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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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자와 리카가 횡령을 시작한 것은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사는데 현금이 모자랐고, 인출기에 다녀오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마침 고객에게서 부탁받은 돈이 있어 얼마를 꺼내 값을 치른 뒤, 금액을 채워 놓았다. 그렇게 빌려 쓰고 채우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고, 익숙함이 불편함으로 바뀌는 것 역시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카는 은퇴한 고객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단정한 외모와 다정함 덕에 실적이 높았다. 그래서 횡령할 수 있는 금액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시작은 고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남편과 소원했던 리카는 고타의 관심에 행복했다. 띠동갑 차이가 나는 대학생, 젊음이 주는 싱그러움과 애정 어린 손길은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리카는 자신의 저축과 고객의 예금을 허물어 고타의 빚을 갚아준다.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돈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가꾸는데도 쓰였고 고타와 시간을 보낼 호텔의 스위트룸과 고타의 외국 여행 경비, 급전이 필요한 친구와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족에게도 돌아갔다. 처음엔 갚을 생각이었지만 씀씀이가 커지자 횡령액수가 늘어났고 나중엔 돌려 막는데 급급해진다.


태국으로 도피한 리카는 강가에 서서 생각한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만약’들은 말 그대로 시행되지 않은 가능성들이기에 부질없다. 결국 새로운 나를 만들자, 들키면 도망쳐서 또 새로운 삶을 살면 돼, 이러한 도덕과 현실의식의 부재는 아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쇼핑, 아니 충동적인 소비가 주는 자극에 중독되었다. 상황의 비윤리성은 차치하고, 무형의 돈을 유형의 상품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유의미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손쉬운 대출제도로 인해 더 악화된다.


한편, 리카의 동창 유코는 고통스러울 만큼 절약하는 모습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딸 지카게는 도둑질을 하게 되고, 아이를 야단치는데 남편이 얘기한다. 이제는 조금 써도 되지 않을까, 너무 절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키는 대출을 받아 딸이 갖고 싶은 물건을 마음껏 사주는데,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코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절약했지만,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격한 절약과 무절제한 소비 둘 다 좋은 답이 아니었다.


리카를 사회로 내보내고, 그녀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듯 하던 마사후미는 출장에서 돌아와 말한다. 이제는 아이를 가져 보는 게 어때, 그리고 가끔 사치하며 해외여행도 가고 그렇게 살아 보자. 진작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계획이 있었다면 왜 말하지 않았던 걸까. 고가의 선물, 생활비 등 모든 것을 고타에게 주었지만 정작 그녀가 원했던 관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사후미는 리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해주었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다. 이제 리카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책임을 질 것인가, 자유로워질 것인가.


리카의 횡령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이상한 정의감’은 이 행위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애인과 제대로 사랑하던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할 비용을 마련해 두던지…. 평범했던 이가 어마어마한 횡령사건을 벌인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지만,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욕망을 드러낸다. 눈 닿는 곳 모두가 돈이기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그런 욕망이 허상으로 둔갑하는 순간, 현실은 깨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를 현실에 붙들어둘까. 여러모로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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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0-0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결말이 좀 별로인가봐요? 저는 에이바님의 리뷰를 읽고보니 이 책이 너무 읽고싶어지는 데 말이죠!! 읽고 싶은데 에이바님의 별 셋 리뷰라니..음... 그래도 읽어보기 위해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에이바 2016-10-05 11:57   좋아요 0 | URL
결말은 괜찮아요. 요즘 저는 예전이라면 별 넷을 주었을 책들에 별 셋을 주고 있어요. 별 다섯을 아끼려고요ㅎㅎ 90년대 일본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괜찮은 소설이에요.
 
나사의 회전 세계문학의 숲 6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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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워싱턴 스퀘어』를 읽은 적이 있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담담하면서도 비정하게 그려낸 수작이라 생각한다.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서야 그중 하나인 『나사의 회전』을 읽게 되었다. 액자식 구성, 의식의 흐름 기법에 의해 서술된 이 작품의 바깥 화자 ‘나’는 더글러스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아마도 여행지인 듯한 곳에서 유령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더글러스는 어릴 적 누이의 가정교사였던 여성이 남긴 원고를 읽어준다.

