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적표 받은 날 ㅣ 내인생의책 작은책가방 2
진 윌리스 지음, 토니 로스 그림, 범경화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2월
평점 :
[성적표 받은 날] 처음엔 책 제목을 보면서 아이가 성적이 나빠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기가 무서워서 벌이는 에피소드나 혹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그려놓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 소개를 보니 이게 왠일? 처음부터 무척 강하게 나가는 주인공 플러프 편지는 기가 막혔다.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이 책은 엄마, 아빠들을 위한 동화책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아니면 그림책을 읽는 초등 저학년들의 대리만족.
우리 아이도 당연히 성적표를 받아온다. 여긴 만점자들은 거의 나오지 않아서 올백을 맞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지만, 당연히 성적에 대한 순위도 있고 시상도 하기 때문에 난 은근히 시험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주고 우리 아이 역시 시험이나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하는 시간이 많지도 않고, 나 역시 시험성적보다는 공부하는 과정을 더 중요시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적표 때문에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가출을 결행하는 우리의 주인공 플러프. 그렇게 집을 나가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란 생각은 못 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생각은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성적표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큰 것이었을까?
책을 넘기면 왠지 익숙한 토끼들의 모습이 나온다. '난 전에 이런 토끼들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다보니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작가가 '토니 로스'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아이가 엄청 좋아해서 즐겨 있는 Horrid Henry 시리즈의 그림 작가인 것이다. 번역본 제목은 호기심 대장 헨리.
플러프는 가출을 하고 난 후 평소 해보지 못한 행동을 한다. 이른바 비행소년이 된 것이다. 귀걸이는 물론이거니와 꼬리엔 염색을 하고 심지어 오토바이를 타고 순무 밭을 폭주하는 게 아닌가!
탈선이랑 탈선은 다 한 듯 그림책을 넘길 때마다 나오는 플러프의 모습에 놀랐던 나, 설마 이렇게 끝이 나는 건 아니겠지 싶었다. 하지만 책에서 보듯이 의기양양하게 악마의 언덕 쓰레기장에 있는 지옥의 토끼들 내준 시험에 통과를 했지만, 자일스 농부 아저씨게 한 짓은 몰랐으면 한다는 말에 여전히 순진한 토끼임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일까?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플러프의 편지는 그냥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성적표에 부모님의 사인을 받아가야하는데, 형편없는 성적 때문에 부모님의 눈을 피해서 할머니 집에 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아이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온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우리 아이는 엄마 아빠의 꾸중이 두려워 피해서 숨을 곳이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곳에서 숨을 때란 마땅하지 않을테니 아이가 엄마, 아빠에게 숨기지 않도록 늘 엄마는 네 편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야하는 것인지.
책 속에서 플러프는 이렇게 외친다.
[저는 그저 엄마 아빠께, 살다보면 이 세상에는 더 나쁜 일들이 많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 끔찍한 성적표보다 말이죠. 엄마, 아빠가 화를 다 내셨다면, 오셔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어서요! 엄마. 저, 배고파 죽겠어요. 할머니가 해 주신 양배추는 냄새가 고약해요!] 라고.
플러프의 편지는 그런 나쁜 일에 비하면 자신의 성적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애교 반 협박 반의 편지인가보다. 그래도 그렇지!
하긴 편지 내용만 그렇지,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할머니 댁에 가서 얌전히 있는 소심한 플러프이니 말이다. 이 쯤 되면 플러프의 엄마 아빠의 화도 풀렸을까?
우리 아이도 그렇게 생각을 할까? 플러프처럼 행동하는 것보다는 시험 성적표 나쁜 게 낫다는. 인생에서 성적이 행복이나 성공의 지름길이 아님에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성적만을 강요하고 있다.
누구든지 플러프의 편지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책의 작가는 기성세대들이 성적으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간에 플러프의 가출소동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성적을 걱정하는 만큼 다음 성적을 받을 때까지는 채소밭 이름표도 읽고, 당근도 세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늦되는 아이가 있으니까, 기다려 준다면 나중엔 털북숭이 초등학교에서 일등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펄쩍펄쩍 뜀뛰기를 잘하는 플러프이니만큼 체육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도 있고 말이다. 단순히 한 가지 성적만으로 아이를 판단하지 않고, 또 기다려주고 아이의 특성을 알아서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에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일 듯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자인 초등학교 사서교사의 말을 옮겨보았다. “성적표는 ‘환승역’과 같아요. 잘못 탄 버스라면 갈아타면 되고, 더 빠르고 좋은 버스가 있다면 그 버스를 다시 타면 되지요. 아이의 성적 때문에 화를 낸다고 해서 아이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까요. 이번 성적표는 마지막 성적이 아니지요. 선생님의 일시적 판단일 뿐입니다.”
환승역이라는 말이 정말 멋져서, 이 말을 A4 용지에 옮겨서 프린트해서 방에 붙여놓으려고 한다. 잘못 탄 버스라면 얼른 내리고, 더 빠른 버스가 있다면 잡아타면 된다는 것을. 때론 자칫 비뚫어질 수도 있고 너무 느리서 부모님을 애타게 할 수도 있지만, 인생의 종착지까지 가는 버스는 무척 그 길이 길다는 것을. 그리고 결코 한 대의 버스만을 갖고 종착지까지 갈 수 없으며, 누가 먼저 일등으로 도착하느냐 하는 운동경기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유쾌하게 읽고 싶은 그림책이었는데, 오히려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제 마음을 위로해준 그림책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