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없는 기분
구정인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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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만큼 피곤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에너지를 뿜어대면서 활력이 생기기도 한다. 뭔가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워하는 일이 힘껏 애써야 하는 일이 되는 게,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게 슬프다는 것 말고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거 아닐까 싶었다. 그건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생기는 이상한 마음이기도 했고, 누군가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때도 비슷하게 작용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을 거야, 하는 마음의 다짐이 내 표정을 악하게 만들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받은 그대로를 돌려주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믿었다.

 

혜진에게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버지가 고독사했단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봐도 한참 전이다. 아버지와 혜진은 그런 사이였다. 누군가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 관계라고,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물을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혜진의 마음과 태도가 이해되더라. 나부터도 그랬지만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듯 이해할 수 없는 부모들의 태도가 이런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는 걸 알아서일까. 그렇게 소식을 듣고 언니와 함께 찾아간 경찰서에서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을 처리하는 절차를 알려준다. 황당하지만 부모의 죽음을 알리는 경찰 앞에서 뭐라고 표현할 방법은 없다. 그저 서류상 자식이라는 관계를 부정할 수 없으니 이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면 된다.

 

이런 기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왕래 없던 아버지가 고독사 했고, 3주간 방치된 시신이 이웃의 신고로 발견되었으니 가족이 와서 수습을 하라는 연락을 받는 일. 연락을 받는 순간에는 놀라긴 했겠지만, 곧 화가 나지 않았을까? 혜진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생각도 없다. 그녀가 자란 세월의 흔적들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죽음 따위 관심 밖의 일이어야 했다. 아버지가 평생 가족에게 해왔던 일이 무엇이던가? 가출과 외도를 일삼고, 사업과 주식 투자에 몰두하다 가산을 탕진했다. 그런 이유로 집안의 가장은 엄마가 되었으며, 항상 부족한 생활에 시달려야 했던 가족들이다. 아이였던 혜진과 언니는 따뜻한 가정을 꿈꾸기보다 집을 들락날락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어른 같은 아이로 자랐고, 그런 남편을 아이들의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했던 엄마의 슬픔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힘든 생활을 견뎌오다가 부모님은 헤어졌고, 그렇게 헤어진 뒤에도 아버지는 변한 게 없었다. 툭하면 일을 벌이고 자식들에게 돈을 요구했으며, 마치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당당했다.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지만, 애초에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가족이 이렇게 상처받고 와해할 지경에 이르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오랜 세월 그런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인연을 끊고 지낸 게 2년쯤 전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고독사를 알리는 전화가 혜진에게 반가울 리 없다.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밉고 화가 나지만,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야 할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처리해나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자기 가정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맞는 거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끼니를 제대로 챙길 수도 없었고, 아이를 돌볼 수도 없었다.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도 힘들었다. 남편이 옆에서 집안일을 많이 해주고 아이를 돌봐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혜진의 일상이 있다. 혜진이 움직이고 돌아다니면서 챙겨야 할 그녀만의 일상이 있다. 그것도 해내지 못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은 극단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자꾸만 아버지의 마지막 공간이 생각났다. 오래되어 방치된 시신, 그런 곳을 깨끗하게 치우고 나가야 하는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청소대행업체를 찾았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냄새를 마주해야 했다. 방치된 아버지의 시신이 남긴 건 오래되다 못해 젓갈 냄새가 나는 유품과 빚이었다. 견디고 일어서야 했다. 남편과 병원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주인공의 마음을 생각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오랜 세월 힘들게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럼 다 정리된 기분으로 개운해야 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뭔가와 마주해야 하는 이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말이다. 나는 그걸 아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혜진은 그런 기분을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기분이 없는 기분. 형체가 없는 기분일까? 뭘까?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기분이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내 마음이 없어진 기분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하지 못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 급기야 '나'라는 사람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크게 바라는 것 없었다. 그녀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기 삶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자꾸만 들여다보던 마음은 엉망이었다.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는 게 뭔지,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 상태가 기분이 없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는...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고 가능한 일들. 좋은 거 앞에서는 좋아하고, 싫은 거 앞에서는 싫어하는 기분이 드는 게 당연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당연한 일을 느낄 수 없다는 게,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게 너무 슬프게 들린다. 부모의 부재가 불러오는 상실감 같은 게 아니었다. 미워하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개운함이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는 죽었는데,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다. 그건 아버지의 고독사 때문일까? 아니면 살아오는 동안 아버지 때문에 힘들었던 성장 과정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건, 이 기분이 우울하다는 것과 이 우울을 떨쳐버려야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그 힘든 여정을 혜진은 시작했다.

 

가끔 들려오는 고독사가 내 아버지의 이야기가 된다는 상상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고독사는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고독사가 왜 이르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홀로 생활하게 되는 과정이 누구나 비슷하지 않겠지만, 이런 경우의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을 힘들게 하고 가족과 헤어진 아버지가 그런 죽음으로 세상을 마무리했다는 게 안쓰러울 법도 하건만, 왜 나는 혜진의 아버지에게 자꾸 분노가 이는 걸까. 왜 그런 마지막으로 끝까지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떠나는 걸까 싶은 원망이 들었다. 결국은 마음의 병까지 얹어주고 떠난 당신을, 당신이 죽었는데도 용서할 수가 없다는 화가 치밀었다. 이것도 우울이라면 나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겠지만,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그대로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치료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할까 싶지만, 언젠가 혜진도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치유의 결말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경험한 슬픔과 우울은 가슴에 새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한번 내 몸에 들어왔던 병이 나가고 면역력이 생겼을 것 같지만, 사실 언제나 같은 강도로 오는 병이 아니더라도 그 병은 비슷하게 또 마주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는다. 나는 그렇더라.

 

우울증이 생겨서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 된다는 것. 기분이 없는 기분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너무 생생하게 들려온다. 어쩌면 이런 비슷한 기분을 우리도 종종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그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진단받지 못한 병이 되어버려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곤 하지 않았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우울증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하는 우리 앞의 일들에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지 묻기도 하는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의 감정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는...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대부분이겠지만, 그 문제들에 따라오는 감정의 문제는 누가 해결해주기 어렵다. 혼자 견뎌내야 하지만 분명 주변의 도움도 간절해진다. 가족과 친구, 혹은 전문가의 진료까지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방법을 몰랐던 건 아닌데, 선뜻 손 내밀기 어려워서 주저하던 것을 이제는 당당하게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혜진에게 어느 날 닥친 아버지의 고독사는 그동안 혜진의 마음에 담아두었던 산을 하나 넘어가는 일이었다. 이 산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다음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랜 세월 그녀의 삶에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한 사람에 관한 거의 모든 감정을 털어내고 행복을 찾는 일은 너무 어려웠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사람마다 다르고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지금 처한 환경도 달라서 혜진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지 몰라도, 세상을 통과하는 방법 하나를 배운 것만 같다.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감정과 우울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구체적인 위로와 치유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혜진이 방문했던 병원의 선생님이 하는 말처럼, “우리 목표가 약을 끊는 것은 아니잖아요? 잘― 지내는 것. 그게 우리 목표”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게 되는 이 기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이 삶을 유지하고 오늘을 잘 지내는 게 목표가 되는, 행복해질 수 있는 구체적인 위로였던 거다. 나 스스로 잘 지내게 될 일상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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