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책을 좋아하는데, 예전만큼 어린이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한다.

아무래도 조카가 분가한 뒤로 조카랑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전히 책 읽기가 게으른 탓이기도 하고,

요즘에는 어떤 책이 나왔는지 먼지 찾아볼 기회가 줄어들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작년에, 페미니즘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 동화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다시 꺼내본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제목부터 익숙한 이야기가 굳이 다시 읽을 필요를 못 느끼고,

그냥 지나쳐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 <아기돼지 세 자매>는 <아기돼지 삼 형제>인줄 알고 그냥 지나칠 뻔하다가 읽게 된 책이다.

 

아기돼지 세 자매는 아주 깔끔했다. 엄마 돼지한테 가정교육도 아주 잘 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과 다른 아기돼지의 연령이다. 아기돼지 세 자매는 사실 아기가 아니다.

결혼할 나이가 된 어른 여자 돼지다. 어느 날, 엄마 돼지는 세 자매 돼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너희도 이제 통통하게 살이 잘 오른 예쁜 돼지 아가씨가 되었구나.

자, 이 금화 주머니를 하나씩 받아라. 가서 가장 좋은 신랑감을 찾아보도록 하거라……."

 

엄마돼지는 아기돼지들에게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떠나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신랑을 찾아 떠나라고 한 거다.

 

 

 

 

엄마돼지에게 돈주머니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세 자매는 헤어진다.

(같이 떠날 줄 알았는데) 서로 다른 길을 찾아서 떠났다.

 

 

여기서부터 『아기돼지 삼 형제』와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떠날 때 엄마 돼지는 금화 주머니를 준다.

원작이 무작정 길을 떠난 돼지 삼 형제가 집 지을 재료를 얻어 집을 지었던 것에 비하면 돼지 세 자매는 금화를 들고 떠난다.

그렇게 받은 금화로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이미 지어진 집을 사는 거다. (오~ 이 방법이 더 간단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다.)

이 부분을 보니 어느 정도는 변화해가는 사회에 맞게 구성된 게 아닐까 싶다.

돈이 없으면 뭘 못하잖아. 누가 집 지을 재료를 그렇게 준다고?

그렇게 길을 떠난 돼지 세 자매의 행보가 기가 막힌다.

 

편안한 걸 좋아하는 첫째 돼지는 가진 금화 모두 털어서 커다란 벽돌집을 산다.

어느 날 아침, 첫째 돼지가 창밖을 내다보니 멋지게 차려입은 돼지 한 마리가 청혼하는 거였다.

"아리따운 아가씨, 문 좀 열어 주세요. 제가 귀부인이 되게 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돼지는 문을 열어주면서 생각했다. 예의 바르고, 돈도 있는 것 같고, 마음에 드니까 저 정도면 좋은 신랑감이라고.

그러나 그 돼지는, 돼지의 탈을 쓴 늑대였다. 첫째 돼지는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지.

 

둘째 돼지는 가진 금화 반만 들여서 나무로 된 예쁜 집을 샀다.

첫째 돼지 때와 마찬가지로 멋진 돼지의 청혼을 받는다.

잘생기고 힘도 세어 보이고, 겨울에 땔나무 걱정은 없겠다는 판단에 그 돼지를 좋은 신랑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러나 역시 돼지의 탈을 쓴 늑대에게 잡아먹혔다는 결론.

 

이제 셋째 돼지가 궁금하겠지?

 

늑대는 돼지 가면을 쓴 채로 보리수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 있었다.

돼지 두 마리로 포식하고 나니 배가 불러서 좀 쉬어야겠다. 소화도 시키고 낮잠도 좀 자려고.

그런 돼지를 지켜보는 늑대 한 마리가 있었으니, 굉장히 사나워 보인다. 상황이 역전된 거다.

'돼지 가면을 쓴 늑대'는 '늑대 가면을 쓴 돼지'에게 자기가 사실은 돼지가 아니라 늑대라고 설명하느라 애를 쓰는데,

그에 '늑대 가면을 쓴 돼지'가 말한다.

"그래? 저기 가서 지푸라기로 만든 집에 숨어 있는 셋째 돼지를 잡아먹으면 네 말을 믿어 주지."

