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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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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내가 서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한강 때문이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보면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살은 흘러 흘러 바다로 갈 것이었다. 바다는 단지 사람들의 호오(好惡)에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화합의 장으로, 때로는 정복과 폭력의 장으로,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 바다였다. 주경철은 [문명과 바다](산처럼)에서, 바다에서 형성된 근대를 정리했다.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가 쓴 자연사 4부작([바다] [새] [곤충] [산]) 중 하나인 [바다]는
바다 여행기와 같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독수리를 타고 바다의 세계를 한 바퀴 돌다가 해저의 숲으로 여행하는 기분입니다. 모래톱의 속삭임이 들려오고 여기저기서 일렁이는 거대한 파도를 탄 듯합니다. 바다가 선생님께 그렇게 쓰라고 부추긴 모양입니다.”(플로베르가 미슐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플로베르의 이야기처럼 미슐레의 문장에는 바다가 살아있다. 심해에서의 조류의 순환을 ‘박동’으로 표현하며 “난류는 극지의 경계를 ‘두드리고’ 극지의 한류는 적도를 ‘두드린다’”(57쪽)고 쓴다. “파도는 두려운 ‘순간적 운집’ 효과를 냈다. 인간이 아니라 잔인한 종족, 집 지키며 으르렁대는 개떼 아니 미친 개떼…. 야생 개일까, 집 지키는 개일까? 이도 저도 아니었다. 이름도 없고 가증스러운, 눈도 귀도 없이 거품만 뿜는 아가리뿐인 짐승이었다.”(84쪽)

“육지와 대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육지는 말이 없지만 대양은 말한다. 대양에는 목소리가 있다. 먼 별들에 말을 걸고, 그 별의 운행에 자신의 묵직한 음성으로 답한다. 대양은 땅과 해안에 비장한 억양으로 말하고, 그 메아리를 받는다. 투덜대고 겁도 주면서 으르렁대거나 한탄한다. 특히 사람에게 말을 건다. 대양은 풍요로운 수렁이다. 그곳에서 태초가 시작되었다. 그 힘으로 계속해서 살아있는 웅변을 토한다. 생명이 생명에 거는 말이다. 여기에서 태어나는 수백, 수천억의 생물이야 말로 그의 말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할까? ‘생명’을 말한다. …무슨 말을 한다고? ‘불멸성’이다. …또 무슨 말을 한다고? ‘연대’다.”(350~351쪽)

미슐레가 ‘글로 쓴 사진’([글로 쓴 사진]은 존 버거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은 한편의 인상파 작품처럼 생생하다. “고래는 무척 수줍다”고 말할 수 있는(새 한 마리에도 놀라 갑자기 잠수하며, 심히 불쾌해한다) 바다에 대한 애정과 뛰어난 관찰력에 의해 그려지는 그림이다. 하지만 종종 미슐레의 문장은 바다처럼 흐르기도 한다. 그가 그리려고 하는 것, 전하려고 하는 것이 명확한데도 눈이 문장을 놓칠 때가 있다.  

이 책에서 바다는 단지 물의 흐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부, 등대, 명태, 산호, 해파리, 돌, 조개와 진주, 해적, 고래, 그리고 인류와 역사. 바다 안에 그 모든 것들이 있다. 미슐레 역시 책의 말미에서 “우리가 살면 바다가 살고, 우리가 죽으면 바다가 죽으리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바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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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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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도덕, 삶을 이야기하다

11월 신간 페이퍼에도 적었듯, 마이클 샌델의 저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주목을 받은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철학 등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생명윤리라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가 도덕에 기반한다고 역설한다’는 내용은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지만, 그럼에도 지적 희열을 느끼게 했던 그의 수업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게 만든 책이 [왜 도덕인가?]였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넘어서기는 힘들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 정의보다 덜 가치적이어서도 아니고 [정의란 무엇인가]가 먼저 소개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먼저, 한국경제신문에서는 [왜 도덕인가?]를 이렇게 묵직한 양장본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왜 도덕인가?]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비해 덜 한 인터렉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도덕이라는 본질적인 요소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책에서 언급되는 예시들이 흥미는 있지만 새롭지는 않았다.

