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은 열렸고 그리고 닫혀졌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어낸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 토지 2부 4권 / 박경리 대하소설 / 마로니에북스 p.243~244 -


월선이가 죽었다. 가련하고 강한 여인, 불행했으나 행복했던 여인. 그가 죽었다.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남자 용이를 마침내 마주하고 난 후에야 그녀의 질곡진 삶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월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위의 대목에서 헉 하고 숨이 막혔고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가슴속 깊은 곳에 맺혀있는 응어리를 토해내는 듯한 신음소리도 토해냈다. 어깨가 들썩였다.

월선이가 죽었다. 끝내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말한다. "우리 많이 살았다.", "여한이 없제?".


마지막 호흡을 몰아 쉰 순간 월선은 평온했을 것이다. "이제 끝이다. 다 했다.".

삶의 무거운 짐을 벗고 훨훨 가벼웠으리라,


나는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처음 읽는 이에게 일러두고 싶다.

이 책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야 한다고.

박경리 선생님이 자신의 평생을 쏟아부어 같이 동고동락했던 인물들이기에

우리도 그들과 함께 자라 청춘이 되고 늙음을 마주해야 한다고.

100년 전 이땅에 살았던 그들의 삶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함께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월선이 죽고 난 후 이제 서희와 그 일행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대에게 고향이라는 낱말은 어쩌면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전국 곳곳 잘 뻗은 교통망은 갈 수 없는 서러움, 아쉬움, 갈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린 100년 전의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나와 내 가족이 머물러 살았던 땅.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성껏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들릴 것이다. 그 처절함이. 갈 수 없는 이북에 고향을 둔 이들의 한 또한 이해하게 되리라.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다시 밟아야 한다라는 부채를 짊어져야만 한다. 갈 수 없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 1월, 2월은 나에게 여유가 없는 달이다. 그래서 책도 읽는 둥 마는 둥.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꼭 아프게 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랬다. 그래서 요즘은 좀 게으르게 살고 있다. 아주 쬐금.... 게으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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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억울한 놈 니 하나뿐인 줄 아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사람 중에 천대받아감서 억울하게 사는 사램이

훨씬 많은께. 그러니께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 일이 더 바쁘다 그말

아니가. 곰곰이 생각해봐라. 니는 펭생을 물지게 지고 니 어무니는

죽는 날까지 품팔이나 하고, 니 동생들이라고 다를 기이 있을 성싶으나? 좀 펜하게 살잘 것 같으믄 술집 말고 갈 곳이 따로 없인께, 너거들 겉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쌯이고 쌯일만큼 많다. 밥 묵는 사람보다 죽 묵는 사람이 많고 뺏는 사람보다 뺏기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그래  니가 조준구 한 놈 직이서 아배 원수를 갚는다고 머가 해겔되겠나? 달라지는 것은 쥐뿔도 없일 기라 그 말이다. 세상이 달라지야 하는 기라, 세상이. 되지도 않을 꿈이라 생각하겄지. 모두가 그렇기 생각한다. 천한 백성들은 그렇기 자파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꿈이라고만 할 수는 없제. 세상이 한번 바뀔 뻔했거든. 왜놈만 아니었이므. 지난 동학당 난리 얘기는 니도 많이 들었을 기다. 왜놈만 병정을 몰로 안 왔이믄...... 정사를 틀어쥐고 있던 양반놈들, 그놈으 자석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보담 남으 나라 종놈 되는 편을 원했으니께. 그러니께 송두리째 넘어갔지. 땅도 넘어가고 백성도 넘어가고.   

   

        - 토지 제2부 2권(박경리 지음) p.336 -



최참판댁 시절 길상의 친구였던 관수가 조준구에게 밉보인 탓에 왜 헌병에게 총살 당했던 정한조의 아들 석이에게 밤을 지새며 들려준 말이다. 관수의 마을 듣고 석이는 낡은 한 칸 초가집에 사시는 늙은 어미와 어린 여동생 둘을 남기고 집을 떠난다. 마음에 뜻을 품고... 토지 2부의 시대적 배경은 1910년 무렵부터이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말한다.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물론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세상 많이 변했다.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구석구석 불편함이 많이 남아있다라는 사실을... 아직도 많이 애써야 한다라는 사실을...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은 그때처럼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힘을 보태고... 같이 손을 맞잡으면 그때보다 수월하다는 것은.

그래서 그때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당신들 때문에 오늘 제가 있습니다. 


이제 토지 6권을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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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문의원께서 언젠가 말씀하시었소. 

