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노래 일본군 위안부 만화
정기영 지음, 김광성 그림 / 형설라이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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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아베정권이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시키려는 정책을 시도하려 하고, 과거 다른 국가를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려고 한다. 침략은 했으나 그것은 그 나라를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은폐하려 한다. 그렇기에 그 시대 일본이 저지른 행위를 진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다른 식으로 말한다. 일본에서 유네스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군함도, 그것은 완전히 지옥의 섬이었다. 조선에서 징용한 사람들을 강제로 노동하여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그것도 더위와 피로,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의료의 혜택조차 노동력의 징발여부만 가렸다.

 

그런 과거의 행위가 왜 지금에 논란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 그런다.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그것은 우리하고 상관이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일은 당장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정치적 형태가 자꾸 과거의 모습을 속이고, 군사적인 요소를 부각한다면 또 다시 저런 문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영향으로 100% 재현되지 않겠지만, 어디서 모른가 저런 비인간적인 행동까지는 아니나, 많은 인간들을 절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라는 것은 왜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어느 위기에 빠지면 일본은 그때도 야욕을 보이며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고, 그 기억에서는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이 많다.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부담을 준다. 과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단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지 않는 꽃>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실재로 존재했던 일들, 영원히 지옥의 악몽에서 풀려날 수 없는 저주, 사실상 마음 깊이 담아두는 것만으로 상처가 깊은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란 상당한 고통이다. 한국사회는 여성에 대한 기준이 참으로 난감하다. 성폭행은 분명 나쁜 것이고, 성폭행은 당한 대상은 약자인 여성이 많으나, 그들의 피해사실을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다. 과거 형사나 경찰이 피해 진술과정에 대해 들어보면, 피해여성에게 상황묘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 해 달라고 한다. 그것은 피해자가 아주 두려워하던 순간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충격으로 인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진다.

 

예전에 성폭행 당해본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피해과정을 숨기거나 고소를 취하하던 이유가 바로 여기다. 재판과정에서 다시 그 상황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더 심각하게 찌르는 것과 같다. 위안부 할머니는 아마 그런 성폭행 피해여성에 비교하면 괴로움이 더 심할 것이다. 집단성폭행에다가 잔인한 고문과 살인위협에 항상 시달렸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 꽃>에서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할머니가 공장에 일하러 간다는 말만 믿고 따라가는데, 알고 보니 동남아 일본군 진영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으로 계속 패배를 겪고 있었고, 위안부의 공급은 패배의식에 짓눌린 일본군들의 사기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자의 성적인 욕구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한편으로 정복욕을 충족시켜주는 해결방안이었다. 전 근대적인 사회에서 전쟁이 나면 항상 승리한 침략자는 마을 안에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자신의 첩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전쟁에서 항상 전리품으로 다루어진 것이다(그런다고 여성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몰살당하는 남성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는 현지에서 약탈이 불가능한 일본군들이 강제로 약탈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행위이다.

 

작품에서 사병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복무신조를 지켜야 하는 장교가 오히려 위안부 처소 안으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다. 이미 전쟁에 의한 정신적 외상이 극으로 치닫고, 피해의식과 파시스트의 광적인 요소는 학살과 자살 등과 같은 만행으로 연결된다. 예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16살의 꽃다운 소녀들이 끌려오면 얼마나 두렵고 괴로워했을까? 아직 몸과 마음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강제로 성노예로서 성폭행 당한 소녀들은 자신의 성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 강제로 칼로 성기부분을 찢은 만행을 들었다.

 

<지지 않는 꽃>에서도 그 내용은 나왔다. 다행히 더 끔찍한 장면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일본군들이 전투를 벌일 때 자신들의 병력피해를 줄이기 위해 위안부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일부러 진열의 앞에 서게 하여 적군들이 쏘는 총알을 대신 맞게 하는 총알받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한 많은 세상, 희망도 없이 그저 유린당한 채 죽어야 하는 그녀들의 운명에서 일본의 사죄는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패악을 저지른 자들은 현재의 자는 아니지만, 그것을 잊으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점이다.

 

독일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면서 많은 지탄이 되었는데, 그것은 인종차별로 이어지고, 인종차별의 극단성은 테러리즘으로 이어진다(물론 그걸 저지르는 광신자들은 정의라고 믿는다). 일본의 사과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망각하면 망언을 계속하고, 일반 국민들까지 그런 나쁜 정신이 유포되어 한일 양국 간의 우호가 나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사과한다고 해서 사과 받는 쪽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와 용서로 통해 서로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행은 저지른 일본은 상당한 젊음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과 형, 친구들이 시체로 돌아오거나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으니, 피해자가 가진 피해의식만큼 가해자에 동조하던 자들의 주변인들도 피해의식을 가진다. 결국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야 한 게 전쟁이란 허무이다. 국가정부의 오류로서 전쟁과 전투로 죽은 군인들은 죽을죄가 없이 죽어야 했던 희생자다. 물론 그들이 전쟁 중에 무고한 자를 죽였다면 죄는 된다. 단지 그 죄를 만들도록 한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그런 자들의 밑에서 이익을 챙기고, 이권을 이어받은 자들은 용납할 수 없다.

 

아베정권이 오면서 일본전쟁범죄 가문의 후손들이 정계와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자국의 국민뿐만 아니라 타국의 국민들까지 위험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자신의 망상이 국가의 존립과 위엄이라 말한다. 피해자를 두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발뺌 하는 현실에서 <지지 않는 꽃>을 보는 것이란 바로 우리의 미래까지 지키는 것까지 연결된다. 꼭 위안부 할머니라 하여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이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일어나면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저래 당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보편적 조건에서 일어날 현실로서 접근한대도 그건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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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21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안부 할머님들 다큐 보니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을 하고 난 뒤엔 끙끙 앓으시더군요. 잊으려했던 상처를 다시 꺼내 헤집으니 상처가 또 터지는 거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상태를 견디실 거라 생각하니....
시간이 약이 된다는 말, 아픔과는 상관없는 참 쉬운 말이라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1 09:31   좋아요 0 | URL
시간이 약인 것은 아픔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아픔을 망각하게 해주는 진통제일 뿐이죠. 진통제 맞는다고 병이 치유되는 게 아니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