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잊지 못할 마술. 읽는 것만으로도 마술에 걸린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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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오거리에서 내려 순천향병원을 지나서 이태원으로 간다. 병원을 지나니 길이 꺾이면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경사가 심하다. 오르막의 꼭대기는 아래로 지하차도를, 양 옆으로 계단

    을 만들었다.계단을 다 오르니, 정면에 알록달록한 외관의 호텔이 보인다.  이태원으로 내

    려가다 커피숍에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앉았는데, 뒤에 히잡을 쓴 사람들이 있었다. 외국인이

    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이래서 이태원인가.....

 

 

     92.

       이태원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놀랄 만큼 참혹하다.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이름은 조선 효종 때

    이곳에 큰 배나무 숲은 만들었다는 이유로 불리게 된 것이지만, 원래는 조선 시대 공무 여행자

    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여관이 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서 왜군

    에 의한 치욕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또다른 이름이 이태원異胎圓이라는 믿기 힘든 이름이

    었다는 것은 참혹한 역사를 암시한다. 왜군들이 이 지역에 있었던 절 운종사에서 비구니들에

    게 성적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 근대 초기에는 일본인 전용 거주 지역이 조성되어 異他人이라

    는 이름도 갖게 되었으니, 이방의 문화라는 특색은 일찍감치 시작되었다.

 

      너의 이름은 뼈아픈 비밀과 같고, 나는 결코 '너'라는 단 하나의 이름에 닿을 수 없

    다. 너의 영혼과 삶을 정확하게 요약하는 이름은 없다. 이름은 불가능하지만, 또한 불

    가피하다. 너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

   

      

 

   "이태원터"라는 표지석은 이태원이 아니라 해방촌 끝자락 용산고등학교 정문에 있었다. 이태

   원터가 그렇게 넓지는 않았을 것 같고, 나중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싶다.  

 

   96.

       국가의 안과 밖이 전도된 이 장소에서 한국인은 다만 여행객일 뿐이다. 한국인을 여행객으

     로 만드는 이 기이한 공간을 소비하려는 한국인들로 이곳은 언제나 넘쳐난다.

 

   98.  

        이곳의 식당들이 주는 매혹의 핵심은 '오리지널'의 맛과 스타일에 유사하다는 것, 한국화되

     지 않은 본토의 맛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오리지널 이전에 있거나 오리지널 이후에 있

     는곳. 그 기이한 활기, 다양성의 과잉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뉴욕이나 홍콩이 될 수 없다.

 

 

    여행의 끝이 슬픈 이유? "다른 삶의 기미를 만날 수 있지만, 다른 삶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109.

           이런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의 사원이 이태원 언덕 높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상

         징이 될 수 있다.

 

 

   81.

         미군 기지의 북쪽, 가파른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해방촌. 이 곳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곳

      은 인가가 드문 솔밭이었고, 갑오개혁 때까지 왕실과 문묘의 제사에 쓸 황소, 양, 돼지를 키

      우던 전생서가 있었다고 한다. 1908년경 용산 일대 군사기지를 완성한 일본은 주둔군과 군속

      가족 들을 이 일대에 거주하게 했다. 일본군 육군과 관사와 사격장이 이 부근에 있었다.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집 없는 월남 피난민들이 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

 

 

 

    

  

 

     해방촌 입구. 여기에서 해방촌 언덕꼭대기까지는 이국 

   적인 장소가 눈에 띈다. 아기자기한 작은 가게들이 나란

   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자그마한 가게 안에 삼삼오오 모

   여 브 런치를 즐기는 외국인들.

 

 

     해방촌 꼭대기에서 내려가는 길은 비탈길.. 가파른 길을 내려가며 여기가 남산자락이라는 것

   을 새삼 느낀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버스를 탓다. 그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데 긴장되는 곳도

   있었다.       

  

 

      

      이동네 어디에서든 보이는 건 남산 N타워. 높고 우뚝하게 서있는 것이 강압적이다. 금방이라

    도 들킬 것 같아 다른 짓은 못 할거 같다.

