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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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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호칭을 보았다. 나는 이효석을 좋아한다. 그의 소설이 그 상을 받았다니 작가의 글이 궁금했다. 읽고 나서 그의 글이 시적이라고 느꼈다. 시적인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흐름이 부드럽게 연결된다. 읽는 내내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하게 만든다. 사건과 사건과의 관계가 긴밀한 편이다. 재미있는 주제를 잡아서 문제를 터트리고 안전하게 착지한다.


소설은 “딜리터”를 내세워서 내용을 전개한다. “딜리터(Deleter)는 고객이 의뢰한 물품을 그가 죽고 난 이후 제거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왕과 관련된 자료는 중요한 자료로 분류되고, ‘사료’로서 따로 기록하는 사람이 있었다. 개인정보는 기억에만 의존하여 보존되었기 때문에 누락되는 부분도 많았다. 요즘같이 자발적으로 개인정보를 공개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시대에 죽고 난 이후 자신의 정보를 지운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요즘은 개개인의 입지가 커졌다. 개인의 정보는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은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비밀로 만들지만, 마지막까지 그걸 지우지 못할 수 있다. 지운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였던 무언가를 버리는 작업이고, 굳이 버리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에서 지우기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죽고 난 이후에 남아서 돌아다니는 것은 꺼림직하다. 소설에서 남겨진 정보가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낼 각오를 하는 사람들은 “딜리터”에게 의뢰한다. 


비밀은 무대의 암막천이다.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일은 꼭 필요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비밀로 가려져야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일들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사소한 일이야 암막천에 가려진다. 암막천으로는 가릴 수 없는 소동이 벌어지지는 건 예정되지 않은 일이다. 관객이 알 필요가 없었던 비밀이 무대에 영향을 끼침으로서 알아야 할 비밀이 되어버린다.

그럴 경우 배우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걸 바라보는 관객은?


소설은 파급효과가 크든 작든 비밀을 감추려는 사람들, 비밀을 파헤치려는 사람들, 비밀을 만들고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만든 비밀을 스스로 처분한다. 하지만 아직 질문은 남아있다. 왜 비밀을 만들고 지우려는 걸까?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은 비밀을 지우려는 이유를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328쪽) 라고 말한다. 


삶을 거머쥐려는 욕망 자체가 추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닌데 나만의 것으로 착각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할 때 추해진다.


순간만을 숨쉬다가 사라질 건데, 굳이 뭘 지우려고 노력하는 게 하릴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남겨진 내 과오들은 내게는 하등 중요치 않다. 그 과오들이 먹칠하는 것은 완전한 상태로 죽음에 이른 내가 아니라 나의 후손일 뿐이다. 그 과오의 잘잘못을 가려야 물려받을 것과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의 인간이 저지른 과오가 많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오만이 아닐까? 게다가 내게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조롱당해야지. 그것을 후손이 물려받는 다는 게 더 끔찍한 일이다. 과오를 우상시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과오는 과오로 밝혀질 텐데. 과오를 우상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과오를 과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균형잡기를 한 사람이 다 해치우려고 하는 게 오만이다. 그 오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꿈’이기는 하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준비해놓고 죽고 싶은 욕망.  살아 있을 때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균형있게 사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좋지만. 이미 저지른 것을 죗값을 치르는 것 이상으로 없던 일로 만들려고 시도하며 보내기에는 세월도 돈도 너무 아깝다. 귀찮은 일이다.

만약 내가 큰 일을 저지르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일을 저지른다는 건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니까.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가 주역으로 선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과오는 과오 나름대로, 선행은 선행 나름대로 뭔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남길 것이다. 역시 내가 좌지우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주어진 과제를 해치우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소설로 시를 쓰는 건, 알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중요한 것을 해석 불가능한 상태로 세상에 던져놓는 것은 소설가의 꿈이다. 해석할 단어가 이미 만들어진 문장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아서 설명할 수 없는 소설. 온 몸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어서 굳이 해석이 필요없는 소설.