책에서는 3부로 나눠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를 이야기한다. 도덕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경제, 사회, 교육, 종교,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덕은 사회 어디에나 존재한다) 도덕적 논의가 되고 있는 사안들의 예를 든다. 복권과 도박은 공공서비스인가 비도덕적 타락인가, 존엄사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정치인의 거짓말은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문제들도 한국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고 있지만 특히 상업주의가 교육을 어떻게 물들이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거리를 준다. 이어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는 도덕적 가치가 왜 중요한가를 설명한다. 3부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에서는 그가 꾸준히 주장하는 결론(‘모두를 위한 경제정책’ 즉, 공동체주의적인 자유)을 설파하지만 미국 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한국 상황과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마이클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정의나 도덕은 공동체주의의 회복을 위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이지만, 생활과 밀접하고 직접적인 도덕은 갈피를 잡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정의는 무엇인가]보다 더 쉬운 예이고 답도 명확하지만, 이를 바꾸기란 더 어려운 것이다. 

왜 도덕인가. 그는 이 책을 통해 “실질적인 도덕적 논의가 진보적 공공 목적과 부딪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는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신념들을 회피하는 대신 그것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려운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공공의 숙고를 함으로써 반드시 일치된 합의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관점을 충분히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 역시 없다. 타인의 관점과 견해를 알아갈수록 그것을 전보다 더 싫어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시도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결과를 알 수 없는 법이다.”(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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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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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을 자유는 최소한의 자유이지만 동시에 최고급의 자유이기도 하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내게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역량이 갖춰져야 한다. 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돼야 한다. 책을 읽을 자유는 그 모든 조건을 필요로 하기에 ‘어려운 자유’일 수도 있다. - 로쟈 <책을 읽을 자유> 9쪽  
   

알라딘 신간평가단(8기) 인문/사회 분야에서 가장 먼저 받은 책은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이다.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쓴다. 세상엔 로쟈처럼 잘 읽는 이도 있고(그는 잘 쓰기도 한다!), 오웰처럼 잘 쓰는 이도 있다(그는 잘 읽기도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어느 서평자의 고백’을 보면 조지 오웰은 1940년 한 해에만 백 권 이상의 서평을 썼다고 한다. 단어수를 따져가며 반복되는 작업과 책에 대한 반응을 날조해야 하는 서평자로서의 회의가 드러나는 글이지만,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같은 에세이에서는 서평자로서의 재능도을 유감없이 발휘된다. (물론 <걸리버 여행기>는 그가 여섯 번 이상 읽을 만큼 애착을 가진 책이다) 오웰에게, 그리고 로쟈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따로 떨어뜨릴 수 없을 만큼 밀접하다. 

