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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 제14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단편 부문 수상 대상작 ㅣ 뉴온 5
윤슬 지음, 양양 그림 / 웅진주니어 / 2023년 7월
평점 :
내가 살던 동네에는 또래가 살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아서
학교 가는 길에도,
돌아오는 길에도
친구와 함께 걸을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책가방을 덜그럭거리고 신주머니를 뱅뱅 돌리며
때로는 떡볶이를 사먹는 장면들은
동화나 만화속에서만 볼 수 있었다.
내 일상은 평온했고, 평범했다.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에 들러 칸막이로 분리된 연습실에서
뚱땅뚱땅 피아노를 치고
학원 옆 슈퍼에서 암바사 한 병을 사서 꺾어진 빨대를 꽂아 마시며
집까지 이어지는 오르막을 올랐다.
오가는 길 담장 그늘에는 할머니들이 종종 나와 계셨는데
가끔은 용기를 내어 인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보통은 골목을 내달려 집까지 뛰어들어가기도 했다.
마당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다가
화단에서 꽃봉오리를 따다가
마루에 거꾸로 누워 하늘을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나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살았지만
외딴 마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갈림길>에는 세 편의 동화가 묶여 있다.
세 편 모두 밝고 경쾌한 소년 소녀 동화라기 보다
창호지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늦가을 저녁빛같은 동화이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엄마 아빠는 오지 않았는데,
나 혼자 집을 지키는 여느 밤인데
TV에서는 호랑이가 동물원을 탈출했으니 조심하라는 속보가 나온다.
문을 열고 마루에 서면
옛 이야기에서처럼 호랑이가 댓돌 아래에 입을 벌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갈림길>을 읽으면서 그 때가 생각난 건 왜일까
상상이 더 무서운 걸까,
현실이 더 무서운 건 아닐까.
무겁고, 어렵고,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나는 이렇게 씩씩할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길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갈림길
이혼한 아빠와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된 나(아연)는
유나와 함께 학교에 오가게 되지만
유나가 학교 토끼를 강에 빠트려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짜인지 묻고 싶지만 그마저도 어색해질까봐 묻지 못한채 갈림길에 다다른지 며칠째
유나가 하는 말들이 마음에 걸린다.
-아빠랑 둘이서 사는 거 괜찮아?
-문은 잘 잠그지?
-난 가끔 저 밑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아연은 엄마와 함께 살던 때를 떠올리며
지금까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던 나를 생각하며
유나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아연의 모습이 동화라기 보다
열린 결말의 소설 같았다.
#긴 하루
솔이랑 친해지고 싶었던 나(미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만 선택받았다며 기뻐했다.
솔이가 할머니 몰래 알아낸 아빠 요양 병원 주소,
왕복 4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사실은 가장 중요했을 문제였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까지만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요양원은 결코 머리로 알고 있는 것처럼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지쳐가고
서로를 탓하고, 짜증이 난다.
어른들의 도움으로 아빠를 만나게 된 솔이
솔이 아빠는 알코올 중독 치료 병원에 있는 거였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누구나 각자 사정이 있는 거잖아.' 했던 나의 말때문에
함께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고 이야기 하는 솔이에게
미래도 말한다.
"너랑 와서 다행"이라고.
#잠이 오지 않는 밤
엄마는 소라네 아빠와 재혼했지만 1년만에 다시 이혼했다.
그런데 오늘
소라가 현관문 앞에 나타났다.
엄마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고,
나(은하)는 소라와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소라는 웅크린채 밥도 먹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얄미운 계집애,이지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옆집 언니 덕에
소라는 식탁으로 와 함께 밥을 먹고, 약간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은하는 소라에게 전학온 학교에서 배웠다며
카드 마술을 보여준다.
어색한 분위기가 물러가고 소라는 잠이 든다.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소라는 은하의 혼잣말을 들었을까?
세 편 모두
아이들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아이들이 아이들을 다독인다.
어쩌면 세상은 이렇게 혼자 나아가는 우리가 모여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혼자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우리가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여러 가지 생각들이 쏟아지고
'명치 끝이 아릿'한 기분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지금을 만난 것 같아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