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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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건 육체가 늙고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다. 서글퍼지기도 하면서 도무지 늙어가는 것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고 투정도 부리게 되지만, 찾아보면 나이 듦의 장점이 있다. 세월을 흘러보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그러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던 그때 말고, 시간이 흘러야만 알게 되고 확인하게 되는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서커스 나이트』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만나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다. 느리고 더디게 가면 도태되고 낙오된다고 믿는 세상에서, 느리게 천천히 보내는 시간에서 만나는 상처 회복의 순간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매력 있는 작품이다.

 

사야카에게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 사이코메트리. 어떤 사물을 만지면 그 사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땀 냄새가 밴 티셔츠 한 장을 만지면 그 옷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편지의 발신인은 오래전 헤어진 남자 이치로. 현재 사야카의 삶을 보면 이치로의 편지는 뜬금없는 일이다. 사야카는 아이가 있고, 아래층에는 시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남편은 없지만 한 가정의 유부녀인 것이다. 이치로의 편지는 뜻밖이었지만, 편지의 내용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야카가 사는 집 마당에 소중한 무언가가 묻혀 있으니 찾으러 가도 되겠냐는 내용. 물론 이치로는 그 집에 사야카가 사는 줄 모르고 보낸 편지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살던 집에 내가 살고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특이한 인연에 소설이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서 계속 읽게 되는데, 요시모토 바나나의 담백한 문장이 어김없이 담담하게 읽게 한다. 조금 특이한 가족 구성원의 등장부터 그러하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시한부 남자에게 받은 청혼, 죽기 전에 자기 아이를 낳아달라며 말하는 남자나 그 제안에 응한 여자나 닮았다. 일찍 부모를 잃은 사야카에게 그렇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아무 조건 없이 사야카를 받아준 시부모님, 죽는 그 날까지 사야카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남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아이. 그리고 이치로의 편지에서 확인한, 마당의 히비스커스 나무 밑에 묻힌 작은 뼛조각을 발견한 사야카는 그 뼛조각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렇게 오래전 시간과 조우한다. 뭉개져서 굽어버린 그녀의 엄지손가락, 마당의 나무 밑에 묻힌 것은 왜 이치로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 그녀의 지나간 시간이 하고 싶은 말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천천히 듣게 된다.

 

사야카의 지나간 이야기가 현재와 교차하면서 하나씩 들려온다. 지나간 시간의 중심에는 이치로와 연관된 일들이 있는데, 그때 그 시간이 그렇게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조금 더 너그럽게 이해하고 융통성 있게 흘려보내도 될 일들이 그때는 왜 참지 못하고 도망쳤을까? 이치로는 왜 사야카를 좀 더 찾아가지 않았는지... 아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아무리 말해도,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도망치는 게 방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여기며 자기 안위를 살폈을 것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겠지. 사야카가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이치로가 사야카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치로의 어머니가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심각해질 거 없어, 모든 건 지나가니까 즐겨, 하는 메시지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기분이 좀 편해졌다.

이치로의 방에 있을 때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 겨우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조금은 미안해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변해 간다.

아무리 불러도 사토루는 돌아오지 않고, 미치루는 성장해 간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무리 없을 일만 하고 싶다.

간절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됐어, 그다음으로 넘어가, 하고 사토루가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78페이지)

 

이 지점에서 확인하게 되는 게 바로 시간의 힘인 것 같다. 그때는 잘 몰랐고 아니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감당하게 되고 이해가 되는 순간이 되는 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마 그때는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을 담아낼 마음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해서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 그때를 어렵게 했든지 내 안의 자리가 있어야 그 많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보듬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어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이치로의 어머니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이치로가 실행에 옮기면서 사야카와 다시 만나게 된 건, 삶의 그런 이치가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때 마무리하지 못했던 감정을 정리하고, 뒤늦은 오해를 풀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는 순간. 시간이라는 다리를 건너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강조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모든 상처가 다 아물고 없었던 일로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자기가 감당하고 정도의 몫으로 이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성장하고 배워가는 시간의, 흐르는 세월이 담아낼 수 있는 장점이라고,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늙어가는 육체가 버겁고 슬프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이 쌓여 경험하고 배운 것들 때문에 또 지금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걸, 지금은 안다. 지나간 많은 시간 속에서 나도 사야카처럼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게 그 순간의 답이라고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어설프고 서툴러서 그래서인 줄 모르고 말이지. 그때와 지금을 연결하는 긴 시간은 저자의 말처럼 회복의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만 향한 시선에 미치도록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때는 거기서 머물러야만 치유되는 상처들이었을 거라고.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현재의 시간이 또 다른 회복을 불러왔다. 사야카가 작은 뼛조각에서 읽은 간절한 마음을 듣고 용기 내어 연락하고 다시 마주하며 지나간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시간.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힘을 서서히 깨닫는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왔더니,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지내왔더니, 어느 순간 보니까 상처와 아픔은 회복되어 있기도 하더라는 말을 이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평범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 배경이나 캐릭터는 그다지 평범하지 않았다. 사야카와 이치로가 연결된 히비스커스가 심어진 집, 남편도 없는 집에서 시부모와 함께 하는 일상,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발리, 발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야카 성장의 시간, 손길이 닿으면 사물의 이야기를 읽는 능력. 어쩌면 자연이 삶 곳곳에서 묻어 있으면서 인간의 일상을 주관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발리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자연이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묘한 분위기 속의 일상에서 특별한 사람들의 정이 또 평범하게 보이는 건 무슨 조화인지. 결국은 그렇게 돌고 돌아서 우리 삶의 평범함을 다시 비춘다. ^^ 아마 그건 요시모토 바나나가 가진 특이한 능력 때문인 것 같다. 낯설고 어색하게도 보이는 분위기로 소설을 읽게 하면서도, 독자가 우리 삶과 닮은 평범함을 찾아내게 하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와 생각을 꺼내어 공유하게 한다는 것을.

 

사람은 저마다 많은 사람들과 이어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며 조금씩 바퀴를 돌린다. 그것도 자연의 섭리의 일부다. (408페이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순간을 들려준 것 같다. 버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존재하는, 하지만 이제는 어둡지 않게 만들어야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되는 기회. 한 걸음 한 걸음, 때로는 웅크리고 때로는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아픈 기억이라도 꺼내야 한다면 꺼내어 보면서, 나아가는 걸음들을 이렇게 듣는다.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상처를 만드는 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회복의 시간일 수도 있다. 저마다 지금 시간이 만드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언젠가는 그 회복이라는 것을 마주할 거라고, 세월이 조금 흘러야 가능한 일이라면 조금 기다려도 괜찮지 않으냐고 말하고 싶다. 지나고 보니 조금은 알겠더라, 하는 말을 굳이 여기서 한 번 더 적용해본다. 지금은 그 시간을 조금은 더 지켜보자고 말이다. 빈틈없이 뭔가가 꽉 들어차 빽빽했던 마음에 곧 공간이 생길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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