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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평점 :
그러니까 그건 아주 어릴때 일이었다. 초등학교 갓 1학년에 입학한 나는 미생물을 볼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났고, 육안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 재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느라 바빴다. 야, 난 미생물을 볼 수 있어. 뭐라고? 미생물? 그래. 난 눈으로 미생물 볼 수 있다구. 어떻게 보는데? 그건 쉬워. 이리 가까이 와봐, 그리고 저쪽 형광등 쳐다보고는 눈을 찡그려봐 -
그리고 그, 혹은 그녀들은 내가 찡그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옆에서 찡그리면서 빛을 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육안으로 미생물을 보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형광등을 향해서 눈을 찡그려보라. 그러면 분명 무언가가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무정형의 생물처럼 보이는 그녀석은 갑자기 공기 중에 톡톡하고 뛰어다니면서 멀리서 허공을 기어다닐 것이다. 굳이 티오마가리타 나미비엔시스가 아니더라도 (이 세균은 1mm크기다.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세균이 다 눈에 안보이는 것은 아닌 것이지) 당신 눈에 무엇인가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아니다. 초등학교때의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올바른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내가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미생물이 아닌 그 무엇인가가 보인다, 정도였다. 미생물이라니. 허공에 실제로 그렇게 미생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훗날 알게 된 사실로는 그것은 눈의 부유물이었고 - 눈의 유리체라던가, 동공에 떠다니는 그런 것들 말이다 - 외부의 물질이 아니었다.
이는 마치 칸트의 철학과 같아서, 정말 거칠게 거칠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일종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다, 라고 여겨지게 되는 꼴이다. 내 눈의 부유물이 미생물인줄 알았다니. 그야말로 웃긴일이 아닌가. 하지만 또 그게 그렇게 그럴듯하였다니.
플래너리 오코너의 이 단편집도 마찬가지인데, 이 단편집의 소설은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안경을 통하여 바라본 세계를 그대로 투영한다. 남부, 루푸스, 가톨릭. 책 날개에 플래너리 오코너에 대하여 설명해놓은 - 난 사실 이 책을 읽기전에는 작가를 전혀 몰랐다 - 부분을 보면 결국 그녀를 규정지었던 것은 위의 세 부분임에 틀림없었으리라. 여성주의적인 부분도 별로 없고, 경제적 계급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도 별로 없다. 그녀의 소설에 나오는 계급은 흑인과 백인, 이라는 인종적 차별에 기반한 것이고, 그 계급을 두고 옳음과 옳지않음조차 없이 뒤섞여 (단편 이발사) 남부 사람들의 편집증적인 흑인에 대한 혐오와 함께 (대부분의 단편) 가톨릭적인 신앙을 변주로 죽음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 (대부분의 단편)
남부는 인종에 대한 모티프를 제공하고, 가톨릭은 그대로 쓰인다. 그녀가 가톨릭적인 신앙에 대하여 맹목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 잘 드러난 단편 중 깊은 오한, 을 읽어보면 주인공은 허위에 가득찬 인물인데 가톨릭 신부를 보고 처음에는 감화받았지만, 나중에 찾아온 가톨릭 신부를 보고는 이 사람은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야, 라고 부정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 멋대로 상대를 규정하고 - 플래너리 오코너가 저 세개의 돌로 이뤄진 안경을 썼듯 - 그 또한 자신만의 안경을 낀 셈이다.
그렇다면 루푸스는? 죽음의 모티프를 제공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파괴적인 힘이다. 여기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이 허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허위를 박살내주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헤겔식의 변증법은 여기에 통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첨예한 대립을 이룰 수 밖에 없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해결될 수 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글들 중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에서의 셰퍼드는 흑인 소년 루퍼스 존슨의 아이큐가 140이라는 점때문에 그를 돌보기로 마음먹는다. 마치 자신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저 루퍼스가 제대로 된 사람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마치 Lupus처럼 Lupus는 셰퍼드의 온몸에 퍼지고 결국 그의 아들을 앗아가버린다.
대부분의 단편의 끝이 죽음이라는 점은 한편으로는 소설 전반적으로 활력을 앗아가고, 평론가들이 말하는 '남부 고딕' 이라는 그로테스크한 장르로 형성시키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저렇게 포장하는 것은 평론가들이나 하는 일이고 독자들 입장에서는 아, 이 사람 곧 죽겠네, 다치겠네, 와 같이 결말이 뻔히 예측가능해진다는 문제점을 낳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정도는 흥미롭지만 그 흥미로움이 지속된다면 결국 지루함으로 바뀌게 된다. 이 단편소설집이 단편이었다면 정말 강렬했겠지만, 혹은 하루에 한편씩 읽었다면 정말 당황스러웠겠지만, 하루에 다 읽기에는 좋지 않는듯 하다. 그야말로 기승전죽음, 기승전다침, 이니까.
하지만 저런 단조로움이 장점을 지울 수는 없다. 저 세 개의 돌이 섞인 안경만으로도 플래너리 오코너는 모든 세계를 펼쳐내었다. 여기서 다시 칸트 이야기를 적지 않을 수가 없는데, 칸트는 계속 자유의지와 정언명령, 실천 이성 등을 두고 고민했었다. 그런 그가 내린 결론은 결과적으로 또 거칠게 말해서 나한테 적용되는 규칙은 내가 만든다, 였다. 당신이 황금률에 기반한 - 거칠게 말한거다 - 어떤 준칙을 세우고 따른다면 당신은 자유로운거라고 말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내 눈에 안경을 낄 수 밖에 없다면 내 안경은 내가 고른다는 거다. 내가 고른만큼 나는 내 세계를 볼 수 있다.
이는 오코너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루푸스도, 남부도, 가톨릭도 - 어쩌면 가족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 사실 그녀 스스로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다시금 그것은 그녀에게 자유를 안겨주게 된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준칙을 내가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준칙을 따르는데 부담이 없다.) 아마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녀가 나름의 규제와 병에 맞서싸우는 하나의 방식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소설집은 그녀의 싸움의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