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해의 체험 속에서, 이 가운데 어떤 것은 만족스러웠지만 어떤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쓸모 없고 거칠기만 하던 산골짝의 땅뙈기를 개간해 기름진 밭으로 가꾸어 풍성하게 거두었다. 좋은 채소, 과일, 꽃이 다 거기서 났다. 

둘, 집짐승이나 집짐승의 똥오줌, 화학 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도 농사일을 만족스럽게 해냈다.

셋, 몸을 누이고 쉴 집을 손수 지었고,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고 살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의 잉여 농산물도 있었다. 우리가 쓴 것들 가운데 4분의 3은 우리가 스스로 땀 흘려서 얻은 열매들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노동 시장으로부터 독립해 갔고, 생필품도 거의 시장에 의존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우리는 불황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리하여 미국 경제가 점점 해체되어 가는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 단위였다.

넷, 작은 사업을 시작하여 임금이 나올 만큼 제법 훌륭하게 꾸렸다. 

다섯, 스무 해 동안 전혀 의사를 만나거나 찾아가지 않았을 만큼 건강을 지켰다. 

여섯, 도시의 삶이 요구하는 복잡함 대신에 단순한 생활 양식이 자리잡았다.

일곱, 해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여섯 달로 줄이고 나머지 여섯 달은 여가 시간으로 정했다. 여가는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 가르치기 들로 보냈다.

여덟, 우리 집은 늘 열려 있어서 누구나 찾아와 함께 먹고 잘 수 있었다. 사람들은 며칠 동안 묵기도 했고, 몇 주 또는 그보다 더 오래 머물기도 했다.


- 조화로운 삶/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씀/류시화 옮김/ 보리출판사 p.7~8-



최근 디스토피아를 다룬 책들을 읽었다. 틈이 날때마다...

그리고, 또 무척이나 추운 나날이었다. 현실은 춥고, 책속의 세상은

우울하고 절망적이다. 뭔가가 필요했다. 메말라가는 내 감정을 적셔줄 이야기가... 그때 몇달 전 구입하고 책꽂이에  꽂아만 두었던 "빨간 머리 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에게 이 책이 비타민이 되어 주겠구나 싶어서 꺼내 들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과 얼굴 맞대고 두런댈 수 있을 것 같아 마냥 기뻤다. 아니나다를까. 기분 좋은 느낌의 딱딱한 겉표지를 넘기면 빨간머리 앤의 모습이 보인다.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고 그 페이지를 넘기면 앤이 사는 마을의 지도가 나온다. 그 지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새 나의 마음엔 행복이 가득해진다.

"진지한 세상에 햇빛이란 지나치게 현란하고 무책임하다"라고 생각하는 마릴라 커스버트의 고지식함 조차도 정겹게 느껴졌다.

항상 새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익숙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책도 그렇다.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때문에 그래서 새로울 것이 없는 데도 이 책의 책장을 넘긴 다는 행위 자체가 행복하다. 예상되는 전개와 결말...

내 뜻대로, 내 예상대로 되는 일이 그닥 많지 않은 현실이기에 익숙함을 배신하지 않는 잘 알고 있는 책의 이야기가 위로가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또 한 권의 책이 생각났다. 위에서 인용한 책이 바로 그 책이다.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더불어 내 삶의 로망이 된 니어링 부부가 스무해 동안 버먼트 숲속에서 살았던 기록을 담은 책이다. 노동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현대인의 삶. 인간의 존재의미가 생산물을 소비하는 소비의 주체, 그리고 그 생산물을 생산하는 생산의 주체, 그리고 그 생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하는 경제라는 시스템의 주체로서만 인식되어지는 현대인이다. 이런 시스템을 거부할 수는 없을까? 그때 롤 모델이 되어준 이들이다.

물론 나는 아직은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나로 살거야. 라는 꿈을 늘 꾼다. 




앤이 사는 마을이란다. 앤이 살게 될 "초록 지붕 집"도 보인다. 구불구불한 길과 전나무와 밭...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마을의 풍광이 그려진다. 

지도는 "빨간 머리 앤/시공주니어 출판"의 한 페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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