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사자 -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세계를 정복했을까
애비게일 터커 지음, 이다희 옮김 / 마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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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cat-person을 자처해왔지만 문득문득 그런 의문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 앙증맞고 새침한 동물은 대체 뭐하는 동물이길래 사람 맘을 홀리는가. 딱히 쓸모도 없고 충성심도 없어 스크래치를 온사방에 내기 일쑤인 이 이기적인 동물이 어떻게 길과 거실을 온통 장악해버릴 만큼 번식하고 넘쳐나 버렸는가. 심지어 이제는 사진첩과 SNS피드를 정복해 버렸으니 말이다. 의문들은 으레 일종의 경외감과 숭배의 마음으로 찜찜하게 마침표를 찍곤 했었다.

이 책, 거실의 사자는 그런 고양이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애초 거대고양잇과 육식동물의 간식에 지나지 않았던 인류가 그들의 고기를 훔쳐먹고 차츰 도구로 무장하며 세력이 비등해지는 것에서 고양이의 가축화 아닌 가축화가 시작된다. 고양이는 개나 소와는 달리 가축화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특별한 동물이란다.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복속되지 않고 종적인 일관성을 유지한 채 골격과 체형을 지금까지 유지했다고. 개와 달리 종 자체가 고작 털색으로 구분되는 얄팍한 다양성을 가진 걸 감안하면 알 만하다.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양이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개와 달리 고도의 육식동물인 고양이는 인간에게 소처럼 편하고 안정적인 단백질원이 될 수도 없었고, 쥐를 잡는다는 오랜 통념과 달리 쉬운 먹이를 취하느라 쥐 박멸엔 큰 효과를 내지 못했고, 다양한 표정과 감정표현을 진화시킨 개와 달리 단독사냥꾼 고양이는 늘 새침한 표정으로 곁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번식기계 고양이는 폭발적인 번식속도와 인류 이동에 힘입어 전지구로 퍼져나갔다. 이집트에서 발원한 고양이는 신대륙과 남극까지 퍼지며 토착생물의 씨를 말리고 급기야 인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번성하는 동물이 되었다. 미국에서만 하루에도 길고양이 수만마리가 살처분되고 있지만 숫자는 줄어들 줄 모르고 중성화조치(TNR)는 애묘인과 인도주의자를 의식한 요식적인 눈가림일 뿐이란다.

이쯤되면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 만물의 영장이 맞나 다시 물어볼 때다. 고양이님들의 집사를 자처하는 인류는 먹이사슬의 맨꼭대기를 고양이에 양보한 건 아닐까. 소위 '양육 본능의 오발'을 유발할 만큼 귀엽고 애기같아지는 식으로 진화한 고양이의 매력 앞에 저항할 수 있는 인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책중에 소개된 '톡소플라스마'의 전인류적 감염으로 고양잇과 동물에 대한 저항력과 경계심이 제거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토록 귀여운 책표지를 만든 디자이너는 분명히 그런 환자임에 틀림없다.

고양이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왜 스스로 고양이 앞에선 애기 어르듯 하며 집사를 자처하게 되는 건지 궁금한 사람에게 강추강추하고 싶은 책. 냐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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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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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이해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세계.



   
  "너희들은 인간의 생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남의 생명이니까, 남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피스는 상냥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지인이나 친구는 죽이지 않아요. 죽으면 슬프니까요. 그렇지만 남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남들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그야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와는 관계없어요."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좋단 거야!"
"즐겁지요. 당신도 해보면 알걸요.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단순히 미친 또라이의 생각일까. 남의 생명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생명일 뿐이라는 저런

식의 사고라는 건.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 너머 어딘가서부터 나와 상관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는 거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사람들과 타인을 가를 경계, 그런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죽어가는 아이들, 지구 곳곳에서 쉼없이 벌어지는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사람들, 일본에서, 휴전선 너머에서, 심지어 이 나라에서도 부당하게 고통받고 괴롭힘당하며

죽거나 상처받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거다.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가 있지 않고서야 우리가 단

일초라도 웃을 수나 있을까. 우리가 주위 사람, 가까운 사람만 보듬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는지도.


평생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될 사람들의 대다수가 경계선 밖에 '남'으로 존재하고 있단 얘기다.

