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개인적으로 지난 몇 달간 한강 작가님의 책을 연속해서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책이다. 어떤 내용이 나올진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간 읽어왔던 작가님의 작품들에서 느껴왔던 전반적인 분위기나 감정에서 딱히 크게 벗어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그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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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읽어나가다가 소제목 중에 ‘진실‘이라는 제목을 가진 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화자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뭔가 되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여기 나오는 에피소드를 잠시 언급하자면 한 집에 같이 사는 고모가 독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해서 번 돈을 이불 틈새에다가 숨겨두는 장면을 우연히 화자가 보게 되는데, 몇 일 후에 그 돈이 감쪽같이 없어지자 고모는 화자가 돈을 훔쳐갔을 것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온 가족을 소집한 뒤 화자를 집중적으로 추궁해서 진실이 아닌 자백을 받아낸다. 근데 실제로는 화자가 돈을 훔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분위기에 못 이긴 나머지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자백한 것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조금 지나고 알고보니 진짜 범인은 화자가 아닌 화자의 누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화자의 누이는 결국 화자에게 사과하면서 이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화자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게 되는데, 본문에 나온 화자의 깨달음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밑줄쳐보았다. p.62에 밑줄친 것인데, 언제든지 다시금 곱씹어보며 생각해봄직한 깨달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부족할 때 사물들의 형상은 조금 기이해 보인다. 두뇌 회전이 둔해지는 대신, 정신이 멀쩡할 때는 모르고 지냈던 어떤 부위가 자극되며 낯설고 강렬한 감각을 느끼기도 한다. - P9
라이프캐스팅이라면 석고를 부어 떠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를테면 데드마스크를 뜨는 방식이다. - P11
나는 착각한 것이다. 저것은 석고상을 자른 형상이 아니었다. 저것은, 저 안에서 한 육체가 방금 빠져나온 형상이었다. 석고상의 바깥 면이라고 생각했던 거친 윤곽선은 육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었다. 윤곽 내부의 선이 부드럽고 섬세한 인체의 굴곡을 고스란히 도치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 P16
저것은 그 껍데기들을 감싸고 있던 또 하나의 껍데기였다. 껍데기를 품었던 껍데기. - P16
그의 눈에 어린 완전한 고요는 내면의 평화가 아닌지도 모른다고,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 위로 덮어놓은 얇은 막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때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 P22
왜 내 삶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는가. - P30
이제부터 내가 쓰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다. 이 기록은 결코 그 ‘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우리라는 것을. - P30
하얀 탈바가지. 웃고 있는, 딱딱한 탈바가지. - P37
사람이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 P43
조용한 말씨가 더 무서울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더 위력적이고, 더 잔인하다는 것을. - P47
나는 용기 있는 아이가 된 건가, 비겁한 아이가 된 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그러나 그것이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라면, 나 말고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진실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가령, 내가 오늘 밤 죽기라도 한다면 흔적도 없어져버리는 것이 진실 아닌가? - P59
진실이란, 저렇게 추한 것이로구나. - P60
나는 머리의 피가 아래로 쏠려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고모가 그랬듯이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들 중의 누구라 한들, 나는 그 사람에게 적의를 품을 수 없었다. 단지 그는 나와 똑같이 비겁했을 뿐이다. 나와 똑같이 거짓을 말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나는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의 거짓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모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진실만을 환멸했다. 그 쓴 환멸을 나는 안경알 속에 숨겼다. - P61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ㅡ소화해내야만 하며ㅡ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 P62
누이의 참혹한 참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것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후 나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누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진실을 믿기 때문에 깊이 상처 입으며 쉽게 회복되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 그들의 삶은 나에게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나로 말하자면, 착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똑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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