문화연구(윌리스), 조절이론(제솝), 계급형성이론(뷰리웨이) 등 많은 영역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2) 다양한 면모
 그의 사상이 이토록 다양하게 해석되고, 여러 방면의 성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론틀이 갖는 포괄성과 깊이, 그의 상황적 고려의 복잡성 때문일 것이지만, 그의 사상이 갖고 있는 여러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칼 보그는 그람시의 지적, 정치적 발전을 네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1913-1919년 사이 이탈리아 사회당의 극적 고양과 뒤이은 퇴조의 시기, 1919-20년 사이에 <신질서>운동을 이끌면서 토리노의 공장점거와 평의회 운동 속에서 노동자들의 자발적 정치투쟁을 이론화하고 정치지침을 제공하던 시기, 그리고 1921-26년 사이로 PCI의 중앙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는 보르디가와 같은 좌익 고립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파와 대항하면서 반파시즘 투쟁에 몰두하던 시기, 끝으로 1926년 투옥 이후 죽을 때까지 정치적 고립과 가족과의 불화를 감내하면서 방대한 주제에 걸친 이론작업을 진행하던 시기.
칼 보그는 이 네가지 시기가 대략적으로 그람시의 세가지 얼굴, 즉 평의회 공산주의 내지 혁명적 공산주의자라는 면모, 레닌주의자로서의 면모, 서구 맑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는다고 이야기한다. 1919-20년 사이의 붉은 이년(Biennio Rosso)은 그로하여금 평의회 경험을 통해 대중민주주의적 충동들에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함의를 부여할 수 있는 사회적 변형의 개념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이 시기의 그는 소위 과학적 유물론의 결정론적 자세를 비판하면서 혁명적 정치의 주도성은 대중의 자율적 활동으로부터 성장해나와야 하며, 지도자들의 대중들의 '후렴' 이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람시가 품고있던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상은 평등주의적이고 비관료적인 사회와 권위관계들의 영역을 점차 확장시킴으로써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를 예시(豫示)할 수 있는 대중투쟁의 유기적 과정이었다. 이러한 '예시적(prefigurative)' 차원은 동시대의 평의회 공산주의와의 어떤 상응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평의회운동의 실패 및 파시즘의 흥기와 함께 그람시의 입장은 변화하여, 갓 태어난 PCI의 지도부를 맡게 된 1921년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전위주의자 레닌에 좀더 가까이 이동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르디가와의 논쟁에서 그는 엄격한 기간요원들의 조직보다는 대중적 정당을 지속적으로 옹호했으며, 레닌이 소비에트 정당 내의 분파를 금지시켰을 때 내부적 민주화를 지지했고, 무엇보다도 당의 관료화에 대한 견제로서 노동자 농민위원회들의 성장과 세포의 광범한 구축을 고무했다. 이는 분명 평의회 운동 때 형성된 관점일 것이다.
그람시의 점증적인 자코뱅주의는 {옥중수고}로 이어지며, 여기서 레닌은 총체적 목적을 위한 정치적 행동의 우위성을 확신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사상가로서, 마키아벨리의 현대적 상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현대의 군주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위해 가동되는 전투기구라기 보다는 '진지전'의 일부로서 시민사회 내에서 이데올로기적 교육학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집합적 지성'에 가까운 것이다.
한편 그에 대한 '서구 맑스주의자'로서의 해석은 우선 {수고}에서 발견되는 관심사들, 즉 이데올로기적 지배, 문화적 투쟁, 의식 등과 같은 테마들에 대한 논의가 발굴되면서 비롯되었다. 또 총체성, 변증법, 실천 등과 같인 신헤겔주의적 주제들이 그를 다시 읽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유로코뮤니스트로서의 면모까지 그에게 덧씌워지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의 면모 또는 '혐의'는 - 90년대 말 서구 좌파의 지형으로서는 이조차도 좌익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 확실히 부적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가 그람시의 통합된 측면들의 부분들이며, 그의 지적 정치적 일관성은 여전히 추적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알튀세르가 맑스를 청년 맑스와 후기 맑스, 또는 헤겔적 맑스와 과학적 맑스로 나눈 것과 같은 식으로 그람시를 단계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3) 그람시의 맑스주의
옥중에서의 그람시는 검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작업하곤 했다. 그래서 트로츠키같은 인명은 '브론슈타인'으로 표기되었고, 맑스주의는 '현대의 이론' 또는 '실천의 철학'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표기는 단지 검열의 문제만으로 이야기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실천의 철학'이라는 언급이야말로 맑스주의에 대한 그람시의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이해를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과 인간의 활동을 바꾸는 것, 즉 자기변화의 동시발생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맑스의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주장을 가장 전면적으로 파악한 맑스주의 사상가였다. 그러나 이 실천은 개인적인 맹목적인 실천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의식적인, 무엇보다도 집단적인 실천이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이 실천은 '정치'와 완전히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람시는 "인간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모두 나름대로 철학자"라는 유명한 언급을 남겼는데, 하지만 대중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이고 단편적인, 때로는 모순적인 의식의 요소들(상식)은 그들의 집단적 의지를 행동화시킬 수 있는 비판적이고 체계적인 자각으로 변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세계관은 고립된 개인들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지가 형성되려면 그 출발점 및 확산의 계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것이 정치의 매개이다.
결국 그람시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곧 대중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대중에게 교조를 주입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즉 모든 사람은 철학자이며, 그들의 상식(common sense) 속에서 양식(good sense)를 혼란스러운 편견 등과 분리해냄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확대 발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지식인을 겨냥한 투쟁이다. 그람시는 전통적인 지식인, 또는 부르주아의 전문가들과 구별되는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존재를 개념화한다. 유기적 지식인은 명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 실천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항상적 설득자'이자, 노동자계급 내에서 직접적인 조직성원이 되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획득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길고 힘든 과정이라는 사실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들 자체가 이념적 발전과 정치적 동맹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적 블록(historic block)'의 중요한 자원이며, 또한 블록 형성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람시는 대중의 집단적 이성을 신뢰했지만 결코 자생성을 무조건 찬양하지도 않는다. 대중의 자생적 감정과 현대의 이론(맑스주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오직 양적인 정도의 차이만이 있으며, 한쪽으로부터 다른 한쪽으로, 또 그 역으로 전화할 수 있는 상호 환원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룩셈부르크의 대중주의, 루카치의 관념적 역사주의 또는 레닌의 '외부로부터의 주입'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에는 언제나 당과 유기적 지식인의 적극적 활동과 변증법적 과정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람시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진지전'이라 표현되는 장구하고 어려운 혁명의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어떤 사회주의'와 함께 '어떻게 건설'되는 사회주의인가라는 두가지 핵심적 물음을 함께 제기하고 대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파괴와 건설의 과정이자 의식적인 교육과 조직의 과정이다. 자본주의 전복, 또는 해체에 관한 노동자혁명의 파괴적인 측면보다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측면에 대한 유다른 강조는 그람시에게 일관되고도 특징적인 것이었다.