그가 잡은 주제는 흥미로우나 더 깊게 팔 여지가 소설 군데 군데 남아있어서 아쉽다. 사람들은 왜 비밀을 만드는가? 비밀을 만드는 것은 필연적인 일인가? 주인공은 남기고 싶지 않은 비밀을 삭제한다. 나는 비밀을 만드는 일반적인 이유밖에 모르고, 그것은 내가 체험한 결론이 아니다.

이야기는 완결되었지만 질문이 완결되지 않았다. 완결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그가 풀어놓은 많은 이야기 들 중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한 질문이 남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가 '비밀'이야기를 하려고 끌어들인 다양한 주제는 주인공 한 명의 한 가지 갈등이 주요 인물의 상실과 함께 마무리되자 끝난다. 주제가 남긴 질문들이 좀 더 숙성되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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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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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상황을 증오한다.”120p


파울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은 파울이 비추는 베른하르트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베른하르트는 여러 가지 상황을 바라보는 자신의 위치와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서술한다.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남을 분석하고 의미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다.


"눈에 뜨이지 않기, 남을 배려하기, 없는 듯이 조용히 있기 등등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만 장기간의 병원 생활을 그나마 수월하게 견딜 수가 있다. 반항과 고집, 제멋대로 하려는 이기심등을 버리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는 위험할 만큼 쇠약해진다.”24p


병자들의 생활이지만 내 일상과 비슷했다. 환경에 적응하려고 자신을 죽이고 규율을 따를 때도 많았다. 그런 나는 스스로를 신체만 살아 움직이는 시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나는 그가 묘사한 그의 모습에 친근감을 느꼈다. 


"왜 나는 내가 가야 할 그 길을 가려 하지 않는가? 왜 나는 다른 모두가 가는 그 길을 얌전히 따라가지 않는가?”20p

"파울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내 전 존재를 지나치게 치열하게 몰고 간 것이 원인이었다. 즉 자신을 과도 평가한 나머지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까지 스스로를 소모해 버린 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파울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매번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혹사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가진 모든 가능성들을 초월하려고 했고 나 자신뿐 아니라 그 무엇도 전혀 돌보지 않은 거의 병적인 무모함을 가지고 무조건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한 무모함은 결국 파울을 망가뜨렸고 그리고 언젠가는 나 자신도 파울처럼 망가뜨려 버릴 것이다.”30p


그가 일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힘이 부쳤다. 그럼에도 베른하르트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고 세상을 거부한 것은, 세상이 격리한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경험을 가진 그의 운명이기도 했다. 그의 글은 끊임없이 세상을 부정하고 자신을 부정하는데도 거북하지 않다. 인간으로서 나를 부끄럽게 하지도 않았다. 그의 말은 솔직했기 때문일까? 솔직한 말이 불편할 때도 있다. 그는 의도를 담아 비판하지 않았다. 단지 싫어하는 부분들을 지적해서 서술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감사함을 느꼈다. 그는 비극을 판단하는 하나의 가치기준을 제공한다. 겉으로 비극처럼 보이는 행동은 비극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향하는 모든 행보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말한다.


"파울과 나의 차이라면 오직 한 가지, 파울은 자신의 광기에 스스로를 오전히 내맡긴 반면에 나는 압도적인 내 광기에 나를 한 번도 온전히 맡기지 않았다는 것뿐이다.”32p


나도 가지고 있지만 내 안에서 발화하지 못하게 막은 것들. 나는 사회 안에 어우러져 살아가려고 부정적인 나의 일부를 포기하고 산다. 사회가 허락하는 것만 부정하기도 한다.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 단지 그는 사회의 제약을 생각치 않고 그 자신의 몸을 제물로 부정적인 것을 세상에 나오게 한 것 뿐이다. 그는 부정한다. 그의 부정은 살고자 하는 자의 솔직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 역시 그 심연으로 끌려들어가게 한다. 그래서 그와 파울은 불행해졌다.


