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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괴테가 쓴 책은 많지만, 나는 그다지 그의 저작을 접하지 못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일단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일부분만 읽고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인데, 이 책도 일부만 읽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읽고 싶다, 라는 감정과 읽을 수 있다, 라는 행위 자체에는 상당히 큰 괴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읽고 싶은 책일지라도 결국은 읽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별다른 그런 감정이 없는데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평을 내릴 수 없고,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책이라는 것은 읽히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보기에, 나로선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례들 사이에서 읽고 싶은 책이고, 마지막장까지 넘길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면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괴테의 수많은 작품들 중 나에겐 파우스트, 가 그랬다. 

 

파우스트의 얼개는 일목요연하다. 지상의 모든 지식을 얻은 파우스트는 절망한다. 그 지식을 얻으면 지금껏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파우스트는 여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지식을 얻은 후에도 그는 그 전과 동일하게 파우스트였다. 정령들은 그를 거부하고, 결국 그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였다. 여기서 이 악마는 계약을 제시한다. '이 세상 모든 쾌락을 그대가 만족할만큼 안겨주마, 그 대가로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바쳐라.' 파우스트는 코웃음친다. 흥, 너같은 악마가 나의 무한한 갈망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가, 라고. 하지만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법,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피의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현실에 만족한다면 내 영혼을 멋대로 하여도 좋다.' 그렇게 이 장대한 서사시는 막을 올린다. 이후의 전개에서 인간의 욕구를 대비시켜보면 파우스트의 행적이 명확해지는데, 성욕 - 파우스트는 난봉꾼처럼 순진한 처녀를 유혹하기도 하고, 헬레네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서 아이를 낳기도 한다. 권력욕 - 황제의 신하가 되어 높은 위치에 오른다. 재물욕 - 해안에 자신의 영지를 가진다.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욕구가 무한한지 무한하지 않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쉽게 허무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오래 쓰면 닳는 것과 같아서, 누구나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을 것이다. 더 편해지기를 바라고,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따스한 것들에 안겨서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나태함은 우리가 죽을때까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나태함을 추구할 것이고, 영원히 편하게 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쾌락의 역치에 다다른다면 결국 생물학에서의 실무율처럼 모두 반응하거나, 혹은 모두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를 파우스트에 적용시키면, 과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맺은 계약이 공정계약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과연 메피스토펠레스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어떤 지고의 쾌락을 주더라도 반복된 쾌락은 결국 허무함을 낳게 될 것이고, 또다른 나태의 길로 접어들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허무함과 나태는 현실에 만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싫증이 났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낮은 확률을 뚫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적어도 파우스트의 입에서 '순간이여, 멈추어라. 그대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을 꺼내게 만들었다. (물론 신의 개입으로 영혼을 뺏기긴 했지만) 물론 그 수단은 메피스토펠레스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목적만 이루면 끝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저런 악마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어떤 순간에 만족한 감정을 느꼈나?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어떤 순간에 만족할 거라고 장담했는가? 그것은 간척지 사업이었다. 그 사업이 끝나면 백성들이 모두 도움을 받고 더이상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적어도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며 즐기고 있는 순간, 그 순간을 꿈꾸며 파우스트는 멈추어라고 외친 것이다. 괴테는 왜 이런 순간을 지고의 행복과 쾌락이라고 설정했을까?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상상속에서도 어렴풋이 저 순간에 지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이런 지고의 행복 - 사람들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기뻐하는 순간 - 을 위해서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까지 얼마나 많은 이상이 명멸했던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에서도 큰 얼개는 다르지 않다. 바우만이 쓴 이 조그만 소책자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다. 누가 모르는가? 낙수 효과가 어떤 의미에서든 제대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현대의 부의 격차는 그 옛날 전태일이 무전유죄를 외치던 때보다 몇 배는 심화되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사회에 깔려져 있는 전제들, 생명력을 획득하고는 사회를 똑같는 레일 위를 달리게 하는 그런 전제들을 배격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바우만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의 불평등은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바우만은 왜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서서 하고 있는가? 