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묵시록의 네 기사를 죽음, 전쟁, 기근, 역병이라고 둔다면, 무신론에도 네 기수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데니얼 대닛이 바로 그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 네 명이 무신론에 관하여 찍은 대담의 이름도 바로 묵시록의 4기사이다.) 이들 넷이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위의 묵시록의 네 기사가 지나간 것처럼 비논리적인 관념은 황폐화되버리고 만다. 유일신과 인격신을 믿는 자들에게 무자비한 영국식 발음으로 악센트를 혀로 굴려가면서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종교를 옹호하는 자라면 그 상대가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라도 상관없이 Absolutely wrong!을 외치며 어떻게든 굴복시키는 죽음의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 당신은 신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어느 신자에게 아니 도대체 없는 것에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는가? 라며 종교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악마의 변호인 (마더 테레사의 시성에 참여하여반대의견을 매우 많이 피력하였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도대체 신이 왜 필요한 것인지, 신앙이라는 것은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아 종교를 모조리 말려버리려 마음을 먹은 기근의 마법사 샘 해리스, 인지과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적설계에 대하여 강인한 공격을 퍼붓고 마치 역병처럼 무신론을 전파해나가는 무신론계의 신성 데니얼 대닛.
바로 위에서 볼 수 있는 동영상은 그런 네 기수 중 수좌인 리처드 도킨스에게 (왜 리처드 도킨스를 수좌로 놓았는가? 그것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다.) 날아온 한 묶음의 증오의 편지Hate mail다. 사실 컴퓨터로 날아왔으니 한 묶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떤 내용인지는 지금쯤 다 들어보았으리라. 굳이 간략하게 기억에 남는 한 구절만 끄적여보자면, GO BURNING HELL. 그야말로 뭐라 할 말이 없는 구절들이다. 도킨스가 종교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많은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관념을 조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그렇기에 글에도 반드시 내가 더 가치를 두고 있는 부분이 담길 것이리라. 나는 굳이 어떤 카테고리로 분리하자면 이신론Deism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의 속성을 정의하자면, 나는 세 가지를 들 것이다. 전지, 전능, 편재. 신은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하며, 어디에든 존재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존재가 있을까? 나는 솔직히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굳이 저런 세 가지 속성을 가지는 것이 있다면 법칙 - 인간이 지금까지 밝혀낸 불완전한 법칙들이 아닌 - 그 모든 법칙들의 원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모사된 불완전한 환영들과의 관계와 같아서 우리는 끝없이 그런 법칙에 다가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법칙은 마치 기계와 같다고 본다. 특히나 그 존재가 인격을 가진다거나, 사람의 외모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부정적이다.
그러니깐,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칼 세이건의 이 말을 들 수 있겠다.'만약에 신이라는 말이 어떤 우주적 법칙을 의미한다면 분명 존재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뒤의 말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중력의 법칙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런 신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 무신론자들인 위의 네 명, 특히 리처드 도킨스, 에 대하여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너무 강한 주장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법칙을 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물리학적인 지식을 통하여 그 신이 '실재' 한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다. 물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절대 인격을 가진 신은 아니다. 가끔은 이런 상상을 해본다. 뭐,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지만, 정말 초 희박한 확률을 뚫고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눈 앞에 나타나, 나 사실 신이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리처드 도킨스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예상되는 반응 1. 그런 신은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과연 초월적 신이 자신을 반대했다고 앞에 나타나는 그런 찌질한 짓을 할까? 반응 2. 신이라고 불릴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게 신의 기본 요건이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응 3. 신이라는 존재라 주장한다면 검증을 거쳐야 한다. 등등등)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무신론 설파 커리어를 그의 초기작인 이기적 유전자 서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서문을 보면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다. '침팬지와 인간은 그들의 진화 역사 중 대략 99.5%를 공유하지만 대부분의 사상가들을 자신을 전지전능자로 가는 디딤돌로 여기는 반면, 침팬지는 엉성한 짐승으로 여긴다' 고 말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비교를 늘어놓은 문장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후 리처드 도킨스의 행적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저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 인간은 결코 침팬지와 다를 바 없다. 신이 과연 인간을 침팬지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을까? '설령 화석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수많은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적인 증거가 우리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존재라는 것을 뒷받침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사람들은 이 책을 보고 유전자라는 것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야, 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지만, 그것은 유전자라는 것을 인간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생기는 오류다. 인간은 유전자가 아니다. 이 말을 바탕으로 비유를 들자면, 유전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유전자에게는 이런 지능이 존재할 리가 없겠지만) 아, 내가 죽어도 나와 비슷한, 혹은 동일한 유전자들이 더 많이 번성한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러니 지금 내가 희생을 하여야 겠다. 이 이기적 유전자, 에 대한 몇 몇 반박론들이 동물의 이타적 행위를 기록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은 참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실제로 유전자는 마치 이타적인 것 처럼 행동을 하기 때문이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동물은 유전자와 동치관계에 놓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무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제목은 이타적 유전자, 가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인가? 쉽게 말하여 유전자 A의 입장에서는 이타적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유전자들을 A, B 등등 세밀히 구분할 수 없다. 모두 같은 유전자인 것이다. (A, B 이런 식으로 유전자를 나누는 것 자체가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일종의 인간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 전체로 볼때,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여 자신이 번성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 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공전절후의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리처드 도킨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무신론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왼쪽의 만들어진 신은 원제가 the God delusion인데, the God delusion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 신 = 망상. 왼쪽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와 함께 무신론자들의 필독서가 되버린 이 책은 그렇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쨌든 신이란 세상에 거의 없는 것 같다. 