시골 목사의 딸인 그녀는 런던에 올라와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 위한 면접을 통과한다. 이제껏 본 중 가장 멋진 신사인 고용주에 반해버린 것도 잠시, 설렘은 사그러든다. 고용주가 그은 선-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 것, 어떤 일도 보고하지 말라는 얘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 가정교사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보면 그가 내건 조건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갓 스무 살이 된 가정교사는 고용주의 조카인 플로라를 가르치게 되고 곧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얼마 후, 소녀의 오빠인 마일스가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오는데 그 이유는 끝까지 모호하게 설명된다.

플로라와 마찬가지로 마일스 역시 아름다운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흠결 없는 심성의 소년으로 보인다. 가정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 역시 성장한다고 생각하며 또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녀 자신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투영하듯 아이들을 아낀다. 가정부 그로스 부인이 이전의 가정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 며칠 후, 탑 꼭대기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를 목격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남자가 저택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가정교사가 남자의 인상착의를 알리자 그로스 부인은 퀸트라며 겁에 질린다.

퀸트라는 하인은 방종하기 그지없어, 여러 스캔들을 일으키고 객사하였는데 그이의 행적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한편 가정교사는 플로라와 호수 근처에 갔다가 전 가정교사, 제슬로 보이는 여성을 본다. 이때 그녀는 제슬이 유령임을 알고 플로라의 반응을 통해 소녀와 유령이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음을 의심하게 된다. 그로스 부인에게 들은 사실은 무척이나 놀랍다. 비천한 신분의 퀸트가 상류층 여성이던 제슬의 배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제슬이 이 집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그녀가 주목한 부분은 퀸트가 이 집 도련님 마일스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로스 부인은 그것을 영향력이라 표현한다. 여기서 퀸트와 마일스, 제슬과 플로라가 성적인 관계였음이 암시된다. 가정교사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었던 빅토리아 시대 어느 시골 목사의 딸이다. 스무 살이 되었고 고용주에게 반해 있으며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풍경과 꼭 맞는 천사 같은 아이들. 그러나 부도덕한 유령의 출현으로 아이들의 도덕성과 순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보수적으로 자라왔을 가정교사가 자기 분신처럼 사랑하고 숭배하던 아이들을 그대로 둘 수 있었을까?

이 집에서 유령을 목격한 사람은 가정교사 밖에 없고, 아름답고 소중한 아이들을 유령의 영향력에서 떼어놓을 이도 그녀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서 진실을 듣는 일은 쉽지 않다. 순진한 미소는 그녀와 힘겨루기를 하는 꿍꿍이로 느껴진다…. 이 소설에서 유령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가정교사의 서술을 어디까지 믿느냐에 달려 있다. 소설의 모든 것은 모호하다. 가정교사는 가정부보다 계급이 높기 때문에 대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간다. 교사는 아이들보다 위엄 있을지 모르나 신분은 아래이다. 아이들은 그녀를 존중하고 따르지만, 유령을 본 후 아이들에 대한 가정교사의 의심이 깊어지면서 이 역시 미궁에 빠진다. 아이들은 진실만 말하고 있는가? 그로스 부인은 가정교사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유령은 가정교사라는 신분의 한계, 보답 받지 못할 사랑, 억눌린 성적 욕망의 좌절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낮은 신분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기존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것일수도, 혹은 저택 내 권력을 제어하려는 욕망일 수도 있다. 서술자의 자기기만이 환상과 현실을 혼동한다고 본다면, 『속죄』에 등장하는 브리오니와 『봄에 나는 없었다』에 등장하는 조앤과 비교할 만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더글러스부터가 거짓일지도 모른다. 먼저 원고 자체가 거짓일 수 있고, 원고를 쓴 이가 가정교사가 아닐 수 있다. 또 더글러스는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니던 대학생일 때 열살 연상인- 누이의 가정교사를 만났다고 했는데 만약 마일스가 그라면 이 또한 거짓일 것이다.

