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 봐주면 누가 봐주나? 그래서 동지야.
동지. 같을 동 뜻 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이를 동지애라고 이른다. 그래도 나도 명색이 사진 애호가를 자처했으니까 사진의 에세이 책과 사진집을 함께 같이 본다는 의미에서 사진 동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진으로 뜻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사진 동지이다. 사진의 반은 카메라가 담당하고 나머지 반은 감성이나 감정일 테다. 그렇다면 사진가는 카메라를 들고 그 반을 감성으로 채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사진 책이 나올 때마다 나는 동지의 그 반을 뜨거운 사진 사랑을 담는다. 그래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담는다고 하는 이유이다.
이보시오. 사진 동지. 사진 책이 무척 반갑소!~
하물며 시집보다도 한참 안 팔리는 사진 책인데, 어찌해서 내실 생각을 하셨다니 얼마나 사진으로 말하고자 사진으로 감당하려 했겠소?
그간 노고에 치하하고 이렇게 동지의 책을 반갑게 품을 수 있고 동지의 감성이 오롯하게나마 전달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소.
사진 에세이 책 제목이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하니 꼭 하고 싶었던 간절한 말임을 직감할 수 있다. 프로필에서 저자는 사진 기자로 살았다고 했다. 사진 기자로 살았으니 얼마나 사진의 기술로 예리한 시선을 발산했을까? 그래서일까. 사진만큼 하나의 현상에 대해 알리는 순간의 정지된 말을 기자는 함부로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사실 사진만 가지고 다 못한다. 그래서 사진에 글이 붙었고 혹은 반대로 글에 사진이 붙었다. 사진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말을 사진으로 한다. 기자의 시선으로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이 자못 궁금하다.
제목이 이쁘다. 나의 순간이 아니라 당신의 순간. 당신이란 타자가 들어갔다. 결국 나의 순간이 당신의 순간과 겹친다. 오버랩됨으로써 순간이 공유된다. 사진은 늘 이렇게 객관적이지만 공유되는 주관성을 뛴다. 그렇다고 백 퍼센트 주관성도 아니다. 사진의 순간은 바로 너와 나의 공유된 순간에서 보는 공간이다. 함께 그 자리에 있었고 함께 무엇을 바라봤던 그 순간들.
꽃다운 소녀 시절에 저자는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찍고 리와인딩 했다고 고백한다. 뭣도 모르고 시작했던 사진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기어코 사진 전시회를 하고 사진 책을 출간하는 그 수고스러운 과정을 겪게 만든, 이 사진이란 정체를 작가는 말하고 싶었을까 자못 궁금해서 책을 주문했다.
동지의 입장에서 작가의 사진을 소비시켜야 하는 의무감이 팽배한다. 나에게도 소녀 시절에 간절했던 사진의 감성을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느껴 보고 싶다. 적어도 동지라면 말이다.
오랜만에 사진 책 두권 주문했다. 사진 책은 가뭄에 콩나듯 나오는 구나.
소위 사진가의 책장에 사진 책이 보이지 않는 그 허전함을 나는 싫어한다. 아니 저어한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어할 것이다. 왜 여전히 아직도 카메라를 들고 유랑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무슨 업적을 위함인지는 내 알바는 없어도 그렇게 작가처럼 유랑해도 모양 빠지는 삶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을 사진을 통해서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