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 우리 시대 여성을 만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에멀린 팽크허스트 지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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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는 책을 본 동기는 블로그 이웃 중에 도서출판사에서 근무하신 분 때문이다. 현실문화연구라는 출판사는 나에게 다소 익숙한 출판사이다. 내 방 책상 작은 서재에 꽂혀있는 책으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한창완 교수님의 <저패니메이션 하드코어>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세기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논하는 <이것은 미술은 아니다>와 오타쿠 문화연구가 및 자크 데리다 연구자로 유명한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있다.

 

생각해보면 현실문화연구 출판사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에서 일본애니메이션에 대한 서브컬처 연구도서 그리고 예술과 미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한 연구도서로 계속 접한 출판사이다(아마 이것을 보시는 현실문화연구 블로그 담당자 분은 미소를 살짝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담당하는 분의 블로그를 보면 항상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는 책과 동시에 영화 <서프러제트>가 개봉된 것을 홍보했다. 아무튼 그분이 계속 이렇게 소개하고 있으니 분명 볼만할 책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아니 이 책을 읽었기에 이 서평을 쓰기 전 도서관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원리> 1권을 대출받았다.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과격파 중에 하나인 에멀린 펭크허스트 여사의 자서전인데, 왜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빌렸으며, 그것도 정치사회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이란 말인가? 사실 존 스튜어트 밀이 영국에서 살던 시절에 그는 자유주의 철학을 전파하던 이성의 성자였다. 그에게 왜 성자라는 말이 붙었냐면, 존 스튜어트 밀은 아주 성격이 다정하고 친절하며, 이성적 판단을 준거로 하여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대하지 않았다.

 

영구 19세기 불세출의 천재는 정치사회학만이 아니라 경제학까지 마스터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후 고전경제학 중에 하나였고, 자유주의 사상가였으며,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사회주의 사상까지 맥락이 연결되어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책 중에 가장 유명한 서적으로 <자유론>이다. 한국을 보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에는 그에 대한 사상적 기초를 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자유주의 철학사상과 대조비교해보면 그저 코미디에 불과할 뿐이다.

 

자유주의 사상에 철학이 없다면 자유주의이란 이름으로 가려진 파시즘에 불과하다. 오늘도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자유를 외치는 현실에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다시 와서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째든 존 스튜어트 밀에게 <자유론>이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그의 저서 중에서 <자유론>보다는 차라리 <여성의 종속>이 훌륭하다. <여성의 종속>은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아내인 헤리엇 테일러를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적은 저서이다. 책은 그래 굵지 않고 분량도 인문학 서적치곤 짧은 편이다(대부분 정치철학 도서는 페이지가 500 내외이니 말이다).

 

그 책에서 보면 당시 영국의 여성, 특히 아내라는 신분을 가진 여성이 처한 운명이 엄청 가혹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적은 내용은 이미 나는 <여성의 종속>에서 읽은 바가 있었고, 그런 비참한 현실은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 특히 주부에게 전가된 것이다. 물론 <여성의 종속> 이전에도 이런 내용들은 알고 있었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태어난 곳이 영국 맨체스터 지역이고, 그 지역은 영국 내에서 공장이 매우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당시 영국에는 대영제국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며 장기방문객이 있었다. 그자는 매우 악평 높은 붉은 박사 카를 마르크스다. 그의 저서 <자본론>은 한국에서 불온서적 취급당하나, 세계문화유산 UNESCO에서는 아주 가치 높은 책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유럽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고 있으면 마르크스를 넘고 가지 않으면 도중하차할 지경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 당시 가장 많이 참고한 서적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고 그 밖으로 리카도 데이비드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이다. 고전경제학 서적을 연구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하면서 자본주의 시작은 어디서냐는 연구가 시작된다.

 

최근에 읽어본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담론에서 자본주의 정치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 시작되고, 자본주의 경제는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시작된다. 내가 이것을 거론하는 이유는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는 그녀의 자서전이기고, 약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하나의 객관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록은 인류학적인 관점은 없다. 단지 현재 상황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투쟁의식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을 보면 그런 역사적 흐름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찰을 볼 수 있다.

 

<자본>을 읽으면 영국의 역사까지 알 수 있는데, 영국에서 전 자본주의적 체계에서 영주나 국왕은 자신이 관리하던 토지를 농노나 차지농에게 임대했지만, 양털사업이 발달하면서 모든 농지를 양 사육목장으로 전환시키고, 거기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는다. 마녀사냥이 이루어진 16~17세기 공포는 이른바 공공토지의 인클로저 운동과 시기적으로 많은 일치성을 보여준다. 그 당시 가장 피해자는 늙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육체적으로 병들었다. 누군가 의지하거나 혹은 구빈소에 의지했으나, 모두들 점차 그녀들에게 차가운 태도만 보였다.