하지만, 읽는 행위도 매우 중요하지만 쓰는 행위는 그에 앞선다. 읽기가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면 쓰기는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물론 잘 읽는 것은 존재를 재탄생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는 이미 서평을 통해 좋은 책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의미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 스스로(또는 더 많은 우리들이) 쓰는 주체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1984>와 <동물농장>, 조지 오웰을 대표하는 소설이자 문학사의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 두 책은 풍자적이기도 하지만 내러티브가 잘 살아있어 소설가로서의 조지 오웰을 말하는데 손색이 없다. 하지만 두 소설에만 머문다면, 조지 오웰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면은 바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조지 오웰이다. 그는 버바에서 제국경찰 간부로 근무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며, 또 빈곤과 가난을 경험하며 온 몸으로 시대에 뛰어들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 이후 수천년 간 인류가 매달려온 그 해석적인 의미로서 정치적 인간이었던 셈이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이 같은 모습이 잘 드러난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 79~300쪽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동기적인 이유다. 그 역시 “내가 글을 쓰는 동기가 오로지 공공의식의 발현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듯하다”며 그것이 마지막 인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쓰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그 글은 힘을 잃는다. 조지 오웰의 글에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힘은 글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조지 오웰이 지금까지 읽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건, 글을 잘 쓰는 것(기교)과 글을 잘 표현하는 것(사상)이 층위를 이루며 켜켜이 포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왜 쓰는가>에 수록된 29편의 에세이는 조지 오웰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한편 ‘언어를 다루는 재주를 타고나는 사람’으로서의 조지 오웰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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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2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글 쓰는 이유를 명확하면서도 쿨하게 밝히는 조지 오웰의 글이
참 좋은거 같습니다. 오히려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나은것도 같고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루 2010-11-23 16: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리뷰에 쓰려다가 만 이야기 중에 번역이 있었습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번역한 이한중씨가 에세이를 선별하고 번역을 하셨는데요, (제가 원문까지 대조해볼 능력은 안 되지만) 역자의 글솜씨도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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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이현우)가 <책을 읽을 자유>에도 언급했듯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로쟈의 서평을 읽다보니 “발간된 책은 같지만, 읽히는 것은 제각각 다르다”는 변용이 가능하다. 그가 10년간 읽고 엮어낸 책들 중에는 읽은 책도 있고 읽지 못한 책도 있지만, 이 책이 그 책이었나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리뷰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책의 재탄생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후 두 번째 책이다. 사실 그 책이 발간될 때만 해도 ‘영향력 있는 인터넷 서평꾼’ 정도로 소개되었지만 몇몇 기사와 글을 볼 때 그는 오히려 데뷔가 늦은 편이었다. 데뷔가 기존 형태와 다르다고 해서 그 가치가 낮춰질 필요는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표현처럼 ‘무려 600쪽밖에’ 안 되는 서평집을 출간한 것이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그가 쓴 서평을 모은 <책을 읽을 자유>는 전공인 러시아 문학은 물론 경제, 예술, 철학, 과학 등 전방위적 학문 지식을 매우 조밀하게 엮어 책 한권한권에 생명을 부여한다. 지식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문장 곳곳에서 배어나는 상식은 ‘질투’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서평집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읽히는 것이 제각각’인 이유도 있겠지만 핵심이 사라진 서평을 발견할 때도 있고 취향에 맞지 않는 책들이 소개될 때도 많다. 서평집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는 사람의 시각을 읽는다는 의미다. 타인의 시각으로 책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로쟈의 서평은 서평집이라는 이유로 투덜댈 수 없다. 일단 ‘군침 흘릴 만큼’ 알짜배기 같은 책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소개되어 있다. 또 이 책에 수록된 서평들이 매체에 기고한 글이 많은데 이미 읽혀지기 위해 쓰인 글들은(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힘들겠지만) 서평에서 놓칠 수 있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게 한다.

지식의 그물코
사실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그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그들만의 정보를 아는 것과도 같다. 로쟈의 방대하지만 선별된 정보는 감사할 정도다. 앞서 언급했던 신형철이 로쟈에게 ‘빚을 졌다’는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신형철의 평을 조금 더 옮겨보면, “이번 책에서 로쟈는 문학 철학 역사학 사회학을 넘나들면서, 배치하기 짝짓기 지도 그리기 교정하기 등등의 테크닉을 발휘하여 저 ‘다양한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책 읽는 방식에 대해 배울 수 있었기에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다. 가령 책 읽기에 강약이 있을까? 로쟈의 글을 읽어보면 그렇다. 대충 넘겨 읽는 책들이 있는 한편 원문까지 대조해가며 읽는 책이 있다. 지식을 엮는 방법이 있을까? 역시 그렇다.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행간에는 다양한 지식으로 그물코를 짜는 방식이 녹아있다.<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함께 로쟈 에세이-로쟈 서평으로 지식을 엮어내면 더욱 의미 있는 책 읽기가 될 듯하다.

질투는 나의 힘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들고 읽기에 묵직한 600쪽 분량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또 쉴 새 없이 눈과 머리를 회전하며 받아들여야했던 인문학 중심의 정보도 무거울 때가 있었다(학문은 의외로 몸을 써야 하는 것이다!). 10년, 아니 중학교 시절 읽은 <수레바퀴 밑에서>부터 시작한다면 30년 가까이 되는 무게이니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지난 10년간의 서평이지만 최근작이 많아 그의 부지런함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600쪽의 분량도, 인문학적 지식도, 질투에 활활 타오르며 읽어냈다. 로쟈가 ‘책을 읽을 자유’를 말했다면 나는 ‘질투를 할 자유’를 이야기하고 싶다. 기형도 시인이 말했던(하지만 의미는 조금 다를 수 있는), ‘질투는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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