'돼지 가면을 쓴 늑대'는 지푸라기 집으로 뛰어들면서 셋째 돼지를 후식으로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어디 셋째 돼지 캐릭터가 그렇게 쉽게 잡아먹히는 것이더냐.

지푸라기 집은 셋째 돼지가 늑대를 잡기 위해 놓은 덫이었다.

그렇게 늑대를 포획한 셋째 돼지는 늑대를 사로잡았다는 소문이 퍼진다.

그래서인지 셋째 돼지와 결혼하겠다는 돼지들이 줄을 섰다는 후문이... ^^

하지만 셋째 돼지가 가장 좋은 신랑감을 찾았다고 나오지는 않는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아기돼지 삼 형제』보다 <아기돼지 세 자매>가 훨씬 재밌게 읽힌다. 글로 보면 A4 종이의 절반이나 채워질까 하는 정도의 분량인데, 그 흐름이 통쾌해서다. 독립하라고 집에서 내보냈던 돼지 삼 형제와는 아주 다르다. 돼지 세 자매에게 신랑감을 구하러 내보낸다는 설정은 참 구닥다리 같지만, 그 여정에서 보이는 돼지 세 자매의 태도는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비춘다. 외모나 태도로만 판단한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는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이 정도면 뭐, 하는 계산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거다. 돼지의 탈을 쓴 늑대였으니, 늑대의 손이나 발만 보았어도 돼지가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신중하고 세세하게 상대를 살펴볼 생각을 못 한 거다. 반명 셋째 돼지는 늑대가 쓴 가면을 똑같이 이용한다. 늑대가 돼지 가면을 쓰고 돼지를 잡아먹었으니, 돼지도 늑대 가면을 쓰고 늑대를 잡아먹어야지!

 

 

 

 

(늑대를 포획하고 난 후의 셋째 돼지 표정 좀 봐라. 저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돼지 자매 두 명은 죽었지만, 신랑감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길을 떠난 돼지 세 자매가 얻은 교훈은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아마도 그건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사는 법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가 똑바로 서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 동화였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먼저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 역시.(이 부분은 경쟁 사회에서 필요한 자세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적당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마지막 반전은 참 대단했다.

신랑감을 구하러 떠났던 여자 돼지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나.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처음 길을 떠난 이유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거다.

신랑감을 구하러 떠난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신랑, 결혼이라는 것은 삶을 차지하는 많은 의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니까.

여자의 행복이 결혼만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나, 어떤 남자를 선택하느냐에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이나

요즘 세상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개념은 아니니까.

사실 이건 여자 남자 따로 놓고 볼 일은 아닌데 말이다.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결혼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건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인생의 법칙이 아니라는 거다.

 

『아기돼지 삼 형제』보다 훨씬 현실적이어서 파고드는 메시지가 강하고,

통쾌한 결말에 큰소리로 웃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이야기다.

이 짧은 동화 한 편으로 요즘 시대의 많은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뭔가를 해결하고 찾아가는 느낌이 좋다.

 

 

페미니즘 동화를 검색하다가 같이 발견한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는데,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주인공들이 멋있어서 아직은 코딱지만한 조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들이다.

그동안 우리가 만났던 동화 속 공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색다른 캐릭터들, 21세기를 사는 여성들에게 여자 어린이들에게 필독서로 보여주고 싶은,

굳이 어린이가 아니어도, 엄마가 아니어도, 만나보면 좋을 책들이다.

 

 

 

 

 

 

 

특히 <종이 봉지 공주>는 마지막 페이지가 압권이다. 너무 멋있었던 사이다 공주 때문에 박수를 막 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린이(청소년) 책을 고르거나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책 한권 더.

 

 

 

 

 

 

 

아이들 책을 바라본 최윤정 작가의 평론집인데, 어린이 문학을 보는 우리의 시선과

책 속의 구절에서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감정들, 실수들, 웃음들을 함께 볼 수 있다.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골라놓은 책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굳이 부모가 아니어도 어른이 된 우리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아이들에게 보여야 할 태도, 말 같은 것을 배우는 또 하나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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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06-2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롭네요!!

구단씨 2018-06-29 10:08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읽고 저도 많이 웃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