"원칙적으로 병자는 늘 혼자 남겨지는 입장이다. 그렇지 않다며 반박하는 말들은 모두 왜곡된 거짓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병자는 몇달 전, 혹은 나도 몇번이나 경험했듯이 몇 년 전에 중단된 시점으로 되돌아가 삶은 현재와 연결하기 위해 매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야 한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건강한 사람은 즉시 인내심을 잃어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병자를 편하게 해 주어야 할 바로 그 시점에 병자를 모든 면으로 더욱 힘들게 만든다. 건강한 사람은 결코 아픈 병자들을 참아내지 못하며, 이점 역시 잊으면 안되는데, 병자들 역시 건강한 사람들을 참아 내지 못한다. 병자들은 건강한 사람보다 만사에 훨씬 더 까다로워지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몸이 건강하니 까다롭게 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67p


그는 치열하게 살았다. 그는 병자인 자신을 살려내려고 치열하게 산 것 같다.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베른하르트는 병자인 자신만큼은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병자인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그는 그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그는 그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가 보는 그대로 서술한다. 부정적인 것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살기 위해 부정적인 것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서술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낙인이 찍힌 자들을 피한다. 나 또한 이런 저열한 감정에 굴복하고 말았다. 친구가 죽기 몇 달 전부터 나는 구차한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완전히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128p


그는 살기 위해 그에게 인생의 깨달음을 준 친구를 거부한다. 친구를 거부하고 삶을 선택한다. 그는 친구와 함께 세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삶을 버텨왔다. 친구를 거부하는 것은 그 자신이 행해왔던 행동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정을 버리고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꾸려왔기 때문에 그가 삶을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그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는 온몸으로 살아있는 자의 모순을 보여준다.


"내 마음에는 온갖 불안과 절망이 들끓었지만 단 한 가지, 희망의 불씨만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21p


그는 스스로 희망의 씨앗이 자신 안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가 파울이 죽어갈 때 그를 내버려두고 돌아나온 것은 그 자체로 절망이자 희망이었다. 그는 파울의 죽음을 뒤로 하고 살아남아서 그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 동시에 완전한 존재다.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한다. 하지만 인간이 판단한 모든 것의 가치는 불완전하기도 하고, 완전하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은 중요하다. 보통 사람들의 판단도 중요하고, 병에 걸린 상태의 베른하르트의 의견도 중요하다.

그는 그의 책을 글을 읽는 독자가 완성하게 한다. 독자는 그가 쓰지 않은 절반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책 자체를 완성품으로 세상에 내놓지 않고 독자를 통과한 이후에 세상이 격리한 것 역시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존재의 결정적인 순간과 시기에 모든 것을 의미했으며 그리고 실제로 전부이기도 했던 사람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몇 안되는 사람이 죽은 자,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 우리와 함께 공존하는 자,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와 나란히 걷고 있는 자조차 아직은 어떤 판단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배웠기 때문이다.”114p


그는 죽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살아있는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판단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그가 그린 비극이 비극으로서 세상을 긍정한다고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했지만 역설적으로 생에서 우리가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을 지정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자의 입장에서 부자를 보았으며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를 보았다."139p


그는 병자 입장에서 병자를 보고, 건강한 자 입장에서 건강한 자를 보았다.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를 보고, 부자 입장에서 부자를 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추한 것을 추하다고 말한다. 세상에 굴레에 휩쓸리지 않고 그의 기준을 따른다. 그의 언어는 솔직하다.


