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 백년 전 한국의 모든 것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 살림 / 1994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과그이웃나라들 #이사벨라비숍 #비숍여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1880년대 후반의 한국을 네차례나 다녀간,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첫 여성회원이었다는 비숍여사. 그녀는 고종과 민비와 친분을 쌓으며 백년전 한국과 그 주변정세에 대한 자세한 책을 써내린다. 한국의 지리, 풍경, 풍속과 정치경제, 그리고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등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제 외교정세까지.

오백여 페이지의 두툼한 책 중 앞머리 절반은 거의 한국에 대한 지리지에 가까워 상당히 지루하다. 남이 쓴 여행기를 읽는 것만큼 따분한 게 있으랴만, 그것도 한국의 자원과 기후와 동식물에 대한 박물학적 진술이 주가 되니 죽을 맛이었다. 한국인의 일반적인 외모와 생활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중립적인 표현. 서울과 제물포와 금강산과 원산, 와중에 그녀는 참 잘 돌아다닌다.

비로소 흥미로워지는 건 그녀가 만주와 봉천을 지나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시베리아에 도달했을 즈음이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백년전의 한국은 지금의 남한보다 훨씬 국제적인 면도 있었던 게, 트인 육로를 통해 만주로 시베리아로 난민이 되어 쏟아져 나갔던 게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활기차고 부지런하며 깨끗한 삶을 일군다. 비숍여사가 최초로 한국인의 잠재력을 긍정하기 시작한 지점이다.

한반도 내에선 어딜 막론하고 그저 더럽고 게으르고 흐리멍텅해 보이던 한국인들, 자칫 인종적인 편견으로 굳을 뻔하던 그 인상을 바꿔낼 수 있었던 탈한국인들. 탈조선인들. 차이가 뭐였느냐면, 비숍여사는 수탈자의 존재를 꼽는다. 부패한 정부와 거대한 기생세력으로서 양반집단. 부를 축적하고 인간답게 살아보려는 의지를 초장부터 꺾어버리는 만성화된 시스템.

그런 그녀인지라 한국이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꽤나 비관적이다.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는 끊어졌고 을미사변 이후 일본이 조심스런 가운데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시기로 1897년을 보고 있지만, 언제라도 일본이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거다. 마지막 챕터는 그 와중에 영국의 이익을 보전, 확대할 방안에 대한 제언과 더불어 한국에 대한 안타까움이 뒤엉켜있다.

대한제국이 이용할 줄 모르는 짧은 독립의 시기를 구가했던 1800년대말. 나약하고 어리석은 왕은 비전을 제시하거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고, 누대에 걸쳐 약탈자와 피약탈자의 관계로 단순화된 사회질서는 잠재력과 운동에너지를 봉인해 버렸다. 책에서 그녀의 시니컬한 분석이 빛을 발하는 건 그저 쉬운 손가락질이 아니라 그 맥락과 인과관계에 대해 외부자의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려 애쓴 점에 있는 것 같다.

그에 더해 철저하고 집요한 기록의 욕구까지. 상투를 틀기 위해 속알머리를 반경 7.6cm 정도 밀어버린다는 놀라운! 정보를 전달하거나, 서툰 통역에 의지해 한국 귀신들의 계보를 그리고 무당굿의 순서와 의미를 설명한다거나, 머무는 숙소마다 줄자를 들이대며 크기를 재고 평균온도를 재던 꼼꼼한 그녀이지만 또 지글거리는 온돌방에 질색팔색하는 모습도 보인다.

백년전의 위태로운 한국이 보이다가, 한국 밖으로 탈출한 한국인들이 보이다간 어느순간 한 모험적인 인간의 삶이 두드러져 보이는 책.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온갖 허술한 탈거리를 빌어 사방팔방으로 헤집고 다니는 열정이라니. 인디아나존스가 무색한 그녀의 이름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쿨하고와일드한백일몽 #무라카미하루키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하루키를 읽으면 뭔지 모르게 은근슬쩍 낚인 느낌이 들 때가 있다. a는 역시 b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b라고 한다면 곤란해지니까 다시금 a는 c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요. 잘 모르겠지만 a는 b여도 좋겠고 c여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군요. 후후. 뭐 이런 식.

똑같은 자리에 서서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해도, 거기에 머무르기까지의 마음이 문제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고착되어 있을 수도, 혹은 이리저리 앞뒤재고 돌아본 결과 멈춰 있었던 걸 수도 있는 거니깐. 그런 점에서 하루키는 순간순간 쓰잘데기없달 지점까지 멀찍이 나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한다. 파도처럼.