사실 원고의 진위 여부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정교사가 유령을 본 건지, 만든 건지에 따른 해석을 주고받는 편이 더 다채로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진짜 유령이 존재했다면- 이 소설의 고딕 분위기가 한껏 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모호함으로 무장한 심리 소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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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10-0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문단 읽고 그만 읽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어요.
무서워서요~~~ㅎㅎㅎㅎ (웃지마세요, 진심입니다.(
앞부분은 <제인 에어>랑 비슷하네요. 젊은 가정교사, 매력적인 집주인, 귀여운 아이들. ㅎㅎㅎ

에이바 2016-10-05 11:11   좋아요 0 | URL
저번에 『리틀 스트레인저』때도 단발머리님 무섭다고 그러셨잖아요ㅎㅎ 근데 그 책은 좀 무서웠는데 『나사의 회전』은 그렇지 않아요. 제인도 그렇고 고딕 소설풍 이야기라 서로 연상되는 구석이 있어요. 하지만 제인은 모든 작품 중에서도 넘나 1순위! 좀 전에 알게 되었는데 오늘이 『제인 에어』 초판 출간일이래요! ^^
 
폴 발레리 시선 -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2
폴 발레리 지음, 성귀수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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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에미넴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학창시절에 유급을 여러 번 했지만 영어성적만큼은 좋았던 것이 사전을 외웠다고 했다. 한 장씩, 한 장씩 단어를 다 외면 찢어서 먹었다고 그랬던가(약간 이야기가 섞인 것 같지만)…. 그래서 본인은 라임을 만들지 못하는 단어가 없다고, 발음을 구부려서 운을 맞춘다고 그랬었다. 『폴 발레리 시선집』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시어를 고민하는 발레리를 읽고 있으려니, 시대와 환경이 모두 다른 두 사람의 일화가 겹쳐지는 것이다. 사실 발레리의 시는 그렇게 쉬이 읽히진 않았다. 발레리의 시론을 소개하는 서문에서 겁을 집어먹은 탓이었을까. 8월부터 읽기 시작한 시집은 여지껏 애를 써 가며 읽고 있다.


프랑스어를 할 줄은 알지만 불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문학의 묘미를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3년. 보들레르와 랭보, 베를렌의 시를 읽고 약간 으스대기도, 음미해보기도 하였지만 나는 아직 프랑스어로 씌어진 시의 매력을 다 알지 못한다. 그저 좋다, 이 표현은 기가 막힌 걸…, 하며 가끔 원문을 찾아보는 정도이다. 그래도 아주 헛된 시간을 보내진 않았는지 시집에 있는 《텔켈》을 보니 필립 솔레르스라든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라든지 기억이 떠오르긴 하였다. 어찌 되었든 폴 발레리 시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렸으나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다. 시인의 이름을 도처에서 맞닥뜨렸으나 정작 작품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변의 묘지」의 문장, 가슴을 울리는 그 명문은 기억하고 있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tenter de가 들어감으로써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이 문장에 대한 해설은 상세하게 실려 있다…. 아폴리네르 시집에서도 느꼈었지만 성귀수 번역가는 아주 꼼꼼한 분인가 보다. 일단 장점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 하지 않는가. 성 번역가는 원문에 해당하는 시어를 고민, 또 고민하여 번역하였다는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행간에 숨겨진 노고가 읽힌다고 하는 편이 더 와 닿을까. 어느 번역가가 그렇지 않겠냐만, 번역가의 작업으로 두 프랑스인의 시집을 연달아 읽은 감상은 그러하다.


약간 아쉬운 점은 문체가 묘하게 취향을 타지 않나하는 것이다. 결과물을 놓고 평하기는 쉽고- 이게 참 뭐라 꼬집을 수는 없는데, 먼저 평을 남겨주신 다른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재 문체’…. 좀 심한가 싶다가도 공감을 부르는 표현이다. 예를 들자면 ‘노다지’가 있다. 노다지란 말을 문학 작품에서 본 것이 처음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된 건지 모르겠는데 원문이 궁금해져 찾아봤다. 번역문과 원문 순이다. 「젊은 운명의 여신(La jeune parque)」 중의 한 대목이고, 시집에는 40쪽에 해당한다.


  

  속눈썹 파고드는 무지막지한 금빛 섬광!

  오, 노다지의 밤이 짓누르는 눈꺼풀이여,

  너의 금빛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나는 기도했다.





