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사나이 문지 스펙트럼
E.T.A. 호프만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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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나이 #문학과지성사 #책스타그램

독일의 오랜 민담에서 등장하는 모래사나이란 밤에 잠들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눈에 모래를 뿌리곤 눈알을 빼가는 사람이라 한다. 1800년대 초반에 쓰인 작품 세 점을 모은 이 선집의 첫 단편의 제목인 이 메타포는 당대의 발전한 문명 사회 속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과학과 이성의 세례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담금질된 주인공이 어느결엔가 도무지 해명되지 않고 기이한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이상한 체험은 어렸을 적 무서워하던 모래사나이였단 식이다.

요새로 치면 과거 전설의 고향을 현재에 되살려내어 달걀귀신과 온수콸콸 비데를 함께 놓아두는 이야기랄까. 전설의 힘에 기대자니 사람들이 너무 똑똑해졌다지만, 똑똑해졌구나 하고 포기하자니 여전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야릇한 영역이 남아있는 게다. 그걸 복잡미묘한 심리의 변화와 함께 놓아둔 채 급전직하하는 롤러코스터를 태우는 느낌. 자칫 상투적이거나 고답적인 묘사를 피하면서, 작품은 이백년전에 씌여졌다기엔 그런 긴장감과 묘한 설득력을 유지한 채 굉장히 따끈하고도 신기한 뒷맛을 남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문득, 모래로 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샌드아트'의 이미지가 모래 사나이와 겹쳐보이기도 한다. 끝까지 읽어도 주인공이 갖는 공포감과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저 극단적인 감정들이 불꽃놀이하듯 펑펑 터져나가곤 사라질 뿐이다. 근래의 소설만큼 사실적이고 분명한 캐릭터와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근래의 소설에서보다 좀더 뿌옇고 흐릿한 세계가 있었으리라 상상하게 만든다. 나머지 두편, 독립된 단편이라기엔 다소 연작소설의 느낌도 있을 만큼 캐릭터와 모티브가 유사한 작품도 마찬가지다.

#문지스펙트럼 #문지스펙트럼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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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고 - 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대하여
존 맥피 지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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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원고 #존맥피 #논픽션 #글쓰기 #책스타그램

글쓰기라는 작업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한번씩은 작정하고 털어놓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시간은 한정없이 흐르는데 정작 문장 하나 제대로 지어내지 못하는 좌절감이나 무기력감에 대해 호소한다거나, 아무리 고쳐도 맘에 드는 수준으로 율려놓기가 힘들어 차라리 다시는 안 보고 만다는 둥 작가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투정이 있는 거다.

사실 이건 글쓰기를 벌이수단으로 가진 이들의 특권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농부가 농사짓기 어렵다고, 영업직원이 영업하기 어렵다고 글을 쓴들 누가 읽어주고 우쭈쭈해주겠는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존 맥피의 이 책은 조금 더 어른스럽고 실용적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평생 해온 나도 잘 모르겠어서 번번이 막히지만, 그래도 논픽션에 대해선 내가 해보니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 같아. 이러저러한 것들도 참조하면 조금은 더 수월해질 거 같더라고.

그의 따뜻하고 온화한 말투를 따르다보면 챕터가 술술 넘어간다.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꼬리를 물고 연쇄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지, 구조를 어떻게 고민해두어야 이야기가 효과적일지. 나선형이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한 그림들이 툭툭 튀어나오는데 글의 흐름을 이렇게 시각화하는 건 간단하면서도 이해하기 명료하다. 그리고 나선 이야기꺼리를 찾거나 풀어내기 위한 좀더 세밀한 조언들, 독자를 염두에 둔 단어 찾기라거나 얼마나 어디를 생략해낼지에 대한 조언에 이르기까지 자세하다.

아마도 출판사나 서점에서 고민을 했을 법한 책이다. 어떻게 논픽션 혹은 일반적인 글쓰기를 해야 할지에 대한 실용서의 측면도 있지만 작가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한 깊숙한 묘사와 평가도 있어 에세이같기도 하다. 혹은 '생략'이란 제목의 마지막 챕터 끝부분에 이르면 이건 굉장히 재미있는 문학같기도 하다. 여하간 독자 입장에서야 재미있으면 되는 거니깐, 작가의 고단하고도 지난한 창작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이 책을 그저 즐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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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특별한 관문 - 아이비리그의 치열한 입시 전쟁과 미국사회의 교육 불평등 걸작 논픽션 20
폴 터프 지음, 강이수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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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특별한관문 #아이비리그 #대학생 #책스타그램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직장, 그러니까 돈을 많이 주는 직장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라서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부모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삼대의 노력이 동원되야 한다던가, 탈법과 위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종 상장과 기록들을 만들어내는 게 조선의 최신 트렌드렸다. 미국이 이에 뒤질리 없다. 이미 2019년 최악의 입시부정사건에서 드러나듯 미국답게 좀더 스케일도 크고 본격적이다.