4) 현대의 군주
"{자본}에 반하는 혁명"이라는 말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었다고 생각되던 러시아에서 세계제국주의의 약한 사슬을 끊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하게 된 예외적 상황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적극적 행동주의와 지도력 -- 즉 '자코뱅주의' -- 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언급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자코뱅주의를 재평가하면서, 도시와 농촌,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는 '국민적-민중적(national-popular)' 연합의 지도력을 뜻하는 적극적 의미를 이 용어에 부여했다. 이는 얼마간 레닌의 [사민주의자의 두가지 전술]에 대한 독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민적-민중적 지도력이라는 것은 그람시에게 있어서는 리소르지멘토의 부흥, 그리고 파시즘과의 투쟁,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의 역할이라는 것과 연관된 맥락이었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연구를 통해 당 문제에 접근했다. 마키아벨리의 중요성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통일국가의 창립을 위한 국민적 집단의지를 어떻게 창출하는가를 보여주는 선구적인 시도를 제시했다는 점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조숙한 자코뱅"이었고, 그는 '군주'라는 신화적 인물을 통해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인 지도력, 전략 및 전술을 설명했다. 그람시는 새로운 노동자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그와 같은 정치적 지도력, 즉 '현대의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의 군주는 실재하는 인간, 구체적인 개인일 수 없다. 그것은 집단의지가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유기적인 조직체, 사회의 한 복합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이런 조직체를 제공해왔는데 그것이 바로 정당, 즉 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맹아가 모아지는 최초의 세포인 것이다.
그람시는 당이 취해야 할 '이중적 관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잘 알려진 '강제와 동의'의 결합에 대한 인식이다. 이중적 관점은 가장 초보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들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결국 마키아벨리의 반인반수(centaur)라는 풍유와 관련되는 것이다. 반은 짐승이고 반은 사람, 그것은 힘과 동의, 권위와 헤게모니, 폭력과 문명, 개인적인 계기와 보편적인 계기, 선동과 선전, 전술과 전략 등의 차원이다. 이러한 차원들은 기계적으로 분리될 수도, 시간적으로 분리된 연속된 단계로 표현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당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유지 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풍부한 설명력을 제공해왔다.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야말로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의 또다른 측면이기 때문이다.

