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입과 손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말하고 서명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재빨리 알아내어 다시 못살게 굴기 전에 얼른 털어 놓는 것이었다. 그는 고위 당원의 암살, 불온문서 배포, 공금 횡령, 군사 기밀의 암매, 각종 파업 행위 등에 대해서 자백했고, 오래전인 1968년 이스트아시아 정부의 돈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고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독실한 신자이며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데다 성도착자라고 거짓 자백을 했다. 

그는 또 아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자신은 물론 심문자들도 뻔히 알고 있는데도 아내를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중략) 있는 것 없는 것 다 자백하고 모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들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 1984/ 조지 오웰 / 민음사/ P.338 -



영화 1987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가던 날 오전 소설 1984 읽기를 끝냈다. 우연이었다. 많은 생각이 곳곳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그러던 차에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슬픔이 아니었다. 모두가 느끼는 고마움 때문만도 아니었다.

소설 1984를 읽은 독자라면 알 것이다. 그 이야기의 끝이 얼마나 끔찍한 지. 정녕 인간에게 희망이란 없더란 말인가. 윈스턴이 그토록 희망했던 무산계급은 소설이 끝나도록 끝내 봉기하지 않았다. 윈스턴 역시 끝내 파멸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1987은 그렇지 않았다. 

 

1987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고문 치사". 누구나 안다. 고문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위이고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우린 들어서 아는 것이다. 그걸 직접 경험해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소설 1984에서 윈스턴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그 과정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책을 읽는 내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읽는 것조차 건너뛰고 싶으리만큼. 소설은 고문이 한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둔 대한민국.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될 이 땅에서 고문은 어찌보면 일상이었다. 모두가 아닌 비밀. 해서는 안되는 만행이었지만 그 명령을 내리는 권력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영화 속 대사처럼 그저 "받들겠습니다."라고 할 뿐.


기억을 다시 정리하거나 기록된 자료를 허위로 변경했다면, 그 다음에는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p.297


"과거를 지배하는 데 대한 당의 슬로건이 있네. 그걸 한번 외워보게."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윈스턴은 순순히 외웠다.  P.345 


소설 1984의 무대인 오세아니아의 정치 통제 기구인 당은 끊임없이 과거를 수정한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과거를 그들에게 맞게 고친다. 그리고 고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진실따윈 중요하지 않다. 진실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이 진실이다. 당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당을 배신한 사상범도 그들의 조작에 의해 너무도 쉽게 만들어진다. 그들이 지목하는 순간 모든 것은 준비되어진 퍼즐 맞추듯이 딱 들어맞는다. 증거조차도.... 아니라고 버티어보지만 소용없다. 지독한 고문은 모두 스스로 한 일이라고 자백하게 만든다.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끌어들이게 만든다.


마치 영화 1987의 남영동에서 간첩단을 만들었던것처럼.


권력은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가 있지. 복종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괴롭히지 않고, 어떻게 권력자의 의사에 복종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주는 가운데 존재하는 걸세. P.373


과두 체제의 본질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자 세습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남겨놓은 세계관이나 생활양식 등을 산 사람이 고수하는 데 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한 지배계급이다. 당은 그들의 혈통이 아니라 당 자체를 영속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 계층적 구조를 언제나 동일하게 유지 하는 한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P.292


누구든 권력을 장악하면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법이지. 권력은 수단이 아닐세. 목적 그 자체이네. p.368


독재 정권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뒤 이어 들어선 전두환 정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한 몸이었다.  

또한 1987년 발표한 "호헌"은 그들의 또 다른 후계자를 내세우려는 권력의 야심이었다.

남영동의 권력 또한 그러했다.


'이 분 증오'가 끔찍한 것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거기에 휘말려들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일단 휘말려들면 삼십 초도 안 되어 어떤 억제도 소용없게 된다. 공포와 복수심에의 무서운 도취, 큼직한 쇠망치로 때리고, 고문하고, 얼굴을 깨부수어 죽이고 싶은 욕망이 전류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서 뜻하지 않은 사람조차 오만상을 찌푸린 채 비명을 지르는 광적인 상태에 빠져버린다. p26.