그건 바로 그가 인용한 이 문장에 집약적으로 정리되어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우만은 예견된 파국을 막기 위하여 비록 모두가 아는 주장이지만, 그 주장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국이 예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수도 있다. 마치 바우만이 우리가 너무 쉽게 사회 구조에 순응한다면서 그 원인으로 내세운 네 가지처럼 말이다. 경제 성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처럼. 바우만은 방금 이야기한 네 가지가 너무나 쉽게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며 분석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이 바라보는 '파국'은 지식인 스스로들에게는 아무런 증명도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있다. 바우만은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여기서 데카르트를 다시 가져온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다. 영혼은 좋은 것이고 물질은 나쁜 것이다. 그렇기에 영혼을 가진 사람은 좋은 존재이고 물질로 이뤄진 동물은 나쁜 존재이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주체성을 가지고, 영혼이 없는 동물은 우리의 쓰임을 받는다. 이것이 확대되어서 주체성을 가진 존재에게는 모든 긍정적인 측면이 고착되게 되고, 주체성이 없는 존재에게는 모든 부정적 측면이 고착이 되버린다. 여기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오늘날 사회에서 주체성이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오늘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이러니저러니해도 경제관계이다. 경제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생산과 소비가 주를 이루는 관계라는 이야기이다. 논란이 되었던 갑과 을 관계 모두 이런 경제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절대 왕권이 없는 이상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어떤 우위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는 사실상 동등한 존재이다. 방금전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진다고 말을 하였었는데, 소비자가 더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는소비자와 생산자 대부분 사이좋게 경제 지층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세계이다. 모든 부는 상층부에만 집중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우위 관계가 생길 수 있는가? 소비자와 물건사이이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오자. '고객과 소비자가 상품과 소비재에서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뿐' 이라고 한다. 바로 이부분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고객은 실제로 자신도 다른 존재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만 채울 수 있는 도구로 쓰이면서도 판매자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상대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리면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생긴다. 먼저 주체성이 생긴다. 방금 언급한 확장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을 따르면 모든 긍정적 면모가 주체성에 고착이 된다. 그리고 물건에 우리는 무관심하거나 무의미하게 대할 수 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상대가 물건이라면 그런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적 유대가 취약' 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유대에서 더 나아가 '사랑'도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은 가시밭길이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저서 예언자, 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랑은 그대에게 왕관도 씌우지만 십자가도 안겨주리라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왕관은 원하면서도 십자가는 피하려고한다. 결국 자신의 일방적 감정만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자, 소비재 관계를 선호하게 된다. 상대를 물건의 위치로 내려앉혀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가 약해지고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된다면 이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파국이 올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 사회는 위기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 처럼 바우만이 진짜 사회학자라면 파국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견된 파국을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가 사회학자가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다. 단순한 논리학적인 말장난같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그가 진짜 사회학자가 되려면 우리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을 조금씩 따르는 사람들, 무비판적인 수용이 아니라 그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바로 우리가 될 것이다. 이런 힘이 모여서 바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파국의 원인을 알았으니까 그 해결책도 간단하다. 주체, 객체 관계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탈피하여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있는 일퍼센트들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퍼센트는 제외하고서라도 적어도 우리끼리는 사랑을 배우고 상대를 소비재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대를 도구로 격하시키는 본인 스스로도 정작 다른 사람에 의하여 도구로 격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좋아서 서로를 그렇게 객체화시키는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의 구조에 문제가 분명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본주의의 폐단, 특히 팔 수 없는 것을 팔게 된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등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조탓으로 돌린다면 늦어지게 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여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소리를 높이는 것 처럼 말이다.

