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추사를 만난다
글씨, 금석학, 고증학, 그림, 시, 주역, 차 이 모든 것의 공통분모에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있다.우리나라 사람으로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막상 추사 김정희하면 무엇을 이야기해야하는지 막막한 것이 현실이다. ‘완당평전’을 출간 후 다시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를 따라 추사의 전기를 쓴 저자 유홍준은 이 책의 이 말로 머릿말을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로 마무리 한다. 한마디로 추사의 삶을 요약하는 말로 이해된다.
유홍준이 들려주는 김정희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책 '추사 김정희'는 어쩔 수 없이 더디게 읽고 일부러 느리게 읽었다. 저자의 전작‘완당평전’과 이상국의 ‘추사에 미치다’등으로 영역을 달리하여 접근하는 몇몇 사람들의 시각에 의지한 채 만났던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일천하다.
‘전공자가 읽으면 학술이 되고 일반 독자가 읽으면 문학이 되는’ 교양서로 추사 김정희 일대기를 담은 것이라는 이 책에는 저자의 김정희 연구에 쏟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인다. 일대기를 조명한다는 것과 남긴 예술세계를 비롯하여 학문적 업적을 밝히고 기린다는 것이 서로 조화를 이뤄 추사 김정희를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이 책을 더디고 길게 읽었던 주요한 이유는 수록된 수많은 글씨와 편액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했기 때문이다.그 중에서 유독 오랜 여운을 남기는 것이 '유재'다. 글씨가 주는 느낌과 그 의미를 풀어내는 글이 모두 좋다. '유재留齋', '남김을 두는 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유재留齋,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움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하라.
留不盡之巧以還造化, 留不盡之祿以還朝廷, 留不盡之財以還百姓, 留不盡之福以還子孫
추사 김정희가 제자로 이조참판을 지냈던 천문학자 남병길(1820∼1869)에게 그의 호인 '유재'를 써준 현판이다. 유재의 출전은 명심보감 성심편으로 그 내용이 아주 좋아 옛 선비들이 달달 외우던 글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 유재를 결과로 판단하기보다는 출발과 과정의 마음가짐으로 이해한다면 추사로 나아가는 한걸음 더 걸어간 듯싶다. 살아가는 동안 시간과 공간에 머무르는 것에 남김의 여유를 챙길 수 있다면 스스로의 가치를 더해갈 기회가 아닐까. 진盡 속에 유留가 있어 성聖이 머무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유홍준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본다.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 채 책장을 열었고 여전히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 채 책장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