‘노다지의 밤’은 ‘nuit de tresor’였다. 발레리의 다른 시도, 이 시의 원문을 다 읽지 않아 ‘노다지’가 아닌 다른 표현이 더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폴 발레리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가르침을 받았고 마지막 상징주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의 시는 절대시, 순수시를 지향하고 있다. 산문적 요소가 제거된 언어, 완벽한 시어들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바로 발레리의 시이다. 발레리 시에 대한 해설을 찾아보면 건축, 음악, 춤에 대한 이야기들이 눈에 띈다. 형태가 이룩하는 조화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작품들에서 이런 공통점이 읽히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랑스 현대시에 대한 앎이 부족하여 다른 시인들, 특히 상징주의 시인들과의 비교가 힘들다. 알 듯 말 듯 할 뿐. 그래서 일단 구매를 미뤄둔 프랑스 현대시사 두 권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책까지 읽고 리뷰를 썼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자꾸 미루면 시집 리뷰를 영영 못 쓸 것 같아서….


이 시집은 프랑스 시의 걸작으로 꼽히는 「젊은 운명의 여신」과 「해변의 묘지」가 수록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를 증명하고 있지만 「잠자는 여인」과 「석류」, 「별로 희망 없는 소망」도 무척 좋았다. 「잠자는 여인」을 읽으면서는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 『갇힌 여인』이 떠올랐다. 마르셀은 잠이 든 연인, 알베르틴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은 소유, 이 여인을 완전히 가질 수 있는 순간은 알베르틴이 ‘잠’에 드는 시간이다. 깨어 있는 동안 정신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식물처럼 고요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족되는 것이다. 발레리의 욕망은 잠자는 연인을 바라보며 그 내면도 투사하고자 하지만 말이다.


발레리의 「석류」는 지난 정지용 시선 리뷰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마티스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전문을 소개한다.



석류


알갱이들의 과잉을 못 이겨

반쯤 벌어진 석류들아,

마치 자신의 발견들로 터져 나간

당당한 이마들을 보는 듯하여라!


오, 어정쩡 입 벌린 석류들,

자긍심으로 과로한 너희가

태양들을 견디다 못해

홍옥의 격막을 찢어,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어떤 힘에 부응해

과즙 붉은 보석들로 자폭하면,


그 찬란한 파열은

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

은밀한 건축술을.


(82)




「별로 희망 없는 소망」은 발레리의 마지막 연인, 잔 로비통을 위한 작품이다. 2008년에 발표된 시집 『코로나 & 코로닐랴』에 실린 유고작인데, 앞서 소개되는 작품들과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사랑을 갈구하는 시를 읽으면 발레리도 사람이었네, 하는 생각과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2살이라는 데서 자연스레 돋는 소름이 공존한다. 사진 자료와 함께 발레리와 교분을 나눈 문인들과 연보를 읽노라면 시인의 생애를 잠시 들여다본 느낌이다. 프랑스 3대 문인으로 꼽히는 앙드레 지드, 폴 클로델, 폴 발레리 세 사람의 관계도 재미있다. 폴 클로델의 누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연인으로, 천재성에 버금가는 비극적 삶으로 알려져 있다. 카미유는 드뷔시와 잠시 약혼관계였는데 발레리와 드뷔시도 서로 알고 지냈다. 당시 파리 사교계가 얼마나 넓고도 좁았는지 알 수 있다. 


앙드레 지드는 발레리를 설득하여 《구시첩》에 「젊은 운명의 여신」을 실을 수 있도록 장려한데다, 〈누벨 르뷔 프랑세즈〉 편집장이기도 하였으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발레리는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으로 소개된 안나 드 노아이유와도 친분이 있었고, 상징주의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보들레르의 직계 후배라고도 할 수 있고. 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과 에드거 앨런 포와의 관계, 이들을 즐겨 읽던 윤동주나 정지용과의 연관성까지 생각하면 아티초크에서 선정한 시인들이 모두 이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미소짓게 된다. 상세한 시 해설과 발레리 연보는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알찬 시집을 이런 가격에 내놓은 출판사가 대단할 뿐이다. 새삼 아티초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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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23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셀 레몽 <프랑스 현대 시사> 책 좋아요/ 책이 두꺼워서 좀 부담스럽지만 건질 게 노다지ㅋ인 책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통해서 본다기보다는 훨씬 더 빈번히 지능을 통해서 본다. 그들은 오색영롱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인식한다. 그들의 눈에는 저 위에 희끄므레하고 유리가 반사하는 구멍들이 뚫린 입방체를 보게 되면 즉각적으로 그것은 `집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폴 발레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론 서설』)
-제 8 장 상징주의의 고전, 폴 발레리