오랜만에 그의 에세이들을 연달아 읽으니 왠지 이전엔 별반 느끼지 못했던 닮은 모습들이나 사고가 여럿 들춰진다. 그건 내 20대를 축성했던 그의 글이 내게 미친 영향인 걸까, 아니면 이 글을 쓰던 당시 그의 나이와 내 나이가 비슷해질 만큼 나도 나이를 먹고 있어서인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디 갔어, 버나뎃
마리아 셈플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디갔어버나뎃 #마리아셈플 #책스타그램 #소설

이메일과 편지, 메신저와 쪽지, 그리고 영수증 뭉치까지 버무린 소설은 얼마나 독특할까. 그 부분적인 답은 줄리언 반즈의 소설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이미 맛본 바가 있지만, 이 소설은 좀더 스토리가 탄탄한 느낌이다.

쉽게 쭉쭉 읽히고, 그러다가 자칫 반전의 함정에 덜컥 걸리고 말아 잠시 가벼운 충격을 느끼기도 했다. 곧 영화화된다고 하니 이 재치 가득한 소설을 어떻게 비쥬얼화할지 확인할 날을 기다리는 것도 재미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스모스 #칼세이건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기념비적인 과학교양서, 라는 말은 다소간의 경계를 요한다. 기념비에 먼지가 채 내려앉기도 전에 속속 밝혀지는 많은 오류와 논쟁중인 해석이 대중화를 위한 설탕옷을 입고 간명한 진실인양 행세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자가 쓰는 비유와 전문영역이 아닌데서 끌어오는 배경지식은 자칫 오해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깐.

그런 점에서 1980년에 첫 출간된 이 고전 역시 비켜갈 수 없는 한계들은 엄존한다. 과학에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내 눈에도 당장 보이는 건 DNA에 대한 과한 기대감이라거나, 우주공간에서의 핵 사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라거나, 무엇보다 그가 그렸던 수십년 후의 미래를 살고 있는 지금이 그의 상상과는 꽤나 다르다. 인간 이성을 신뢰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 공헌할 거라던 그의 신념 혹은 의지는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의 주된 메시지는 여전히 엄청나게(!) 유효하다. 과학 자체와 과학의 결과물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하기'의 과정과 문제의식에 대해 바쳐진 그의 열정과 단호함이 인상적이다. 결론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 관건은 그 결과물이 왜 잘못 해석되었거나 예견되지 못했는지, 그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과학 정신을 궁극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건 안으로는 인간 내부와 기원을 향하고 밖으로는 지구와 별과 우주로 향하지만, 결국 이는 만나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자 그대로 인간은 우주에서 생겨났으니까. 그런 통찰을 가로막았던 건 지상의 왕들과 신들과 권위자들이었다. 그렇게 기원전 깨인 자들의 탐구 대상이 되었던 우주가 수십세기동안 미신과 미망의 원천으로 전락하고 나서야 다시 인류는 우주에서 코스모스, 질서와 규칙을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초판 내지 개정3판 정도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언젠가 천문대에서 별들을 바라보고 은하계 변방의 작은 티끌의 티끌에 불과한 지구를 실감했던 날의 소름이 오소소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보잘것 없는 곳에서 찰나를 살다가는 인류라니. 게다가 난 그 인류의 아주아주 작은 점 하나일 뿐이라니. 그건 일종의 신비체험이기도 했고, 내가 찾아낸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이유이기도 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스타그램 #스파링 #책 #문학동네 #소설

오랜만에 읽은 책이다. 2016년말 온국민을 기함케한 그 일이 터진 이후로 책이고 영화고,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이따위 세상에 책은 읽어 무엇하나 싶은.

문동소설상을 받은 도선우란 작가, 그는 어쩌면 그런 분노를 오랫동안 응축시켜 왔을지 모른다. 결이 딱 같은 분노는 아니라도 그런 류의, 좀체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와 불공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분노. 그런 분노에 힘입어 한달음에 쓰여진 것 같은 소설이다. 마찬가지로 한달음에 읽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서사나 문체로 말하자면 사실 뻔한 무협지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많았다. 갑작스런 각성과 그 세계를 평정하는 압도적인 힘, 독보적인 사부의 역할까지. '신묘한' 힘의 '운용' 같이 거푸 출현하는 단어들은 굳이 그런 연상작용을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 외피를 터뜨려나올 듯 꿈틀거리는 에너지랄까 리듬, 그건 마치 내가 처음으로 스파링할 때의 감각과 같았다. 흥분과 분노와 절망과 무기력함, 그 본능에 떠밀린 느낌. 그 느낌을 세상살이에 대입했을 때 어떤 파도에 부딪히고 고비를 넘나들지, 그때의 내 호흡은 얼마나 가빠질지를 한 불우한 남자의 무협환타지스런 인생에 비긴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