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7부터

그렇다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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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P13

아마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즉, 그런 사진이 촬영됐던 군사 병원의 외과 의사)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 P67

초창기 전쟁 사진들 중 걸작이라고 칭송 받은 사진들이 대부분 연출된 것이었다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84

주검들뿐만 아니라, 적나라한 얼굴을 공개하는 것도 늘 엄격하게 금지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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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종의 품위 차리기인데, 타인들(즉, 자신들의 적)에게는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그런 품위차리기이다.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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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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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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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자신들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광경을 사진에 찍어 전시하는 것고 이와 똑같은 일이다. - P109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들에 달려 있는 설명에 그가 찍은 무력한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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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유명인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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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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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이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 P120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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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미어질 듯한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줄 수 있는 능력을 좀체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사진들은 뭔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사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 P135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는 이렇다. 이제 막 샘솟은 이런 감정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그런데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그들’(그런데 ‘그들’은 또 누구인가?)이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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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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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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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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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

문제는 1920년대에 이르러 한국기독교가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이다. 조직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하나는 조직의 자기 존속을 위한 ‘유지의 메커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의 메커니즘‘이다. 문제는 유지의 메커니즘이 강해질수록 목적 전치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본래의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사실상 목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10년을 전후로 조직을 정비한 한국기독교는 유지의 메커니즘이 과잉되어 제도화된 교회를 지키고, 성장, 확장하는 대 온 힘을 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목적 전치 현상이 발생하여 한국기독교는 조선총독부의 지배체제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p.60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길을 걸으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변화들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한국기독교의 심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도 존재한다. 특히, 한국기독교는 전쟁을 지지하고 침략에 협력한 ‘폭력의 경험‘을 통해 평화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데 실패하였다. 이 부분이야말로 우리가 한국기독교의 친일협력 문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p.128

이는 점차 회개가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일대일의 문제가 되어버리고, 회개의 진정성을 감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한국기독교의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영화 〈밀양〉에서 "하나님께서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고 말한 살인범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학살에 가담한 기독교인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한국기독교의 천박한 회개신학이다. 천박한 회개신학은 중죄와 경죄의 구분을 사라지게 하는 ‘죄의 평준화‘를 수반한다. 전쟁 시기에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죄에 대한 이해가 사유화, 간소화, 관념화되었기 때문이다. ••• 이들에게는 아마 종교적인 ‘구원의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문제들을 진정으로 반성했다면 공적과 사과가 따라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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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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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논리가 합쳐지는 것은 같은 것을 향하던 것들이 사실은 다른 것이라는 걸 알게되는 것.

형식(# a b)

p.395 창작노트

소설에서 우리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로 놀라운 동시에 불가피한 결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계 디자인의 우수함, 이를테면 매우 정교하면서도 극히 자연스러운 발명품 따위를 논할 때도들어맞는 표현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이 정말로 필연의 산물은 아니며, 그것들을 일시적으로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의창의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 위의 등식에 관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것이 놀랍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령 이 등식에서 쓰인 수나 , , i 를 각기 다른맥락에서 몇 년 동안이나 써 왔다고 하더라도, 설마 이것들이 이런 특이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전개식을 보면 이 등식은 정말 불가피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치 절대적인 진리의 편린을 목격한 듯한 외경심을 느끼는 것이다.
수학은 모순된 체계이며 그것이 내포하는 놀라운 아름다움 모두가실은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증거와 직면한다는 것은, 내게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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