대학에 가기 위한 자격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워서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식의 수능인 SAT를 잘 보면 되나, 아니면 내신이 좋으면 되나. 좀더 도발적이게는 아이의 출신 배경과 부모의 경제력이 반영되는 것은 어떤가. 한국이 다소 염치를 차리며 논쟁중이라면 미국은 이미 훨씬 오랜 시간 극단적인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을 한줄로 세우는 대학평가의 편협함과 재정확충의 문제가 맞물려 아이비리그 대학의 학생들은 부유층 백인의 비율이 압도적이란다.

그리고 다소 자투리같이 남는 이야기, 그렇지만 감성적인 제목으로라도 반향을 남기고 싶은 (아마도) 저자의 주제의식. 대학은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다소 낭만화되었거나 이상적일지도 모르지만 대학에서의 교육이 그저 취업준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동네를 벗어난 아이들의 인생을 위한 특별한 배움의 장이 될 수는 없는지 저자는 묻는다. 그것이 각자의 경제적 환경과 인종과 성별의 차이 등으로 인한 한계나 상처를 메우고 성숙시킬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다만 책의 몇몇 사례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미국이 그모양이니 한국은 더 요원한 일이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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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도시, 서울 - 당신이 모르는 도시의 미궁에 대한 탐색
이혜미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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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생충‘에서 은유되던 가난의 모습에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실감을 더해넣는다. 쪽방촌, 국가의 정책이나 관리에서도 빗겨난 그곳은 어쩔 수 없는 빈곤의 냄새가 가득한 지하 관짝과도 같은 공간인 거다. 단편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던 그곳에 대한 책임감으로 저자는 우리에게 이 책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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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제18호 : 호치민
현대사상연구소 편집부 지음 / 현대사상연구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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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찰스펜 #현대사상 #베트남 #책스타그램

호치민을 다룬 두 권의 서로 다른 책에 대한 소감, 한권은 베트남전쟁의 막바지 통일 베트남의 출현 직전이자 호치민 사후 4년만인 73년에 씌여진 그의 평전, 또 한권은 약 사십년을 뛰어넘어 2017년 현대사상연구소가 대체로 맑시즘적 시각에서 정리한 호치민과 베트남에 대한 논문집이다. 호치민과 베트남,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대체로 미국의 시각 혹은 '자유 진영'의 시각에 잡힌 단편들 뿐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학사논문을 쓸 때도 미국 반전여론의 추이만 살폈을 뿐 베트남인들에게 이 전쟁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가 무엇인지는 관심밖이었더랬다.

그런데 이 호아저씨, 엄청나다. 소박하고 사심없는 정치지도자이자 수십년의 무력항쟁을 앞장서 이끈 전사, 게다가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조화시키려는 혁명가로 한평생을 살았다. 체게바라를 찜쪄먹을 수준의 공력이자 삶이다. 게다가 수개 국어를 구사하며 아시아와 유럽, 소련과 미주를 넘나들며 베트남 해방과 세계혁명을 위해 코민테른을 움직이다니, 이정도 급의 인물이 마오 빼고 아시아에 몇이나 될까.

그의 삶이 곧 베트남 현대사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배를 극복한 인도차이나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기도 잠시, 바야흐로 시작된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미국은 베트남을 강제 분할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호치민은 그리고,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유일한 승리를 얻어낸다. 직접적인 군사력과 전술 이외에도 인류 보편의 가치와 정서에 호소하는 이데올로기전에서의 승리가 주효했다면, 그건 고스란히 그의 인격과 철학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그를 맑시스트로 해석할지, 혹은 민족주의자로 해석할지는 이론적 정합성이나 철저함의 측면에서 흥미로운 화두다. 그리고 오늘날 하노이에 미이라로 우상화된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개혁개방 이후 베트남이 추구하는 시장경제와 부수하는 가치들이 호치민이 그렸던 베트남의 미래와 이어져 있을까. 민족해방후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하려했던 혁명가 호치민과 그의 베트남은, 어디쯤에서 세계혁명의 깃발을 꺾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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