제가 관심두는 불어권 책 번역을 거의 성귀수 씨가 하는 터라 저는 일단 취향 하이파이브 면에서 신뢰하는 편인데, ˝노다지˝ㅎㅎ 정말 아재스럽긴 합니다; 예스러운 표현으로 시인이 써서 그렇게 번역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저도 불어를 아는 게 아니니^.ㅜ;

에이바 2016-09-23 11:27   좋아요 1 | URL
네 그 책이랑 아카넷에서 나온 책 두 권 사려고요. 인용까지 해 주시니 더더욱... ㅠㅠ 저는 성귀수 씨 번역 기억나는게 뤼팽 전집 정도이고 제대로 읽은 건 아폴리네르 때부터라서요. 아재라는 표현 좀 그렇긴 한데 정말 그러합니다... 네... 좀 예스러이 번역하려 했나 싶기도 하고요? 근데 또 아티초크의 보들레르 번역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취향인 것 같아요. 노다지 정말... 오랜만에 본 단어라... 한편으론 성 번역가는 이런 느낌으로 발레리를 읽는구나 싶었고 무엇보다 젊은 운명의 여신, 해변의 묘지 새 번역 완전 번역을 보게 되어 즐거웠어요.

cyrus 2016-09-2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판 발레리 시집을 읽어봤는데, 역시 상징주의 시는 어려웠습니다. ^^;;


에이바 2016-09-26 10:2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쉬이 읽히지 않나 봐요. 공부를 하고 읽으면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2016-09-24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4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09-25 1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뜬금없는 말이지만 저는 에이바 님의 독서하는 방식을 참 좋아합니다. 최대한 저자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에이바 님의 생각도 발전시켜 가는 방식을요. 두루두루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특정 영역을 탐구하는 덕후적 읽기도 참 좋고요.


제가 요즘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자주 접속도 못 하고, 책도 읽질 못 하고 있지만 독서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분들 중 한 분이세요.

특히 요즘 글들 참 좋습니다..


초딩 2016-09-25 13:26   좋아요 3 | URL
에이바님의 독서법에 대한 말씀
완전 공감합니다!
에이바님 물고기자리님 평안한 일요일 되세요~

에이바 2016-09-26 10:27   좋아요 2 | URL
제 만족을 위한 읽기에 불과하다 생각하는데 이렇게 좋게 봐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렇잖아도 최근 물고기자리님의 글이 올라오지 않아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던 차 였어요. 모쪼록 마주하신 일들이 좋은 방향으로 풀려, 책을 읽고 즐기는 여유를 되찾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초딩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두 분 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eBook]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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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읽고서 별점 매기기나 리뷰 쓰기가 무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느낌을 뭉뚱그려 쓰기엔, 그 글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애초에 에세이를 즐겨 읽지도 않지만 이 책의 ‘서른여섯에 세상을 떠나야했던 젊은 의사가 남긴 감동의 기록’과 같은 광고 문구도 그리 끌리지 않았다. 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폴 칼라니티의 글을 읽은 나는, 이제 그의 생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취한다. 가슴이 찡해졌다거나, 눈시울이 붉어졌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는 길목에서 그를 마주하려 한 이 젊은이가,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리뷰를 쓰는 것은 무용하다고 여긴다. 별점을 매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실제로 겪는 것보다 죽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되묻던 청년이 그 고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문학에 빠졌던 폴 칼라니티가 의학을 탐구하게 되는 과정, 의사가 된 후의 고충과 자기반성, 의사와 환자의 삶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고서 써 내린 이 기록 앞에- 이 책의 여기는 어떠했고 이 대목은 어떠했다며 평가하기엔 나는 이 명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삶과 죽음. 이 명제에 대해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밑줄긋기를 모아두고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폴의 기록에서 어떤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찾아내야 해요.”