"오직 떠나온 장소와 도달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이 행복한 인간에 속한다.”124p


그는 장소이동을 통해 자신이 있을 곳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찾는 과정에 있을 때만 행복헀다. 도달해버리고 나면 그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다시 헤매는 상태가 된다. 장소는 꿈으로서 존재할 때 그에게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꿈은 그가 어떤 상상을 포함해도 실재하는 장소였다. 장소에 도달하면 꿈은 산산히 깨어진다. 도달하는 것은 끝이자 다시 떠나야 하는 시작이었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 들어 갈수록 나날이 더욱더 노련한 술책으로 있는 묘안 없는 묘안을 짜내서 적당히 견딜 만한 삶의 상태를 스스로 조성해야 한다. 그런 병적인 추가 부담이 없이도 이미 한계치에 다다를 만큼 지쳐버린 머리를 더욱 혹사해서 말이다."114p


사실 내가 이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읽은 것은 묘안 없는 묘안을 짜내어 그의 삶을 긍정하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왜 나는 웃음이 나왔을까? 그가 불쌍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열하게 산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치열하고 싶다 생각만 하고 치열하게 살지 않는 스스로가 불쌍할 뿐이다. 그런 스스로가 불쌍해 때때로 지나치게 치열하게 산답시고 자신을 과신하다 과열돼버린 자신이 불쌍할 뿐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 그가 좋아져버린 나 자신은 불쌍하지 않았다.


얇은 책이지만 충분한 말이 들어가 있다. 이 이상 이어지면 지루할 수도 있고, 이보다 짧으면 추상적이어서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문장은 매끄럽다. 오로지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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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사람의 맨발 / 한승원 / 불광출판사 >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수없이 침략받고 지배당하고 타국을 숭배하고 그 문화속에서 한국은 얼마만큼이나 살아남았고 얼마만큼 휩쓸려나갔을까.


 

이 책은 한국사람이 쓴 불교이야기이다. 이 땅은 많은 시간 불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가 세워졌었다. 어떤 배경지식으로 무슨 불교이야기를 꺼낼까. 왜 싯다르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오늘날 한국에 싯다르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코넬 울리히 / 이은경 옮김 / 단숨>

천개의 눈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 어떻게 눈을 천개나 갖게 되었나요?

제목이, 표지가 맘에 든다. 

서스펜스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책이다.

히치콕의 영화를 보았는가? 처음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히치콕은 영화의 처음 걸음마를 뗀 사람이다. 많은 영화인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인식은 발명품이었다. 그 히치콕이 영감을 얻은 책이라는데.. 정말로?


이 안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다. 책의 내용이 기대된다.






<이런이야기 / 알렉산드로 바리코 / 이세욱 옮김 / 비체>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한 마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일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히스토리 채널’에서 볼 수 있는 역사보다는 조금 덜 사실적이고, 《백년의 고독》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사실적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것과 순전한 허구 사이의 경계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경계선이 초현실주의적인 굴곡을 보이기도 한다.)

백년의고독보다 사실적인 소설?



<얼간이 윌슨 / 마크트웨인 / 김명환옮김 / 창비>

마크트웨인이 쓴 글은 허클배리 핀의 모험, 톰소여의 모험밖에 안 읽어봤는데.

얼간이 윌슨은 재미있을까요? 제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인종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까요? 이 책을 읽으면 인종이 다른 것이 어색하고 부담스럽고 싫은, 부당한 나를 증오할 수 있나요? 부조리함을 부조리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나라는 인간은 몸으로 체험하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고서는 행동이 되지 않아서, 더더욱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이야기는 마치 내가 체험하는 듯 모든 수치와 모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 / 토마스 핀천 / 박인찬 / 창비>

작가가 관념적이라 말하는 글이 독자에게는 신선한 재미를 준다면,

좋은 글 아닌가? 보통 작가가 공들여 썼는데 너무 관념적이라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경우 비극이 벌어지는데, 이 책은 작가 생각보다 잘 읽히는 책인가보다.


작가를 믿는다. 그가 지우지 않은 유치함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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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 토마스 베른하르트 /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때때로 나는 느낀다. 내가 스스로를 이상적인 사람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삶을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자존감은 필요하지만, 병든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시간도 스스로를 꿈으로부터 일깨우려면 필요하다. 이 책이 무척 끌린다. 제도가 해결 할 수 없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모습은 나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라고 해서 도덕적인 삶을 살기만 한 것은 아닌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글쓰기를 버텨왔을까 그 속이 궁금하다. 이것은 어느정도까지 소설화되어 있을까? 소설로서 가치가 있는 작품일까?

