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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폭력의 자유.

 

  글을 읽을 때 여러 가지 당혹스러운 경험을 겪을 때가 많지만, 특히 당혹스러울 때는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와 같은 것 말입니다. 이전에 쓴 그 글은 그저 본인 스스로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글의 객관성을 자신이 어떻게 담보하겠습니까?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거의 자신의 글을 사용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객관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이고, 당연히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글들은 그 글이 내세우는 근거가 객관적이지 않으면 안 되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책 ‘폭력의 자유’의 첫 장을 넘겼을 때 이런 부분에 대한 걱정이 사실 많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보고 들은 사실들을 개인적 시각으로 적었다.’ 라고. 그리고 동시에 이를 ‘자전적 에세이’ 로 여겨달라는 부연을 덧붙이지만 이는 책 자체의 관점을 하나로 한정시켜버리며 이런 모습으로도 여겨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적은 사례는 내가 직접 발로 뛰면서 겪은 사례들이다. (직접 내 눈으로, 발로 확인한 일들이기에 잘못된 일은 없다.)’

 

물론 직접 겪은 사람의 관점이 하나의 사실을 보는데 가장 좋은 관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이는 자신의 관점만을 절대화하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해방 전후부터 살아온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분에게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말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말하는 것들을 모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뇌는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겪은 일이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에 맞춰서 바뀔 수 있고, 바뀌지 않더라도 그 틀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생생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주변의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서 검증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폭력의 자유, 라는 책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종철은 분명 한국 근현대사의 언론의 발전에 있어서 발로 뛰면서 사회 상황에 조금이라도 진보를 가져오려고 노력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발전시켜서 생생한 그림을 그리며 한국 언론사를 조명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생생함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어느 정도는 한국 현대 언론사에 대하여 하나의 관점을 형성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의 관점, 이라는 것은 저자의 관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저자는 보수 기득권 언론과 맞서서 싸워온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관점은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진보쪽이겠지요. 소위 말하는 보수적 스탠스를 가진 언론들, 조선, 중앙, 동아, 의 왜곡과 그에 대항하면서 자라온 한겨레, 경향과 같은 신문들의 발전사, 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관점을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처음부터 보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아무리 조선, 중앙, 동아의 왜곡에 대하여 이야기하더라도 전혀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책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생각을 더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책의 구성을 조금 살펴보면 이 책의 저자가 대략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책을 읽지 않더라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차례에 보면 1부부터 9부까지 되어있는데, 저자가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부분이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그 부분은 바로 3부와 9부인데, 3부는 박정희 시대 언론과 권력,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9부의 제목은 이명박 시대 보수 언론 공기인가, 흉기인가, 인데 이는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 3부와 9부는 쪽수로만 따져도 100쪽이 넘습니다. 다른 부분은 20쪽에서 50쪽 정도인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는 동시에 저자가 가장 한국 언론사에서 문제가 있었던 때라고 여기는 시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 라는 말이 됩니다. 할 말이 없고, 사건이 없는데 뭐 하러 쪽수를 많이 배정하겠습니까? 아니 처음부터 쪽수를 배정하고 쓰지는 않았겠지요. 하고 싶은 말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쪽수가 길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각 부의 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저자가 특히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각 부는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있고, 해방 이후에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언론사를 적어두었는데, 처음에는 각 장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등장하지 않는가 하면, 처음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자주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9부에 속한 장들의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5장 방송 연대파업, 6장 멀고도 험한 방송 민주화, 7장 연합뉴스의 파업, 8장 거대 교회 권력의 싸움, 9장 노조의 투쟁. 