폴 칼라니티의 글에서 투병생활의 감상적인 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다. 폴은 오히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자신의 삶은 죽음을 마주하려는 탐구의 과정이었다는 1부, 유한한 삶 속에서도 그 의미를 찾아내고 제대로 살아가려는 노력과 그 희망이 좌절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위대한 정신을 담은 2부. 어느 날 갑자기 확 줄어버린 체중에서 자신의 이상 징후를 예감한 순간부터, 손끝이 갈라져 고통스런 와중에도 장갑을 끼고 원고를 마쳤다는 아내 루시의 목격에 이르기까지…. 남겨진 사람들과 그를 뒤따를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죽음 앞에서도 명징한 의식을 유지하려 했던 폴의 절박함. 그것은 언젠가 자신이 추구했던 것은 목사의 역할이었다는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서 사랑과 희망을 잃지 않고 의미 있는 날들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영원한 이별에 앞선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무너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소중한 사람이 병원에 다녀올 때 마다 검사 결과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참, 폴의 이야기에서 삶의 한 조각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폴이 남긴 기록을 무턱대고 감동이라며 추천하기 보다는, 언젠가 때가 되어 당신과 자연스럽게 ‘만나길’ 바란다. 삶과 죽음에 대한 유려한 문장들과 함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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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4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소설가 구병모의 팬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왔다. 사실 한국문학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위저드 베이커리』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그리고 『빨간구두당』같은 작가의 소설집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작가의 신작이기도 하거니와, 동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노인에게 소년 로봇이 배달된다는 소개글 덕분이었다. 로봇, 그리고 로봇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고 여겨지는 카렐 차페크(실제로는 그의 형이라 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를 떠올리곤 했기 때문에 왠지 그와 연관하여 지금이, 구병모의 세계를 만날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의 감정 발생 서사는 구병모 작가가 밝힌 것처럼 숱하게 되풀이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무엇보다 이 로봇은 어떤 존재일까. 나는 명정에게 배달되어 은결이라 이름 붙여진 이 소년 로봇을 기존의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안드로이드들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인공지능에 관한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her』와 같은 소재들이 합쳐진…. 은결은 이렇게 발전할 ‘안드로이드’의 프로토타입이다. 가사노동을 위한 로봇들이 보급되는 근미래에, 인간의 형태를 지니고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로봇들의 프로토타입.


어쩌면 소설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은결이 지닌 인공지능을 최적화로 사용한 결과로 기술과 윤리에 대한 갈등과 고민의 메시지를 던진다든가- 하지만 명정은 홀로 세탁소를 운영하는 노인이다. 아들의 부고를 들은 6개월 후, 바다를 건너 온 소년 로봇에게 둘째가 생긴다면 붙여주었을 이름을 주고 애지중지하는…. 노인의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명정은 은결의 기능을 대부분 최소화한 뒤 곁에 두고 허드렛일을 시킨다. 기존의 작품들에서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은결은 늘 로봇임을 주지시키는 설명이 나온다. 피부 아래는 합성 금속, 눈동자는 조리개가 달린 카메라, 고저 없는 목소리.


그렇다고 은결이 노동을 제공하는 기계로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명정은 좁은 세탁소 공간 너머의 세계를 은결이 경험하길 바란다. 은결을 대체할 수 있는 부품이 없기에, 고장이 날까 봐 공원을 걷고 심부름을 보는 정도에 그쳐 있지만 말이다. 은결에 관심을 보이는 열세 살 시호와 준교가 대학에 갈 때까지, 은결은 세탁소의 고요한 삶을 지키고 있다. 아이들과 나눈 대화에서 사실과 소망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우고, 인간의 성장을 지켜보며 시간의 흐름을 배운다. 과연 은결은 시호가 내준 과제인 ‘하고 싶다, 하고 싶지만 해야 한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를 구분할 수 있을까.