 

숲속의 마녀는 사실 늙은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식량을 키우거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재배했다. 숲속의 마녀가 약을 잘 만드는 이유는 바로 약초를 잘 아는 여성 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을 밀어버리는 이유는 숲을 목장으로 만들고, 재정적으로 손해만 끼치는 노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캘리번과 마녀>를 보시라). 마녀사냥 이데올로기는 바로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약탈을 일삼다가 주변 군중의 눈치를 보고 그 책임을 약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어느 시대이고, 욕먹을 자를 미리 준비해놓고 마치 자신에게 불리하면 그 구원투수를 마운드로 올리는 경우는 다분하다. 정치사회적으로 뭔가 구린내가 내면 항상 연예인들의 구원구가 던진다. 대신 그들은 <공포의 외인구단>의 오혜성처럼 팀을 이기게 만들지만 어깨가 망가져 투수마운드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가고, 도시빈민이 생기고, 그 중에서 양털에 대한 제조업에 따른 노동자가 탄생한다. 영국에서 기계가 발달되자 메뉴팩처가 발달하고, 점차 남성 노동자가 임금이 높아지나, 너무 기술이 좋아져서 임금이 하락한다.

 

임금을 하락하는 원인은 숙련공 남자 대신 비숙련공 여성과 어린아이에게 과도한 노동을 가한 것이다. <자본>에서 보는 끔찍함이란 상상해도 마음이 아프다. 이제 5살 된 어린아이가 공장에서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며, 심지어 야간철야까지 한다. 젊은 아가씨들은 공기가 통하지 않은 좁은 방에 먼지를 마시고, 바느질을 18시간 가까이 한다. 남자아이들은 30대가 되면 모두 병으로 죽고, 여자들은 신경질환과 폐병으로 젊은 청춘을 마감한다. 예전에 읽은 <전태일 평전>에서 이제 갓 중학교 졸업한 어린 여공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근무하다 병에 시달려 자취방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이야기를 볼 때 참 마음이 아팠다.

 

물론 여자만이 그런 고생을 한 것은 아니나, 여자에게 가해진 폭력적 처사가 다분하다. 문제는 그런 폭력을 시달리는 여성에게 사회는 관심을 주지 않으며(심지어 일반 여성조차도 그렇다), 듣는 것조차 불편할 것이다. 그런 비극은 이미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19세기 초절정을 이룬 것이다. 19세기 공장은 비숙련공 여자와 아이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남자보다 임금이 적었고, 힘이 약한 이유로 저항조차 못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자세히 읽어보면 가장 곤혹스러운 대접을 받는 여성은 주부다.

 

아이들이 7명이 있는데, 불결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영양실조에 걸릴까 애 어머니는 조바심을 낸다. 아이 5명이 있는 어머니는 아이 2명이 군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다고 슬퍼하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 지금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미안한 소리지만, 현대 여성들과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여성은 너무나도 다르다. 아니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만이 아니다.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을 보면 혁명이 시작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서 그 시초는 주부였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집에 어린 자식에게 먹일 식량이 없는 이유다. 여자들이 오히려 혁명 때 남자이상으로 난폭하고 무서운 이유는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 어린 자녀들의 생존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펭크허스트 여사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진 남녀차별에 분노했지만, 그녀에게 더 큰 분노감을 안겨주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들과 먼 미래를 살아간 여성에게 이 굴레의 지옥이 가해진다는 이유다. 펭크허스트 여사에겐 딸이 3명이 있고, 그녀들 역시 어머니를 도와 여성의 정치참여운동에 헌신한다. 펭크허스트 여사의 여동생은 운동 중 감옥수감으로 인해 사망했을 정도이니, 왜 그녀들은 목숨을 걸어가면서 싸우는 것인가?

 

영국의 구빈소와 고아원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입을 것과 먹는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과 제대로 되지 않은 관리로 인해 오히려 거기에 들어간 어린아이의 목숨을 단명 시켰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고아원에 가서 소녀들을 돌보는데, 이제 13살 된 어린 소녀가 아이를 임신했다. 애 아버지는 대부분 그녀들의 애인이거나 친구였으면 다행이다. 소녀들의 아버지거나 친척들 중에 하나였다. 사실 여성인권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은 펭크허스트 여사와 유사했다. 여성인권이 부실하면 아동인권 역시 부실하다.

 

