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법의 여성차별에 대한 태도에 여성이 집단적으로 불만을 표현한 것은 시민혁명 후 형성된 근대법이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즉, 여성도 참여하였던 프랑스 시민혁명의 성공 후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모든 인간은 자유와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고 기본적 권리로서 투표권, 재산권 등의 인권을 가진다는 것을 천명하였지만, 그러한 인권은 남성에게만 부여되었다. 이에 여성작가이자 정치가인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는 여성들의 항의를 집약하여 「여성시민의 인권선언」을 1791년에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여성도 인간이므로 남성과 동등하게 인권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그녀는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처형당했다. 1773년에는 여성의 정치결사를 금지하는 법령이 공포되고, 1793년에는 질서가 회복될 때까지 모든 여성은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5명 이상의 여성이 거리에서 같이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면 무력으로 해산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체포한다는 「가정복귀령」도 공포되었으며, 1795년에는 여성만의 의회 방청과 여성의 정치적 집회에의 참가를 금지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그 이유는 여성은 흥분하기 쉽고 수치심이 많으므로 정치에 필요한 능력이 없고 가정을 돌보는 것이 천질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노예제 철폐운동에 참여한 여성운동가들이 당시 노예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는 경험을 하고 1848년에 뉴욕주의 세네카 폴즈(Seneca Falls)에서 집회를 열고 여성의 권리선언서인 「여성의 소신선언」(Declaration of Sentiment)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인류의 역사는 남성이 여성 위에서 절대적인 전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과도한 권리침해와 횡포의 역사이다." , "모든 남녀는 평등하게 만들어져 조물주에 의하여 일정한 박탈당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고 그중에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된다.", "남성은 ㅇ성에게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지만, 그 법을 만드는 데에 여성의 목소리가 포함된 적이 없다. 법은 언제나 남성 우위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고 권력을 남성의 손에 넘겨 주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하지 못하다. 남성은 시민으로서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선거권조차 여성에게 허용하지 않았고 재산권, 직업을 가질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등을 억제하였다. 우리는 국민의 절반인 미국 여성에게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특권을 즉각 부여할 것을 주장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여성이 주축이 되어 법의 개혁과 여성의 인권보장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까지 여성은 일반적으로 투표권이나 계약체결권과 같은 완전한 시민권이나 정치권을 부여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노예나 성매매를 위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은 1920년에, 영국은 1928년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였고 시민혁명의 발상지인 프랑스는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때로부터 약 156년이 지난 1945년에 비로소 여성에게 참정권을 인정했다. (pp.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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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아노, 거울 너머의 역사 - 승자의 맞은편에서 바라본 세상,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부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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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잠시 후, 미국의 첫 헌법은 다음과 같은 개념을 선포했다. 노예 한 명은 일반인 5분의3의 가치를 지닌다고 설정한 것이다.

 

헌법 초안을 다듬은 구버뉴어 모리스가 그에 대해 반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그는 뉴욕 주에서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미래에 "이 주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사람 각자는 자유인으로서의 특권을 향유하게 될 것"이라는 헌법의 약속만은 얻어낼 수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얼굴과 영혼을 부여한 시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 모리스는 역사가 잊어버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2006년에 에스파냐 기자 비센테 로메로가 모리스의 무덤을 발견했다. 브롱스 남부의 어느 교회 뒤였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비와 햇빛으로 지워져 있었고, 비석 위에는 거대한 쓰레기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p.278)

 

 

 

 

로버트 카터는 정원에 묻혔다.

 

그는 "그늘을 주는 어느 나무 밑에 묻어 평화와 어둠 속에서 잠들게 해주고, 그 어떤 비석도, 그 어떤 묘비명도 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버지니아의 명문가 귀족인 이 사람은 아주 부자였다. 아니, 영국에서 독립한 그 번창한 자산가들 전체에서 가장 부자였을 것이다.

 

비록 일부 건국의 아버지가 노예제도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고 해도, 소유하고 있던 노예를 실제로 해방시켜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카터는 자신의 흑인 노예 450여 명을 해방시켜 "각자의 의지에 따라 재미있게 살고 일하도록 놓아주었다." 그는 그 어떤 노예도 고립무원의 상태에 내쳐지지 않도록, 노예들을 차근차근 해방시켜주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도 폐지를 천명하기 70년 전이었다.

 

이런 '미친 짓' 때문에 그는 고독 속에서 잊혀버렸다.

 

그의 이웃 ·친구 ·친척들은 모두 자유를 찾은 흑인 노예들이 개인과 국가의 안녕을 위협할 것이라 믿고서 카터를 내팽개쳐버렸다.

 

나중에, 그의 행위에 대한 보상은 바로 집단건망증이었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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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가 되고야 CIA가 실토한 MK울트라 계획

(잭 앤더슨, 워싱턴포스트지, 1982.8.28일자)

https://www.cia.gov/library/readingroom/document/cia-rdp90-00965r000100150073-8

 

 

MK울트라 (나무위키)

https://namu.wiki/w/MK%20%EC%9A%B8%ED%8A%B8%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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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늦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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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역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김윤성 옮김 / 들녘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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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를 채택해야 한다. 




아직도 고문이 이 세상의 많은 곳에서, 적어도 준합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고문의 역사와 그 동안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 그리고 수세기 동안 고문을 가하기 위해 고안된 수단이나 특수한 도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바쳐질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면위원회가 재차 폭로하고 있듯이 인간의 잔인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문은 국가의 공적公敵으로 지목된 몇몇 사람들뿐 아니라, 운 나쁘게 고문 기술자에게 걸려든 무고한 시민에게도 자행되고 있다.(전자도서 26)

고문반대 국제협약은 1987년부터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고문반대위원회(CAT)도 제네바에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CAT가 조직적인 고문을 받은 흔적이 있는 사람에게서 정보를 받아 조사할 권한이 있다고 해도, 이 권한은 제한되어 있다. 국제협약은 특정 국가가 CAT의 정보조사 권한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서면 형식의 선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95년까지 국제협약에 서명한 86개국 중 7개국-아프가니스탄, 벨로루시, 불가리아, 중국, 이스라엘, 모로코, 우크라이나-이 그러한 선언을 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국제협약은 CAT에게 개인이 직접 불평을 호소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는 한 국가가 CAT의 개인적 불평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한다는, 또 다른 서면 형식의 선언을 했을 때만 가능하다. 1995년까지 35개국만이 그런 권한을 인정하는 선언을 했을 뿐이다. (전자도서 537-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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