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무엇에든지 애정을 너무 많이 쏟는구나, 앤. 앞으로 살면서 실망할 일이 많을까 봐 걱정이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앞일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루어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미리 생각해 보는 건 자유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빨간 머리 앤 / 루시 모드 몽고메리/시공주니어 p.131 -


난, 열심히 산다. 어떤 일이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 왜냐면 그거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물려 받는 다는 것은 애시당초 생각해 본 일이 없고 그렇다고 운이라는 것에 기대어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 그 운이라는 것이 내 편이었던 기억은 별로없다. 그래서 대충대충 얼버무리기 보다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한다. 그것만이 내가 해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으므로. 그러다보니 막연한 직관에 의존하기 보다는 부족하더라도 경험에 근거한 나름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자 애를 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당연히 그 대상에게 애정을 품게 마련이다. 정성이 들어갔으므로.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님 추상적인 것이든.

그래서 나의 애씀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된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좋은 결과가 있을거야. 이렇게 아껴 주었는데 잘 자랄거야. 이렇게 사랑해주었는데 그 사람도 같은 마음일거야.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애쓴만큼 결실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고, 정성껏 키웠다고 잘 자라주는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화분의 꽃까지도. 내가 좋아한만큼 상대도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결국 기대는 실망으로 좌절로 이어지곤 했다.

지금도 젊은 날 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의기소침해진 채 캄캄한 골목길을 홀로 걷던 그날의 내가  눈에 선하다.

도무지 헤어날 방법을 모르겠는데 하늘의 별은 어찌나 빤짝거리던지.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별빛이 야속해 길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그 날의 내가 눈 감으면 너무도 아프게 밟힌다. 그래도 그때는 다시 시작했다. 방법이 있을거야. 지금 온 길이 완전히 잘못 된 길은 아니었을거야. 다시 해보자. 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왜냐면 다른 대안이 없었기때문에.

그래서 누군가의 실패를 보면 난 너무 아프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야"라는 상투적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서 목표한 일을 위한 노력에 대한 배신보다 더 아픈것도 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다는 것.

누군가를 애정한다라는 행위는 그에 따른 기대도 하기 마련이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대해주었으니 상대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사람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과도 같아서 너무도 쉽게 무너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기대하지 않을거야'하고 내 자신을 위한 보호벽 쌓기를 열심히 한다.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기. 

사랑을 주고 정성을 다 하는 행위는 또 다른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그걸로 되었고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말자. 실망하게 되면 너무 힘드니까.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그만이야. 하고 나를 훈련시켰다. 


어느새 기대하지 않기는 내 생활속에 깊숙히 자리했다.

정말 기대하지 않으니 그닥 실망할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오늘 앤의 말을 들으니 정말 기대하지 않는 것이 실망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일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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