 

       보성학교 앞 길가에서 오른쪽 경사진 계단을 내려가면 어둑어둑한 신흥시장이다. 계단 말

     고 파출소 앞까지 와서 시장 입구쪽으로 내려간다. 시끌벅적은 커녕 흥정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몇몇 아주머니가 시장 가운데 평상에 앉아 두러두런 이야기를 나누신다. 물건들을 내

     놓은 걸보면 물건을 파는 시장은 맞지만 너무 고요하고 어두워서 무섭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

     누시는 아주머니들 빼고는 구경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게도 몇개 되지 않는다. 시장이라는 말

     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장이다. 왜 찍냐고 물어볼까봐 카메라들기가 무서웠다.

        

 

                                        

 

      한남동, 이태원, 해방촌 모두 이질적인 것들이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숨을 쉬고 있다.

    그런 것들을 이질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더 이상해 질것이다. 그래서인가 남산 3호 터널앞

    '소월길'이라고 써놓은  이정표가 더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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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한 조선의 책 읽어주는 남자
이화경 지음 / 뿔(웅진)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읽고, 다시 읽는다.  "채제공" ,  "이옥" 을 등장시키는 이야기라서 읽는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들고 여기까지......

 

       이젠 그 바람과 그림자에 의지해 다음까지...... 아니 ......  끝까지.

 

 

 

 

 

 

199쪽.

'이야기는 허공에 의지해 그림자를 잡는 짓이고, 현실에 의지한
거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야기는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고, 거북에게 털을 구하고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이자 먼지
에 글을 새기고 그림자를 입으로 불어 흔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한마디로 뒤웅박을 찾고 바람을 잡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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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 기념성당.

       '새남터'는 억새와 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

       基)'라고도 한다.

 

        59쪽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

     형장이었던 곳이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들이 피를 뿌린 곳이며, 1801년

     부터 1866년까지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임금이 살고 있는 성안에서는 죄인을 처형하지 않는(피를 보지 않는) 법이었기 때문에 성

       밖으로 죄인을 끌고 나가 사형을 집행 하였으니 새남터를 비롯하여 서소문 밖과 양화나루의

       절두산 등이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처형 장소인 셈이었다. 절두산에서는 산봉우리에서

       죄인의 목을 쳐서 강물로 던져 버리니 시체 처리가 손쉬웠고, 새남터 역시 옛날엔 민가가 적

       고 나무가 울창한 곳인데다 넓은 모래밭이 있고 또 한강이 가까워 처형하고 뒤처리를 하는

       데 최적지었다.

                                                                                      서상요 / 한국교회사연구소

 

      

 

          성모상 옆이 지하의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기념관에는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의 역

       사를 전시했다. 특히 새남터 모래 사장에서 목이 베이는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양

       손은 뒤로 묶이고 귀는 긴 꼬챙이가 꽂히고 무릎 꿇은 채 끌려가는 장면이 생각난다. 양쪽

       귀에는 왜 꼬챙이를 꽂았을까? 잘못된 것을 들은 귀라고 그랬을까? 목을 치는 것보다 더 잔

       인하다.

 

          여기서 나오면 녹색의 한강철교가 보인다.

 

 

          58쪽.

 

         1900년 한강에 놓인 최초의 근대적 다리였던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퇴각하는

      군인들에 의해 폭파된 적이 있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 강을 건너는 상황에서 이

      루어진 성급한 폭파였고,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500명이 폭사하였다. 희

      생양이 필요했으므로 권력은 폭파의 책임자였던 공병감을 전쟁 기간에 처형했다.

      이 책임자는 사후 12년 뒤의 재심을 통해 무죄 판정을 받았다. 다리는 장소와 장소

      를 이어주기도 하지만, 장소와 장소를 단절시키는 참혹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                - 칼의 노래 / 김훈

 

 

          한강철교 다음 다리가 노들섬이 있는 한강대교이다. 한강에 놓인 다리들을 이렇게 가까이

        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건너보기로 한다 시작점에서 보니 대교 좌우에 '직녀까페'와 '견우

        까페'가 서 있다. 이름도 기가 막히게 지었다.