< 이 소설은 12년간 죽음에 하루하루 가까워져 가는 한 친구와 그 친구가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친구 사이에 아주 힘겹게 지속되는 기이한 우정을 다룬다. 

자신을 고립과 자살충동으로부터 구했던 친구가 빈털터리가 되어 늙고 병들고 외롭게 죽어갔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베른하르트는 12년 동안 죽어가는 친구로부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에너지를 빨아내고 있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 일부 >



<비극의 탄생 - 프리드리히 니체 / 김남우 옮김 / 열린 책들>


 책 소개글에 호기심이 갔다.  

<희랍 비극의 근원이라는 고전 문헌학적 주제를 다룬 『비극의 탄생』은 니체가 바젤 대학 교수로 있던 1872년에 발표한 저술로 당시 고전 문헌학자들로부터 철저한 외면에 이어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비판의 초점은 『비극의 탄생』이 고전 문헌학적 저작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사변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희랍 문명에 대한 니체의 통찰에서 20세기 지성들은 근대 서구 문명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방법을 찾았으며,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 일부>


니체의 책들은 리스트에만 있고 실제로 읽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가 왜 유명한 지도 자세히 모르는 셈이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판단하는 수많은 글들이 그의 진짜 진가를 알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치 않는다. 다만 그가 서양인으로서 희랍 문명을 어떻게 통찰했는지 궁금하다. 고전 문헌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요소가 뭐였을까. 뭐라고 비판했길래 그들이 기득권을 잃을까 겁이 났던 걸까?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버금갈만한 저작인가? 궁금하다.




<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 허버트 조지 웰스 / 최용준 옮김 / 현대문학>


작가가 직접 고른 단편이라니 더 끌린다.

생각할 수 있는 책이 좋다. 책 내용 일부를 훑어보니 이상한 말들이 우스워서 생각하게 된다. 그게 좋다.

“과학은 체계적 지식이에요. 체계에 들어오지 않는 생각은…… 어쨌거나 부정확한 생각인 게 분명합니다.” 힐은 자기가 말하고도 이게 현명한 말인지 우둔한 말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청중은 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힐이 유물론자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곱사등이가 무턱대고 말했다. 

“물질을 초월한 게 하나 있죠.” 힐이 즉각 말했고 이번엔 자기가 훨씬 그럴듯한 말을 했다고 느꼈으며, 등 뒤 문간에 누가 있는 것도 인식했기에 그 여자를 위해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바로, 물질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는 망상입니다.” - 「현미경 아래의 슬라이드」





<목신 판 - 크누트 함순 / 김석희 옮김 / 시공사>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않은 수많은 훌륭한 도서들 중 하나를 번역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골랐다. 작가가 노벨상 수상자라고... "행복한 그림자의 춤"과 "내 이름은 빨강" ,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책들 때문에, 요새 들어서 노벨상 받은 번역작품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재미와 철학이 담긴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특히 그가 심리의 '우연성'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요즘들어 우연성과 필연성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다. 어떤 순간에 놓여있을 때 지나가고 나면 필연이 되어 버리는 우연들이 어떻게 관계를 이루고 있을지, 관계가 없는 것들을 어떻게 관계 안에 묶어 냈을지. 또한 책을 통틀어 그가 문학으로 세상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 지...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아... 제발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기를. 책 소개만 봐서는 감이 잘 안온다. 철학으로 꽉꽉 들어찼지만 재미도 있는 경이로운 소설이었으면 좋겠다. 진부하게 감정을 늘어놓는 소설이나 한 순간 판타지를 채우고 사라지는 소설은 읽고 싶지 않아서... 그래도 노벨상 받은 작가가 진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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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 일주 열린책들 세계문학 147
쥘 베른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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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문학과의 경계, 그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작가가 탄탄한 조사로 쌓아올린 내용을 밑바탕으로 써내려간 재미있는 작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미건조해보이는 영국의 신사가, 세상이 좁다는 이야기를 꺼내서 세계일주를 80일 안에 할 수 있다는 내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소설의 처음이 시작된다. 여행 중간 중간 방해요소들이 여럿 등장하고, 여행의 성공여부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와서 소설의 끝머리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그 시대에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용한 여러가지 방법들이다. 현지를 조사하지 않고서는 알아낼 수 없을 듯한 요소들이 여럿 등장하여 주인공을 돕거나 방해한다.