  가난한 백성들은 영신환 한 알이라도 소중하게 정성 들여서 먹고,

  그 한 알의 영신환 몇 배의 정을 느끼지마는

  배부른 사람들은 천하 명약도 정으로 받지는 아니한다구요.

  초봄 들판에서 나물을 캐는 고사리 같은 손은 정에다 정을 돌려줄 줄 알지만

  시궁창에 흰밥 쏟아 버리는 아낙은 허기 든 사람에게 식은 죽 한 그릇 베풀 줄    모른다구요.


  - 토지(박경리)  2부 2권 p.207-





모든 시간이 감사하지만 가을은 특히 더 그러하다.

입의 풍요로움 뿐 아니라 눈의 풍요로움까지도 아끼지 않으니 말이다.

산 기슭의 이름조차 알 길 없는 나무며 풀이며 모두가 

색색의 물감을 붓에 담뿍 머금어 휙~ 흩뿌려 놓은 것 마냥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 위에 쏟아지는 햇빛은 또 어떠한가.

부서지듯 쏟아지는 빛은 모든 시간을 멈추게 하는 힘을 지녔다.

난 그곳에 멈춰서서 그 어떤 소리조차 감히 내지 못하고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들판, 길가, 산 기슭에 자리한 저들도 그리고 쏟아지는 빛조차도

저마다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정성껏 시간을 견디어 낸다.


뭐든 넘치고 부족하지 않는

뭐든 흔하고 흔한 요즘.

부족해서 감사했고, 부족했기에 더욱 기쁨이었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 본다.



토지, 가을, 빛, 정성, 부족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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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마동, 말은 돌아온다는 뜻이요.

돌아온다는 것은 강을 못 건넜다는게 아니겠소?

이곳을 찾아드는 사내와 여인은 아름답고 씩씩하고 그리고 젊지.

 아암 젊고말고.

(중략)

사내와 여인이 이곳을 찾아오면 나는 말 두필을 마구간에서 내어주는 게요.

그네들이 말에 오르고 나란히 떠날 때 이르는 것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는 말인데 그 말을 세 번 되풀이하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구.

해가 떨어질 무렵, 그들은 건너갈 강을 향해 떠나는 게요.

(중략)

그러나 그들은 어김없이 돌아왔었소.

말 한 필은 서쪽에서 돌아오고 다른 한 필은 동쪽에서 돌아오는 게요.

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말이 돌아오는 거지만.

한데 사내와 여인은 옛날의 그들은 아니오. 아니거든.

머리칼은 햇볕에 타서 삼을 모양으로 누렇게 뜨고 얼굴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굵은 주름,

거미줄 같은 잔주름, 이빨은 빠져서 양 볼이 꺼지고 파파할멈 할아범의 모습들이오.

허나 그보다 슬픈 것은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알지 못하며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이었소.

그네들은 타인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요.

제가끔 자기 갈 길을 탄식하는 게지.


-토지(박경리) 제 2부 2권 p.138~139-



아이의 등교를 준비하면서 바쁘게 커피를 볶았다.

볶은 커피를 담아두는 병이 비었기에.

덕분에 오전내내 집안 가득 기분 좋은 향이 가득하다.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향이다.


"귀마동"이라는 마을에는 강이 하나 있단다. 저승 갈때 건너는 강과는 달리

그 강은 남녀 한 쌍이 말을 타고 건너는 강이란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

그 강을 건너기만 사내와 여인에게 이별이 없어진단다.

그런데 어찌된일인지 단 한 쌍도 그 강을 건너지 못했단다.

끝도 없는 벌판을 가다보면 지치고 정신이 멀어지고 심한 졸음이 몰려오면서,

사람을 태운 채 말이 혼자 저절로 가게 된다고...

나란이 가던 말이 동과 서로 갈라지면서 

그 둘 사이는 차츰 멀어져 마침내 되돌아 오게 되는 마을 귀마동.


길상이 꿈속에서 만난 노인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을이다.


우리 부부는  그 강을 잘 건너고 있는 것일까?

20여년을 건너고 있으니 짧지 않은 시간인 듯 싶은데.

그저 서로가 옆에만 있어 주어도 좋았던 때가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같은 음식을 먹고...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난 늘 그때를 생각한다.

약게 셈을 할 줄 몰랐던 그때가... 그래서 약지 못했던 나를 원망할 때도 있지만(주로 다투었을 때)

그래도 그때가 이쁘다. 세상에서 가장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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