3. 논쟁적인 개념들

여기서는 그람시의 개념들 중 오용되거나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몇가지를 뽑아 본다.

1)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단지 '패권'이나 '주도권'이라는 의미로 남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람시의 저작 속에서 이 개념이 갖는 독특한 맥락은 무엇인가?
- 헤게모니 또는 'hegemonya'라는 개념은 러시아 노동운동에서 플레하노프의 저작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전통 속에서 이 개념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자신의 협소한 조합적 이해를 넘어서는 혁명적 자각과 정치적 의지를 형성할 필요성(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을 언급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그람시가 발전한 정치체제에서 이데올로기적 동의의 메커니즘을 묘사하면서 부여한 추가적인 의미는 갖고 있지 않았다. 레닌은 이 용어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빌어왔고, 제 3인터내셔널의 대외문서에서 사용했는데, 그람시는 확실히 여기서 원천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 용어는 19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지오베르티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이탈리아적 계보를 갖기도 하는데, 그는 이 용어를 이탈리아 통일과 관련하여 한 지방이 다른 지방에 대하여 행사하는 '도덕적 우월성'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 개념의 핵심적 특징들은 사회주의적 의식의 조직화에 있어서 교육과 문화의 역할에 대한 그람시의 초기 저작들에 뚜렷이 나타난다. 즉 그람시는 러시아-코민테른적 용법을 이탈리아에 독특하게 동화시켰던 것이다. 역으로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은, 이탈리아 부르주아지가 문화적 헤게모니적 우월성을 갖출때만 얻을 수 있는 민중의 동의없이도 어떻게 이탈리아를 지배하는가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 용어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리소르지멘토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산당이 나라 안의 모든 반대세력을 끌어모아야만 하며, 여기에 볼셰비키적 수단이 국민적인 도덕적 우월성을 얻기위한 지오베르티적 목적 내에서 결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2) 그람시의 저작에서 동구와 서구는 아래 표와 같이 대조적으로 분석되며 이를 두고 그람시는 '서구혁명의 이론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람시의 혁명이론은 발전한 선진국가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 그람시는 {수고}에서 유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동구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었고 시민사회는 아직 원시적이고 무정형적인 것이었지만,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국가가 동요할 때에는 당장에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국가는 단지 외곽에 둘러쳐진 외호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요새와 보루의 강력한 체계가 버티고 있었다."
그람시의 저작 속에서는 분명히 이러한 이항대립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한 메타포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가 발전한 선진자본주의, 또는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복잡한 시민사회가 성숙한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또 거꾸로 [남부문제에 대하여] 같은 저작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단절되어있는 남부와 부속도서 지방에도 어떻게 시민사회의 구조가 존재하며 이를 국민적-민중적 연합으로 지속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가에 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결국 '진지전'이라는 표현도 그람시가 혁명의 한 모멘트 못지않게 이중권력의 전 과정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사용한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3) 페리 앤더슨은 그람시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세가지 모델 사이에서 혼돈을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 최장집은 이를 단순한 모호성이나 이율배반으로 보기 보다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념 간의 역동적인 관계', 즉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한 형성과 발전과정에 따른 역사적 변화의 구도로 치환할 수 있다고 본다. 모델 1에서 정치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매개하는 독립된 정치지형으로서의 중요성을 갖는다. 임영일은 모델 2의 경우를 체제위기의 국면에서 국가가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시민단체와 노동조직을 직접적으로 관할(파괴 또는 관제화)하는 국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이 경우 정치사회 역시 형식적으로 존재하면서 국가의 관할 속에 놓일 뿐이다(후발자본주의의 파시즘체제나 제 3세계의 권위주의 또는 포퓰리즘 국가체제의 사례). 한편 모델 3은 시민사회의 계급관계가 정치사회에 온전히 투영됨으로써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와 구분되는 독자적 영역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필요가 없게 되는, 그리고 국가역시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와의 분리 정립의 의미를 굳이 지니지 않게되는 (그람시의 '통합국가') 헤게모니 국가의 성립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국가소멸의 이념형적 국면의 가장 현실적인 이론적 모델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국가와 시민사회를 이원적으로 대립시킨 모델에만 주목하면서 이를 소시민적 시민운동주의로의 필연적 경도라고 염려하며 시민사회/민중사회라는 대당을 제시했던 김세균의 논의는 협소한 것이었다.