급작스레 커져버린 세계와 헤아릴수 없이 많아진 인간들을 대하고선, 인간 능력에 한계가 온 건

아닐까. 정말이지, 세계가 이토록 커져 버린 건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니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인류가 갑자기 흉포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커지고 많아진 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구.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범인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죽고 싶지 않다고 애걸하지만, 지금처럼 보잘것없이 살아봤자 뭘 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기획한 이 연속살인극에 참가하면 네 이름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돼. 모든 사람이 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줄 거야. 모든 사람이 너의 죽음을 애도해줄 테고. 이거 너무 멋지다는 생각 안 들어?"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단 욕구는 '모방범'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에너지와 같은 무엇이다. 범인들이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런 인정에의 욕구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주목을 끌고 알려지고 싶다는 욕망을 내밀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거다. 범죄사건의 목격자이던

논평자이던, 소설 속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 방송에 나오려고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점점 그런 인정욕구에 목말라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점점 광활해지기만 하고

사람수는 헤아릴수 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와중에, 거대한 도시, 수많은 사람 속에서 살아남고

두드러지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모두가 인정받고 싶지만, 또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거다. 너무 커져버린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 팽개쳐진 영혼들.


범죄의 피해자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버려졌다고, 있으나 없으나 세상에 별 상관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범죄의 가해자였던 사람들 역시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진 채였다.

굳이 시니컬하게 '자존심 비대증의 실패자'라며 비하하지 않더라도, 가해자들의 삶은 공히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너무 커진 세계로부터 결정적인 상처를 받고 있었던 거다.



도시 반대편에 사는 사람에게 신, 혹은 스타가 되다.



   
  "나는 안 잡혀. 계획은 완벽해. 황홀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스토리야. 가즈아키, 잘 들어. 이 사회는 내가 만들어내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 다음 이야기와, 최고의 클라이맥스와, 길게 여운이 남는 라스트신. 그러니까 네가 협력해줘야지. 공연자로서 말이야."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딸이나 손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예외없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그것은 아마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과, 우리집 딸이나 손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같은 농도, 같은 온도로 섞인 결과일 것이다...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고 또는 앞으로 될지도 모를, 피해자들과 동년배의 여자들은 심한 불안과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지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밝은 표정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라가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 하고 희생자들을 매도함으로써 안도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은 생각한다. 도시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어쩌면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타인을 발아래 둔 채 생사여탈권을 쥐고 모두를 위한 스토리를 통제하는 존재.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흥분에 들떠 추측만 해댈뿐인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보며 오락거리를

제공해주는 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경이다.


사실은 수많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정작 어디론가 묻혀버렸다. 연쇄살인 역시

도시 반대편의 사람에겐 하나의 가십에 지나지 않은 채 소비되고 만다. 마치 해외토픽처럼.

이미 그런 선정적이고 비극적인 스토리들은 계속 수위를 높여가며 제공되고 있었고, 연속선

상에서 연쇄살인사건 역시 최초의 충격을 지나서는 그저 엔터테인먼트, 남일이었을 뿐이다.


그건 합리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들이 사람을 죽여봐야, 자신의 일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친구의 일이 될 가능성이란 건. 대개의 경우 그런

사건은 내가 아닌 절대다수의 '타인'에게 벌어지는 거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크고, 사람은 너무 많다.



언제고 또 나타날 '모방범'.


'모방범' 속의 사건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일들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전화기나 집전화를 이용해서 서로 연락하는 그런 시대이다.

지금은 그나마 거대한 세계에 모래알처럼 흩어진 인류가 조금은 서로를 끌어당기려 애쓰는

도구들이 많아진 시대다. 휴대폰도,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따위의 소셜 네트워킹도.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그런 도구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와

타인 사이에 세워두는 경계선이 좀더 확장되거나, 결국엔 사라질 거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거다. 휴대폰이 생겼어도, 가상 사회가 건설되었어도, 가장 중요한 인간의

깜냥 자체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능력, 의지.


결국, 사람은 어디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혹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서로를 괴롭히고 못견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 반대쪽의 살인마를

키워내는 건 이쪽에서 티비를 보며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편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소모하는 우리들 아닐까 하는 거다. 이 소설이 아무래도 우울한 비극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 거대해진 세계, 인간의 수용치를 넘어버린 세계에서 '모방범'의 도래를 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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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Note The Collector's Edition [25CD Box Set][하드패키지 제작 재발매] 재즈 명반 박스세트 1
덱스터 고든 (Dexter Gordon) 외 연주 / 강앤뮤직 (Kang & Mus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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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근데 벌써 이리 후려쳐서 파는 곳이 많은 건지..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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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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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하려면, 광고 한 줄 못 타는 이 사회의 분위기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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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와인
조정용 지음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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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첨 접하는 사람에게 부담없으면서도 흥미롭게 빠져들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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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9-05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