최근 어린이집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보육비와 양육비 문제에서 부모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부모가 있으면 모르나, 고아나 편부모를 가진 아이들이라면 그 입장이 참으로 난감해진다. 한국사회처럼 미혼모나 편부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자칭 선진국은 많이 없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싸우는 이유는 바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개척이다. 또한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면 그들은 남성과 같이 사회적 같은 책임의식과 연대감을 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보면 여성이 만약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충분히 남성과 같은 업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빅토리아시대나 엘리자베스시대도 그렇겠지만, 그녀들은 여왕이었고, 일부 특권을 지닌 왕족과 귀족 여성만 가능했다. 사실 왕족과 귀족을 제외한 하층민에게 능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단지 거기서 여성이 조금 더 심각한 부조리에 시달리는 사실 외에는 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계급투쟁적인 요소다. 펭크허스트 여사가 자신의 가족도 그러하나, 사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진 여성들은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빈민이었다. 남편이 전쟁 중에 사망한 여성들에게 만일 자녀가 있다면 이에 대한 지원이나 대안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여성의 종속>에서 폭력적이고 거만한 남편은 그동안 아내가 모아둔 돈까지 빼앗고, 그것을 저지하면 폭력을 가한다. 문제는 그것이 분명 나쁜 일이라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정에서 그런 폭력을 용인한다면 그 사회는 더 심한 상황이 발생한다. 펭크허스트 여사와 많은 여성들이 여성참정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녀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가혹행위는 참으로 심각했다. 말을 타고 있는 경찰들이 말발굽으로 위협하고 말로 위협하며, 때로는 구타까지 했다. 감옥은 환경 위생적으로 취약했고, 금식운동을 벌일 때 억지로 호스를 넣어 음식을 주입했다. 고문 같은 처사는 오히려 더 심한 저항의식으로 이어진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들을 방해하는 정치인들에 대하여 투쟁하고, 늘 집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전달했다. 책은 1차 세계대전에 멈추고 후기로는 1928년 그녀가 보수당원으로 가입하다 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얼마 후 여성참정권이 승인되었다고 전한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여성참정권을 도입될 수 있는 배경은 아주 복잡다양하다. 인권을 위해서라 하지만, 그 동기는 그동안 공장에서 노동대상이 남성이었다면 그 범주가 여성에게 이전되었다.

 

경제적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적인 권리까지 이행해야 했으며, 정치적인 결정으로 통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전쟁의 발발은 그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젊은 남성들은 전장에 간다. 많은 청춘들이 사망하고, 도시는 고요한 침묵을 지킨다. 그 자리를 메우는 자들은 여성이다. 여성들이 경찰관, 소방관, 공무원에 나간 것은 전쟁이 나도 사회는 유지되어야 하고, 그들이 그 사회를 지켜도 남성 못지않게 능력을 보여주고, 어느 부분에서 남성보다 우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현실적 상황에 대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겠지만, 재래식 사회에서는 언제나 무거운 기계를 들고 무거운 장비를 다루어야 했기에 남성위주의 노동으로 이어졌고, 그것으로 인해 남성에 대한 지배권을 주어졌다. 전쟁이 나면 미사일과 총으로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창과 방패를 들고 갑옷까지 입을 경우 전쟁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특권의식은 귀족부터 시작하여 하층민까지 분포했으니, 그 차별사회에서 싸우던 펭크허스트 여사의 일기는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남녀차별은 있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픈 것은 영국에서 남녀차별이 있다고 해도 왕족과 귀족의 여성은 그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이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여성인데도 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회적은 생물학적인 요소도 있지만 계급적인 요소 즉 정치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다. 내가 이것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위안부 문제를 국가가 아닌 민간으로 떠밀고, 정부는 일본의 망언에도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다. 위안부에서 성폭행 당하신 분들과 현재도 성폭행 당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나 시선은 안타깝다.

 

예전에 프랑스 앙굴렘 만화전시회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비극을 다룬 <지지 않은 꽃> 전시회를 열어 성공리에 마쳤다. 많은 만화작가들은 억울하게 인생을 빼앗긴 분들의 한을 세계에 알리려 했는데, 이때 여성가족부에서 한 것은 실적관리로 내세운 것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입막음까지 당한 여성들은 무엇이고? 그런 그녀들을 외면한 여성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투쟁의 대상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없었다면 아마 현재의 여성인권이란 많은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먼 미래에 살아간 후예들의 행복이다. 자신 혹은 자신 이전 시대에 살아간 인간들과 같은 삶을 반복되거나 그보다 못하다면 그녀들은 그렇게까지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여성의 인권을 지지하는 조건은 사회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같이 해결할 의지가 있을 경우다. 현재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통과 책임의식을 외면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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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0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항상 느끼지만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을 읽으면 이것이 리뷰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요. 전 사실 리뷰를 빙자한 추억팔이를 하거든요;;; 진짜로 책을 읽고 쓴 것은 바로 이런 글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요 아 부럽다...진심...

근데 진짜 회사 다니시는 거 맞아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책더미에 파묻혀 뿔테 안경을 쓰고, 이리 저리 고민을 하는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네요 ㅋ

혹시 글을 어떻게 쓰시나요? 집필 방법이라고 할까요? 무쟈게 궁금합니다. 요즘 `신의 나라는 네안에 있다`를 읽고 있는데 이런 식의 글로 쓰고 싶어요. ㅎ 리뷰 꿈쟁이를 도와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6-07-03 13:53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맥주도 마시고, 핸드폰 게임도 하고, 애니메이션도 많이 봅니다. 환경공학 전공자인데 환경이 인류학과 많은 연계성이 있어서 어쩌다 이런 식을 되었네요.

저 이것 리뷰 쓸 때 네이버에 어떤 이상한 (아마 여성인듯) 블로그에게 되게 짜증나는 덧글로 답글해주었는데...아무튼...리뷰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독서의 토대인 것 같습니다...철학 책부터 읽어야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는듯..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