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난 - 2022년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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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라 심사평도 읽음. 역시! 싶은 작품도 있고, 작가의 기존 작품 수준에 비해 완성도 면에서 실망스러운 작품도 있고. 그래도 이상문학상인데 음,음, 실망스런 작품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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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고지를 덮었다. 선생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반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내 얼굴과 선생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터무니없으면서 치명적이고 느긋하면서도 통렬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 불과하다는 판명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그런 기만과 착각,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의 진짜 용도가 될 것이다.

-손보미, <불장난>, 75p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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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의 원칙은 늘 우리를 가로막는다. 판단을 유보하거나 중지하라는 불가능한 임무, 인간에 관해서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미리 해결하려고 하면 폭력이 된다. -정지돈,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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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무 살 생일이었던 그날, 연신 소주를 들이켜서 발그레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엄마는 말했다.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함께 공장 마당에서 배트민턴을 쳤는데 그 사람과 자주 짝이 되었다고, 어느 날 셔틀콕이 이마에 세게 부딪혔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달려와 괜찮냐고 물은 뒤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주었다고, 그러니까 그게 다였다, 엄마가 그와 한 데이트는……. 나의 작고 어렸던 엄마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고, 쑥스러워하면서도 그가 내민 손을 잡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라켓을 쥐었다. 셔틀콕을 허공에 던진 뒤 라켓으로 탕 칠 때 엄마의 몸짓은 암사슴처럼 날렵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본 적 없지만 본 것 같은 그 장면을 이제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커플은 곧 라켓을 챙겨 공터를 떠났지만 둥근 선을 그리며 반복해서 오가는 셔틀콕이, 신의 뜻도 아니고 죄의 결정체도 아닌, 그저 그 중간쯤의 어딘가에서 흔들리며 머무는 삶의 한 덩어리 은유가 내게는 계속 보였다.
-356~3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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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 대중이 구체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추상적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인 방식으로 읽힌다. 따라서 대중이구체적이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경험과 추상을 구분하긴 어렵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정의라는 것 자체다.

이택광 - 이제 자신의 저작이나 작업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 독자를 위한 질문을 해보겠다. 당신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또는젠더 이론가라고 불리는데, 왜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가?

스피박 - 나는 의식적으로 탈식민주의라는 주제를 정한 것이아니다. 나에게 정치는 윤리적이라기보다 젠더적이다. 왜냐하면 젠더는 거기에 중요한 문제로 있기 때문이다. 젠더가 거기있었기 때문에 내가 연구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추상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사회정의에 대한 추상화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젠더의 문제다. 다음 문제는 남아와 여아가 태어나서 상징적인 아버지를 가지고 어떤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는 윤리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젠더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젠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경험을 읽는다는 차원에서 나에게 먼저 존재했던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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