 

가끔 나는 경제적으로 일퍼센트를 차지하는 그런 부유한 사람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솔직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내가 조금만 더 부유했다면 책을 주문할 때 굳이 오만원씩 끊어서 마일리지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그렇게 고심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와 같은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조금만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다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텐데, 와 같은 생각들까지도 한다. 그러다가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으면,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니. 수많은 옛날 경전에서 이야기하지 않는가, 재물은 스스로를 얽어맬 뿐이다, 라고.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더 많은 돈을 가지면 더 자유롭게 살 수가 있으리라고 대부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어느 사람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이 돈을 벌고 또 벌게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하지만 그런 계층을 넘어서 돈이 돈을 벌어다 줄 경제적으로 더 상위층을 보면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마치 포도를 올려다보는 여우처럼 늘상 이런 질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파우스트, 에 따르면 그들은 지고의 행복은 맛보고 있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마치 신포도라고 합리화하는 여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파우스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되뇌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 곳에 군림하는 그대들이여, 함께 모여 지내면서도 영원히 외로운 당신들이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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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21 01:57   좋아요 0 | URL
글 제목이 슬퍼요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더 갖기 위해 일을 할 것이고,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늘 할 거예요 많으면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지도... 그러니까 돈은 적당히 있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움켜쥐려는 사람도 있지만 사회에 다시 돌려주는 사람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어야겠군요 우리가 서로를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희선

가연 2013-10-22 12:49   좋아요 0 | URL
저는 붙이면서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봐요? 하하하하하ㅠㅠㅠ 파우스트를 이번에 다시 읽어가면서 이 구절이 너무 맘에 들어서 써야지, 라고 생각을 하고는 이렇게 써버렸네요.

여담이지만 돈이 아주 많으면 누가 돈을 가져가든지 말든지.. 할 것 같네요, 풋.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는 것 같아요

2013-10-21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22 09:06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이 너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져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리뷰에서 '소책자'란 단어가 보이지 뭐에요. 그래서 검색했더니 100쪽이 조금 더 넘는 책이네요. 그렇다면 한 번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져요. 무엇보다 이 얇은책이 가연님에게 이토록 긴 리뷰를, 별 다섯을 불러냈군요.

상위1프로라면, 당연히 마일리지 때문에 5만원씩 끊어서 주문하지 않겠지만, 제가 곰곰 생각해보니, 상위 1프로라면 주문을 직접 할것 같지 않은데요. 비서 3이나 비서 4에게 시켜서 이책과 이 책 사다 서재 내 책상에 올려둬요, 라고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저로서는 실현 불가한 얘기네요.

저는 감당이 안될것 같아서 상위1프로까지는 쳐다보지를 못하겠어요. 만약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면, 아 이 돈이 그냥 다 내 돈인가보다 하겠지만 없었는데 생긴거라면 제가 그 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역시 신포도를 쳐다보는 여우의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연 2013-10-22 12:53   좋아요 0 | URL
네, 분량이 얼마 안되는데 빨리 읽혀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제가 그때 딴생각들을 하고 있어서 그랬었는지도ㅎㅎ 별 다섯개는 좀 많이 고민을 했는데, 네개는 아닌 것 같아서.. ㅋㅋㅋ 제가 또 별 다섯개는 잘 안주는 편이긴 한데ㅎㅎㅎ 네 개는 인플레가 심하지만요, 하하하하하하하하..

오, 다락방님의 말씀이 더 옳아요, 비서 3에게 시킬 듯 하네요ㅠㅠㅠ

맥거핀 2013-10-23 00:30   좋아요 0 | URL
이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는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다만 이 다음이 파국일지, 아니면 더 극심한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요). 파국이 가까이 시작되는 때는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 생각의 비율을 넘어설 때이겠지요. 오늘 다큐 하나를 봤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고보면 파국이 오지 않기를, 그럼으로써 이 세계가 영원히 이렇게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위의 1%의 사람들일텐데, 그들은 도리어 이 파국을 앞당기고 있으니..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연 2013-10-31 08:46   좋아요 0 | URL
요즘에 개도국에서의 다국적기업의 현황, 이랄까, 그런 류의 다큐멘터리 소식을 들은 적 있는데 많은 점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다국적기업이라는 게 자본주의의 진화의 정점에 다다른 그런 생물체 아닌 생물체라고 볼 수 있을것인데.. 예견된 파국은 언젠가 오기는 할 테지만.. 개도국들이 거의 전멸할때쯤 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들의 생명이 희생물로 바쳐져 유예되었다고나 할까..

다만 다국적기업도 다국적기업나름대로 희생자의 목숨을 살려두려고는 하겠죠. 그게 더 효율적일테니.. 바로 이 부분에서 말씀하신 1퍼센트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볼때 파국보다 더 심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3-11-01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