얼핏 읽어봐도 싸움, 투쟁, 파업이라는 단어가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투쟁과 파업은 이전 장들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이전 시대들에서 이 책의 저자가 뽑은 단어들은 재갈 물리다, 쫓겨나다, 등의 단어였지요. 여기서 우리는 처음 해방 전후 공간에서는 일제와 미군정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독재 시대에서도 독재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언론사 자체에 대한 반발이 강해졌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론은 그동안 정말 많은 부침을 겪었었지만,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에 많은 위기를 겪었다. 박정희 시대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 라는 구체적 외부의 적이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외부의 적에 가려졌었던 보수적 언론사 권력, 이 진정한 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싸움, 투쟁, 파업과 같은 수단이 쓰인다. 가 되겠지요. 이에 대하여 저자는 직접 책에서 말합니다. ‘그동안 언론과 정치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단순한 유착을 넘어 밀월 관계에 이르렀다’ 고 말입니다. 박정희 시대에서의 언론을 떠올려보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유착을 넘어 밀월에 이르렀다, 라는 부분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착이면 유착이지, 왜 밀월일까요? 이 책에서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독재가 해소된 뒤의 대통령들의 정책들에서 찾습니다. 독재 시대에서부터 유착과 굴종을 통하여 이미 자본과 자산을 축적한 언론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가 싫은 법, 자본을 가진 사람은 그 자본을 굴려서 더욱 더 큰 자본을 이루어냅니다. 이런 스노우볼링Snowballing은 때마침 찾아온 정부,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언론법 개정 등을 통하여 산사태처럼 부풀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소위 말하는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고, 보수에 대한 어떤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언론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모두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은 도출해내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해낼 수 있는 그런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자 본인은 뒤에 루퍼트 머독이라던가, 위키리크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에 덧붙였지만, 그런 사례들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더라도 사실 진정한 해답은 되지 못합니다. 대안언론? 사실 우리나라에는 소위 말하는 대안언론들이 정말 많습니다. 인터넷이 우리나라만큼 발전한 곳도 드물지요. 인터넷의 발달덕분에 수많은 언론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언론 자체의 기능에 순수하게 충족시키는가, 에 대한 물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이런 진보, 보수 틀을 넘어서야만 할까요? 방금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하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극단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중간 쪽으로 데려오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김기협이 쓴 해방일기, 에서 가져오고자 합니다. 해방일기에서 보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으며, 역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싸움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좌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실제로 분단이 일어난 것은 외부의 원인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틀이 거대 보수화된 언론 권력, 그리고 정치 권력과 이에 대응이 되는 진보적 색채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들의 대결 구도로 나타난다면, 이 틀이 우리를 데려다주는 곳은 변증법적인 결론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론 자체의 속성을 분석하여 그 속의 한계를 이끌어낸다면, 그리하여 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담론을 가져온다면 책에서 드러난 진보, 보수 대결구도에서 언론 자체의 속성과 그 외의 것들의 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공통의 적이 생기면 뭉치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언론의 한계라는 말은 사실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발행되기 위해서는 사업체로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업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에 어쩔 수 없이 편입한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느끼는 공간들인 트위터, 페이스북, 이들 모두 사업체입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달고, 이용자들이 많이 찾아줄수록 수익이 되는 시스템입니다. 