또한 정형화된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 소설 내에서 부여받은 역할은 역설적이게도 본연의 목적과는 반대의 것들이 되기 일쑤여서, 표면은 고요하지만 우왕좌왕하는 캐릭터들의 행동들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에 관한 설명들이 소설의 중간중간에 나와서 캐릭터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는데, 한국에 태어나 살아서인지 다르게 비추어져서 눈에 어설프게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면, 꽤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지금이야 과학이 많이 발전해서 80일보다 더 빠르게 세계일주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그 소설을 쓸 당시에는 80일 만에 세계일주가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었을까! 그가 신문에 나온 가설을 실현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이야기 속에 녹여내기 위해 사용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탄탄한 조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서재에서 11시까지 원고를 쓰고 수정하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서재로 돌아와 열 다섯종의 신문을 읽고, 여러 잡지, 과학 협회와 지리 협회의 정기 간행물을 읽으며 필요한 정보를 수첩에 적는다. 이와 함께 자크 아라고(Jacques Arago)를 비롯한 여러 모험가의 글과 백과사전, 과학자와 지리학자와 교유하면 나눈 대화 등 작품에 참고할 만한 내용을 간추린 노트만 해도 2만 권이 넘었다.(-열린책들 "80일간의 세계일주" 역자 해설 중)"

내가 감동했던 부분은, 바로 그 '노력'부분이었다. 그가 소설을 쓰려고 2만권의 노트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작품을 쓰려고 수집한 내용의 방대함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 주체할 수 없이 쌓아올려진 허영의 잔존하는 찌꺼기들을 몰아낼 길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내가 작품을 쓰려면 재능이 필요하지만, 내게는 그 재능이 없는 기분이 들어서 늘 우울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자료와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문제는 재쳐두고, 매번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짓말을 했다. 내게는 재능이 있으며, 언젠가는 그 재능이 빛을 발할 것이다 라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늘상 느꼈다. 나는 여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글들만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마다 나는 감히 내가 어깨를 견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무시하고 깍아내렸다. 그러고 나니 내 존재가치도 덩달아 무가치해졌다.

그들이 나라는 개체에게 무가치하든, 인정받지 못하든, 나라는 존재개체에게 영향을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개체는 '나'밖에 인식하지 못하므로, 그들의 훌륭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내 자신을 기만해도 그를 뛰어넘기는 커녕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쥘 베른도, 2만권의 노트를 생산해내며 글을 써냈는데, 나는 어느정도까지 노력을 했던가.

내가 할 일은 이래도 저래도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짬짬이 글을 쓰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라는 개체에게는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닌가! 훌륭한 작품들을 가슴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 아닌가! 그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그가 그 작품을 쓰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던가. 위대한 작가들의 훌륭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에 심취해서 가슴벅차할 수 있어서, 삭막한 '나'의 세계를 견디고, 버텨온 것을.

그를 깨닫게 해줘서, 또한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서 어린 시절을 꿈으로 넘치는 나날로 보내게 해주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진기한 여행에 몰입하게 해줘서 나는 쥘 베른에게 감사한다.

글의 초반에, 과학과 문학과의 경계가 어느정도 일지 질문했었다. 나는 과학을 믿지만, 과학적이지 않은 것도 믿는다. 과학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완벽성을 추구함에도 불확실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불확실한 것들을 다루지만, 인간을 가장 닮았기 때문에 때때로 객관적일 수 있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 '양면성의 총체'라는 측면 때문이기도 하다. 중용에 가장 가까운 개체가 예술이라고 나는 믿기에, 예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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