4) 그람시는 자본주의가 공고화하면서 전투의 모델도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이동했다고 이야기하지만, 1차대전 이후의 군사학에서는 오히려 기동전 또는 전격전(Blitz Krieg)이 압도적인 관심대상이다. 또 진지전만을 고집하는 것은 급속도로 표변하는 현대자본주의에 오히려 먹히는 꼴이 아닌가?
- 실제로 진지전은 오히려 1차대전까지만 효력을 발휘했던 전술이다. 기동없는 진지전이란 현대전에서는 포격과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무모한 싸움일뿐이다. 또 90년대 초반, '진지전'에 대한 강조는 많은 경우 개량적 합법주의적 실천의 변명처럼 되어버린 감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그람시의 맥락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가 줄곧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시민사회라는 참호 또는 보루의 견고함, 즉 현대 자본주의 상부구조의 복잡함이었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이라는 투쟁전술을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람시 자신도 "군사적 기술과 정치 사이의 비교는 에누리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페리 앤더슨이 진지하게 정리하고 있듯이, 권력쟁취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최대한의 공격속도와 기동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오히려 현대의 진지, 참호, 보루, 도로, 보급망, 신속하고 돌발적인 상황전개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돌리는 것이 옳겠다. 그 사고 속에는 정당, 노조, 언론, 향우회 조직, 인터넷까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람시를 탈근대 또는 포스트모던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던데?
- Renate Holub은 그의 책 {안토니오 그람시 - 맑스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라는 책에서 그람시의 지식인 및 지식 개념에서 '차이의 화용론(differential pragmatism)'을 추출하고자 했다. 하버마스의 '보편화용론'과 대비되는 차이의 철학, 자생성의 철학을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는 그람시의 지식과 문화 개념들이 페미니즘이나 소수인종의 담론연구에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스튜어트 홀의 견해와도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람시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지독한 계몽주의자였다. 그는 대중의 능력, 의식의 복잡성을 이해했지만 그것은 대중적 집합적 '이성'에 대한 신뢰와 결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근대' 또는 '탈근대'로 딱지붙이기를 시도하기보다는 애초에 '모더니티의 확장'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게 나을 것이다.

# 보충 : 한국에서의 그람시 수용에 대하여

1) 소개의 편중성 : {수고}에만 집중
2) 수용의 단편성 : 편의적이고 수사학적인 차용
3) 정세적 왜곡
4) 그람시 전유의 몇가지 차원

#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 관련 읽을거리
- 페리 앤더슨, {서구마르크스주의 연구}, 이론과 실천
- 데이빗 맥렐런, {마르크스주의 논쟁사}, 인간사랑
- 하비 케이,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 이론과실천
- 알렉스 캘리니코스, {현대철학의 두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갈무리
- 주세페 피오리, {그람시}, 두레
- W. L. 아담슨, {헤게모니와 혁명}, 학민사
- 임영일 편역, {국가, 계급, 헤게모니}, 풀빛.
- 칼 보그 외,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 갈무리
- 르네이트 홀럽, {그람시의 여백}, 이후

# 토론 주제 (제안)
- 맑스 이후 얼마나 많은 맑스주의가 있나?
- 무엇이 맑스주의를 맑스주의이게 하는가?
- 맑스주의, 맑스-레닌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고전적 맑스주의, 서구맑스주의를 구분하는 의미는?
- 맑스주의는 근대의 이론인가? cf. '현대의 이론'
- 그람시주의와 맑스주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과의 관계는?
- 맑스주의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cf. 퇴행적 발견법과 진보적 발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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