          다리 난간에는 유명한 운동선수, 연예인들의 이름과 함께 길게 뭔가를 적어 놓았다. 아마

        도 난간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적어 놓았나 보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9년부터 2013년 7월 말까지 5년간 한강 다리 가운데 마포대교(110명)에서

        자살시도가 가장 많았으며 한강대교(64명)가 두 번째라고 한다.

            

    

 

   

 

   

    

     '1부 오래된 망각편' 답사는 여기서 마친다. 용산역과 전자상가는 기회가 되면 가야겠다.

     너무 오래되서 잃어버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들, 새남터, 청파동, 효창공원, 한강철교...

     무언가 있겠지, 뭔가를 느낄 수 있을거야 하고 가보지만 기대만큼의 느낌은 아니다.

      그 장소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리석었다.

 

      12쪽.

 

       장소는 시간을 앞지르지 못한다. '장소는 시간의 몸을 입고 있으며 내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장소를 둘러싼 야이기는 완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이해를 받을 수도 없다.

    장소의 의미가 타오르던 극적인 순간은 결국 사라진다.

 

      어떤 호명에 의해서도 장소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장소는

     이름으로부터 초연하다. 하나의 고독한 시선이 장소를 발견했다고 해도 장소는 그의

     고독을 완성해주지 않는다. 장소는 시선보다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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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역은 이 도시에서 가장 초라하고 소박한 역의 하나일 거이다.

           '남영(南營)'이라는 이름은 서울 남쪽에 군영이 있다 하여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일본군

          병영의 흔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애기도 들린다. 전철 1호선 개통과 함께 세워진 이 역은

          철로의 다리 아래에 입구가 있다. 용산역과 서울역이라는 거대한 역 사이에 있는 이 역은

          마치 지방 소도시의 간이역을 연상시킨다. 역의 입구가 하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이 역

          은 거대 도시 속의 생뚱맞은 간이역처럼 보인다.  

 

       

 

       

    

          

          남영역. 개찰구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개찰구가 있기는 할까?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게 신기하다.

         

 

          남영역의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청파동 골목길은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 주거지역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며, 그 여파로 인해 아파

        트 단지 등으로 개발되지 않아 여러시대에 걸친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 전시장과 같다.

 

          한때 이곳이 일본인 고급 주택지의 하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숙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간판들이 무수히 붙어 있는 다세대죽택들 사이로 골목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겨져 있는 어두운 적산가옥들은 이곳이 청파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청파동' 동네 이름에 끌린다. 무슨 뜻일까? '靑 - 푸를 청, 坡 -  고개 파' 푸른 고개?

          푸른 고개? 있었나?

 

           청파(靑坡)란 이름은 한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푸른언덕````인데, 이 동이 연화봉(蓮花

          峰)이라는 푸른 야산에 위치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조선 세종대왕 때 명인인 청파 기건

          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청파동1가는 현재는 모두 주택가로 변했지만 과거

          에는 연화봉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연화봉은 산 모습이 연꽃 봉우리같이 생겨

          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는 목동산(牧童山)과 옻나무가 많아 생긴 옻나무골도 있었습니

          다. 서울역 남쪽의 역촌인 청파는 수륙교통의 연계소인 용산의 배후 취락이자 내륙으로

          이어지는 교통 상 요지였으며, "청파삼대불문지례"란 속설이 있을 정도로 역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 용산구청 홈페이지

 

           

        

 

        

 

            회화적 아름다움? 그림을 그려놓은 것같은 인위적인 아름다움?

            깨끗하다.

            골목을 타고 들어가면 저런 의외의 건물이 보인다. 만들어 놓은걸까?

            연꽃봉오리를 닮았다는 연화산.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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