조정환이 쓴 인지자본주의, 에서는 ‘그런 공장의 컨테이너를 탈취하여 사용한다’ 는 개념이 나왔었지만 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터넷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일방향으로 전파가 되는 신문과 방송에서는 힘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체라면 수입을 내야 되는데, 광고수입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 광고는 기업체들이 싣습니다. 언론으로써는 이를 외면하기가 어렵겠지요. 게다가 사업체라면 혼자 운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한계입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와 편집하는 사람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언론이 대중을 생각한다면 그들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면 인터넷에서 계속 대안언론을 해나가면 그런 한계를 없앨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이는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찻잔 속의 태풍’ 이라는 벽에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정말 큰 이슈가 되더라도 그 이슈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죠, 오히려 반대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인터넷 실제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겁니다. 실제 방송에서도 ‘오늘의 검색어’ 라면서 인터넷 검색어들을 소개하면서 네티즌 의견을 소개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한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방송이나 신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네티즌 의견을 뽑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한계점을 언론은 분명 가지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한계를 없애기에는 사실 현재 언론 구조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이 책, 폭력의 자유, 의 첫머리, 해방 전후의 언론사에서도 드러나듯이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굽힌 사람은 두 번 굽히기 쉽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이미 언론들은 심한 탄압을 받고 그들의 몸을 굽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싹튼 모순들은 지금에 이르러 도저히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파업, 투쟁, 싸움으로는 뿌리를 뽑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저는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을 들고 싶습니다. 기존의 진보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보수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그런 언론들 모두를 옆으로 제쳐두고는 새롭게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보, 보수의 간극은 깊고 넓지만, 서로의 편의 증대, 라는 협동조합의 목적 아래에서는 분명 같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할 것입니다. 사업체라면, 그래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면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현재 언론 중 진보적 색채를 가진 매체인 프레시안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협동조합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특별히 언론의 문제점들이 해소되거나 하기는 어려우리라고 보며, 인터넷 기반과 진보적 색채 자체 또한 언론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대립에서 벗어나 협동조합으로 이뤄진 언론이 한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도 중요하겠지요. 지금 언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전망을 해봅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사실 책의 제목에 대해서 갸웃거렸습니다. 폭력의 자유, 라는 제목은 폭력과 자유, 도 아니며 폭력은 자유, 도 아닙니다. 두 명사가 전혀 맥락에 맞지 않게 위치되어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유를 얻는다, 라는 뜻은 아닐 것 같고, 한국 현대 언론사를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인 폭력, 그리고 자유, 그러나 그 두 개를 합쳐놓으니 저자가 어떤 반어적 효과를 노린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해가 갔습니다. 이는 반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엔 진보적 언론과 보수적 세력의 구도가 전체적으로 드러나지만, 거기에 앞서 언론 자체에 대한 자성이 깔려있습니다. 언론인들이 가지고 있는 펜은 무한히 날카롭습니다. 그 펜으로 누구를 사회적으로 말살할 수 있기도 하며, 어떤 후보를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폭력, 입니다. 그리고 그 폭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자유, 를 언론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언론인들은 자신의 펜을 움직일 때 항상 그 점을 유의해야만 할 것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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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9-24 23:09   좋아요 0 | URL
역시 가연님 글이 좋습니다. 협동조합으로 언론사를 만든다는 건 생각을 못해봤네요. (아..프레시안도 그런 거였군요.) 확실히 언론도 경제구조하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하기는 예전에 누군가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건 돈이 나오는 구멍이다,라고 하더군요.)