전쟁 행위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중을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게 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을 박살내거나 하늘로 날려버리거나 바다 속 깊이 빠뜨리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실제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기 공장은 소비 물자 생산에 사용될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역할을 한다. (중략) 또 전쟁을 하고 있다거나 전쟁이 위험하다는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모든 권력을 소수 특권계급에게 이양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당연하고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분위기이다. p.268~269



1984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늘 전쟁중이다. 그리고 사실은 존재 했었는지 조차도 불분명한 반역자 골드스타인은 온 국민의 증오의 대상이다. 당원들 모두는 철저하게 감시 당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자식들에게까지 감시를 당한다. 여차하면 자식들의 신고 때문에 끌려가기도. 늘 전쟁중이고 반역자 집단의 침투에 대비하고자 당원 모두는 그런 감시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골드스타인을 처철하게 증오한다. 온 맘과 온 힘을 다하여. 때문에 반역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


내 어린 시절. 난 "간첩신고는 113"이라는 포스터를 늘 가까이 접했다. 간첩은 이렇게 생겼다라는 교육은 너무도 당연한 것. 간첩을 잡으면 큰 돈을 포상금으로 받는다고 했다.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꼭 간첩을 잡아봤으면 하는 꿈도 꾸었다. 그 시절 내가 그린 반공 포스터에 등장하는 북한 사람들은 모두 뿔 달린 사람. 아니면 만화 "똘이장군"에 나오는 못된 돼지들로만 생각했다.

길가다 애국가가 나오면 멈춰서서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했고, 매일 아침마다 교문에 들어설때는 선도부장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또박또박 외워야 했으며, 교실마다 태극기 옆에 걸린 대통령 사진이 당연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나의 부모님은 훨씬 더 했다. 6.25 전쟁을 몸소 겪으셨던 분들이다. 피난 길에 낙동강이 핏물이 된 것을 직접 목격하셨던 분들. 때문에 권력의 엄한 목소리는 실로 무서운 소리였던 것이다.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은 자체의 목적을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나약하고 비겁한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수호할 수도 없거니와 진리와 접할 줄도 모른다. 당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자기보다 강한 타인에 의해 통치되거나 체계적으로 기만을 당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와 행복 중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하는데, 대부분 행복을 더 선호한다. 당은 약자의 영원한 수호자이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며, 선을 구현하기 위해 악을 행하는 헌신적인 집단이다. p.366~367


우리도 그랬다. 자유가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하던 때가 있었다. 밥 먹고 살면 되었지.

하지 말라는거 하지 말고 살아라. 시키는 대로 살면 된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소위 말하는 산업화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국가가 알아서 우리의 안녕을 지켜줄 것이니 국가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면 된다. 


그러나 한순간의 일이긴 해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굉장한 힘을 발휘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그 같은 함성을 지르지 않는 걸까? p.100


윈스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삶을 지배하고 있네. 자네는 우리가 하는 일에 분노해서 우리에게 반항하는 인간성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지만, 우리는 인간성 자체를 창조해 낸단 말일세. 인간이란 무한한 신축성이 있는 존재이네. 자네는 노동자나 노예들이 봉기하여 우리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옛날식 생각을 하고 있을 걸세.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게. 그들은 짐승처럼 무력하네. 인간성은 곧 당일세.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네. p.377


1984에서 윈스턴은 무산계급만이 희망이라 했다. 내부당원도 외부 당원도 아닌 당이 노예취급 하는 무산계급. 그들이 일어선다면 희망이 있을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윈스턴은 끝내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다. 당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총살당했다. 인간의 모든 가치를 상실한 채. 하지만 1987의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끝내 일어났다. 권력에게 무지렁이 취급 당하던 우리가 들고 일어선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우린 끝나지 않았던 거야. 그리고 우린 2016년 또 다시 촛불을 들고 일어 선 것이다. 1987의 난 중학교 3학년이었기에 구경꾼이었지만 2016년의 난 내  아이와 함께 촛불을 들고 외쳤다. 국가란 무엇인지, 국가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난 분명히 알고 있다. 2016년 우리가 촛불을 들고 일어설 수 있었던 까닭은 우리에게 1987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한 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빛나는 눈물들 /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짧은 추억도 /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소설 1984에서는 이루지 못한 꿈을 1987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루었다. 그리고 우린 모두 빚을 진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유산을 잘 지켜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늘 판단하고 생각해야 한다. 늘 긴장해야 한다. 권력은 또 어디에선가 뿌리 내리려 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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