해외 토픽에서 배운 고백을 써 먹고, 오래 곁을 지킨 이웃들을 위로하는 은결의 대응은 경험의 축적에 따른 최적의 결과일까 아니면 인간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은결을 염려하는 명정에게 준교가 말한다. 로봇의 감정은 지식의 변형태이며 일종의 전산상 오류가 아니겠느냐고. 다만 은결이 특별하니 은결의 감정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과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육감, 그런 예감을 은결이 느낀다는 것도 시스템의 오류라고 할 수 있을까? 명정이 떠난 후, 언젠가 보았던 장면을 홀로 재현하며 충동적으로 무엇을 벌인 결심조차도?


마음을 담아 보낸 씨앗이 화분으로 돌아온 걸 보았을 때, 공기 중을 떠도는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상실감을 느끼는 것….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 은결이 느끼는 통증과 안정감은 진정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 그 행동의 여파로 은결은 시간으로부터―인간으로 치면 노화일―선물을 받는다. 그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과 함께. 명정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 보다 오랜 시간을 꽤 인간답게 살고, 또 염려했던 것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소설은 아름답다. 담고 있는 시선이 아름답다. 세탁소조차 기계화 공장에 밀리는 시기, 인간과 로봇의 만남에서 피어난 따스함은 오랫동안 생각이 날 듯 하다. 그래,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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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9-1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뇌과학 관련 책 많이 안 읽어서 완전 무식하지만... ㅎㅎ
에이바님 글 읽다보니 <마음의 미래>에서 로봇의 의식에 대한 부분이 생각나네요. 그러니까 로봇이 거울을 보고 맞은편에 보이는 물체가 자기 자신임을 `의식`했다는 실험결과가 있더라구요. 그게 바로 로봇이 의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던대요.

윗 부분에, 은결이 사실과 소망을 배우고 인간의 성장을 지켜보며 시간의 흐름을 배운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게도 느껴지네요.
로봇에게 의식이 있을까요? 의식이 있다면 감정이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감정이 있다면 단순한 기계가 아닐텐데요.
로봇은 정말 감정을 느끼는 걸까요.

점점 궁금해집니다. 소설 속처럼 인류가 진화한 로봇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

에이바 2016-09-19 13:38   좋아요 0 | URL
지금 저한테 책이 없어 확인이 안 되는데 작가의 말 뒤를 보면 참고서적이 쭉 나와있는데 <마음의 미래>도 있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거울을 보고 자기를 인식하는 에피소드, 은결이한테도 있고요.ㅎㅎ 구병모 작가가 참고한 책들을 미리 봤더라면 이 소설이 또 다르게 전해졌을 듯 해요. A님이 강추하셔서 사 두고선 아직도 안 읽었네요...ㅠㅠ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에겐 당연히 의식이 있지 않을까요. 단순한 연산기능이 아니라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사고하기를 기대받잖아요. 통계적인 반응이라 해야겠지만, 낭만적으로 생각한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우울증에 걸린 로봇이 나오고요, 미드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를 봐도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인공지능이 등장해요. 영화 <그녀>를 봐도 그렇고... 비록 연결망을 통해 이어져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객체로서 인식하는 인공지능이 있다면 의식이 인간의 전유물이라 할 순 없지 않나 하고요. 그렇다면 감정도 가질 수 있지 않나... 갑자기 한 장면이 떠올라요. 영화 <아이, 로봇>에서 로봇 써니한테 형사가 `넌 인간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거나 위대한 음악을 만들진 못하잖아` 하니 `그럼 넌 할 수 있어?`... 웃프네요.

로봇의 3원칙도 그렇고, 예로 든 작품들은 일단 인간에 위협적이진 않은데요. 인간과 기계의 공존에 관해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일론 머스크가 구글 딥마인드 관련해(아무튼 인공지능) 경고했던 것 같아요.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만큼 성장하는 시기는 의외로 멀지 않다고요. 몇십 년이 아니라 불과 십 년 안팎이라고요. 제가 자주 방문한 사이트를 추려 광고가 뜨는 걸 보면 가끔 소름끼치는데 그것과 비교도 못 할 기술,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기술... 이세돌 기사가 알파고에 승리했다곤 하지만 위대한 인간 이세돌의 승리라서, 범인인 저로선 막연한 두려움만 있어요. 그냥 낭만적으로 생각하며 자위할 수 밖에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