가연 2013-09-25 09:40   좋아요 0 | URL
ㅠㅠㅠ 부끄럽습니다. 아직 다른 한 권 읽고 있는 중이라 다른 분들의 글은 구경도 못했네요. 맥거핀님께서는 다 읽으셨나요? 협동 조합은 여러 가능성이 있을 듯 하여 이렇게 언론쪽에도 붙여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써놓고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을 자꾸 받는 중입니다.

희선 2013-09-25 00:35   좋아요 0 | URL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고 언론의 한계를 넘어서, 제목이 좋군요 정말 이렇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쪽에 마음이 치우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도 괜찮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마음을 열어둔다면 좋을 텐데요 이것은 언론만 그런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사람이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해야 하죠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 좋겠군요 어떤 식으로 해나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달라도 말을 나누다 보면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론인들은 정말 펜을 마음껏 휘두르면 안 됩니다 언론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 글을 이용하면 안 돼요


희선

가연 2013-09-25 09:43   좋아요 0 | URL
아하하.. 협동조합의 원리를 보고 나름 머리를 굴려 찾아본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쫌 찜찜하달까, 뭔가 부족하달까. 평가단 다른 한 권이 기만에 관한 책인데, 편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리고 편향된 것을 고치기 정말 어렵다, 라고도 이야기하고... 그래서 더 찜찜한 것 같아요. 마지막 말씀에 일부 동의합니다만 분명 비판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마립간 2013-09-25 08:29   좋아요 0 | URL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위 글은 제게 해당되는 것 같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요. 객관성을 담보하기 보다, 생각의 일관성 및 현재 생각이 있게 된 근거되는 과거 생각의 서술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가연 2013-09-25 09:38   좋아요 0 | URL
음.. 오해를 살 것 같아서 해명을 합니다. 확실히 마립간님께서 여기 서재에서 댓글을 다실때 예전 글들을 같이 읽어보라고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었었지요. 그런데 그런 예전 글들을 마립간님께서 참고 자료라고 생각하시고 쓰셨던 거라면.. 분명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댓글을 읽으면서 받아들였던 것은 참고자료라기 보다는 (사실 이런 블로그 등의 댓글에서 분명한 참고자료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말씀하신대로 생각의 궤적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서두에 저 글을 쓴 것은 첫 문단의 아래쪽에도 보듯, 적어도 책으로, 그리고 부제로 현대언론사, 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면 그런 저자 자신의 시각은 어느 정도는 배제하여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 제가 쓴 글에는 빠져있지만 이 책에서는 저자가 쓴 신문기사도 일부분이지만 실려있지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자 본인이 물론 현대언론사에서 한 역할을 맡았던 분이겠지만, 신문 기사는 사실 그 색채에 따라서 어조가 확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부분은 언급을 하여야겠다고 여겼습니다. 혹시나 저 글이 본인을 겨냥해서 쓰인게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립간 2013-09-25 14:20   좋아요 0 | URL
가연님,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가연님의 글을 타산지석처럼 내게 적용해 볼 것은 없나 생각해 본 것입니다.

가연님이 쓰신 글은 위 책에 대해서 쓰신 것은 맞습니다만, (게다가 제가 책을 읽지 않아, 책의 뉴앙스를 알 수 없지만) 지적하신 바가 일반화가 될 수 있는지, 가연님의 가치판단이 맞는지 생각했는데, 아직 판단 보류입니다. 책(공개?), 부제, 언론이란 분야 등 특정화가 있으면 가치 잣대가 달라지나 해서요.

가연 2013-09-25 21:3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넷상에서는 쉽게 오해가 쌓일 수 있는 법이니.. 조심하는게 옳지요. 언짢게 여기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가치 판단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사실 잘 감이 오지 않지만.. 첫 문단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 근거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입니다. 여기에 가치 잣대가 들어갈 부분이 있는지 좀 의아해집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조금 더 부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혹은 제가 저 명제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마립간 2013-09-26 08:48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마지막 댓글을 읽으니, 저와 가연님과의 생각에 차이가 있었던 부분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 객관적.

제가 어떤 글을 쓸 때, 제 주장을 강력히 표현하지 않더라고 (통계숫자만을 나열하지 않는 한, 통계 숫자를 표현하더라도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의견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에 약간의 주장을 포함하게 되죠. 그리고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근거는 과학적, 객관적, 타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저의 경우는 생각의 궤적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 저의 글을 referece로 제시하지만, 같은 이유로 그리고 자기표절을 피하기 위해 (잘 아시겠지만) 의학논문의 인용에 (특히 연구배경에서) 자신의 연구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많았습니다.

가치판단이란 단어는 제 글과 위 책의 글이 같은 수준의 글로 보아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중복게제 논쟁에서 독후감과 논문은 같은 창작글로 본 가치판단과 상품평과 같은 서평과 논문은 다른 수준으로 봐야 한다는 가치판단과 같은 의미입니다.

위 책의 글이 (그리고 내용이)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라면 글쓴이 스스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자신의 글보다는 다른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지만, 과연 그런 글이었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 책을 읽지 않아서) 판단을 유보한 것입니다.

마립간 2013-09-26 08:49   좋아요 0 | URL
댓글을 쓰다보니, 이런 판단이 내려지네요. 위 책은 (가연님의 판단으로는) 내용상, 형식상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었는데, 그 근거를 자신의 글로 삼아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해 ; 결과적으로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

가연 2013-09-26 20:07   좋아요 0 | URL
네, 마립간님의 두번째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에는 여전히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여기가 마립간님과 저의 의견 차이겠지요.

가치판단은.. 사실 마립간님의 글을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궤적, 으로 여겼기 때문에 여기에 더 관련시키지 않아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하긴 만약에 제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제 글에 연관지어서 생각을 했을 것 같지만.. 본의아니게 무신경하게 넘어가버린 것 같네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