거의 없다니? '거의'가 의미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는 증거가 말을 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아직까지는 신의 부재를 완전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증거는 없다. 도킨스가 이 책에서 공격하는 것은 신에 대한 논증들은 모두 논파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증거가 꼭 필요한 과학을 해온 도킨스로는 신에 대한 논증들이야말로 이상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증거가 없으면 없을 수록 더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방향을 조금 틀자면 무신론자들의 생각으로는 종교는 미신에 가깝다고 본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한 실험을 가져올 수 있겠다. 스티븐 핑커(로 기억한다)가 진행한 한 실험에서 이 연구진들은 상자 안에 비둘기 한 마리를 가둬두고 먹이를 주는 실험을 했다. 먹이를 줄 때 그 비둘기는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이를 조절하여서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일 경우에 먹이를 주도록 하였다. 단순화하여 비둘기가 위로 움직일때마다 먹이를 주었다고 하자, 이렇게 실험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비둘기는 이렇게 믿게 된다. '아, 내가 위로 움직이면 먹이가 생기는구나' 그래서 비둘기는 그 이후 배가 고플때마다 위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음식을 주고 안주고는 실험자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종교도 마찬가지라서 우리가 일정한 형식의 의식을 올린 뒤에 복이 떨어진다고 믿지만 (기복신앙의 경우) 실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고, 미신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신론이 위의 실험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실제 현실에서는 저 실험에서 실험자 역할을 맡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실험자가 존재하더라도 그 실험자는 우리를 신경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리처드 도킨스도 마찬가지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처음부터 바넘 효과Barnum effect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점성술에 관련된 쪽지를 나누어주고, 당신과 이 말이 얼마나 맞는지를 조사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웃긴 것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내용은 사수자리의 성격에 관한 것이며, 모두 동일한 자료였었다는 점이다. 그 동일한 자료를 보고 각기 다른 별자리를 가진 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을 한다. '와우, 이거 제 성격이랑 똑같은데요?'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바넘 효과라고 부른다. 종교 = 미신, 이라고 규정을 하는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종교적 의식은 바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기적이 행해졌다고 알려진 곳에 가면 몸이 치료가 되는가? 도킨스는 이야기한다. 그럴 리가 있겠냐?
다만 말해둘 것은 이 책에서는 불교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점이다. 불교를 두고 도킨스는 일종의 철학 체계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이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다. 불교는 분명 종교라기보다는 철학 체계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더 우월하다고는 볼 수 없다. 도킨스의 비판을 불교가 벗어난 것은 단지 일신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불교서 굳이 신이라 들 수 있는 존재는 비로자나불이리라. 진리 그 자체를 형상화한 부처말이다. 하지만 이 비로자나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불교 자체도 사실 숭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는 사실 종교로서는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포교가 되지 않는다 - 숭배보다는 스스로의 불성을 깨닫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라는 점에서는 이 불교 또한 종교의 해악을 비켜나가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저서인 신은 위대하지 않다, 에서는 몇 장을 할애하여 불교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특히 일본 불교를 가져와서 불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제 2차세계대전때 불교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선에 투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점에서 불교는 분명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런 맥락의 비판은 우리나라에서의 성철 스님의 일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고승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고승으로서 성철 스님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크리스토퍼 히친스같은 이가 냉철하게 본다면 현실 도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히친스는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귀국했을때 동행한 지식인 중 한 명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불교 비판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히친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불교를 마치 허무주의의 종교, 인 것 처럼 해석을 가하며 사례를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결코 생이 허무하니 기꺼이 버려라, 라고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일본 불교를 가져온 것도 문제가 있는데 일본의 불교를 과연 얼마만큼 불교라 볼 수 있는가, 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은 일종의 만신전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힌두교에 받아들여진 석가모니를 불교의 석가모니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제노사이드, 의 작가인 다카노 가즈아키는 자신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30&contents_id=10889) 일본인들은 태어나면 신사에서 절을 하고, 결혼할 때는 교회에서 하고, 죽을 때는 절에 간다, 고 말이다.
이런 불교에 대한 비판은 우리에게 종교와 이성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다시 성철 스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승으로서의 성철 스님은 과연 깨달은 자, 일까?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가 침묵을 지킨 것이 일종의 견성의 일환이었다면? 우리가 불교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하여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기에 종교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비판한 사람들 중에는 마더 테레사 - 그렇다, 테레사 수녀다 - 가 있는데, 그는 테레사에 대하여 여러가지 가열찬 비판을 하고, 마무리로 그녀의 편지를 꺼낸다. 그녀의 편지는 다 줄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유튜브에서 히친스의 토론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4n05IxYaFS0 ) '나는 더이상 그(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을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도 결국엔 무신론으로 돌아섰구나', 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해석을 우리는 옳다고 볼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분명 히친스가 옳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종교에 어느 순간 회의를 가질 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런 회의감 속에서 글을 썼다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지 않을까? 동시에 이런 부정을 통하여 더 종교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옛날 나가르주나가 불교의 논리를 정립하면서 부정의 부정을 가져온 것 처럼 말이다. '정말로 깊은 진리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찾아온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전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히친스의 비판은 피상적인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어디까지 중요시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이 세상에 4만명의 오빠가 있고, 그 오빠의 사랑을 모두 합치더라도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오필리어가 죽고 레어티스가 오필리어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뿌리자 햄릿이 나서며 하는 이야기이다. 신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인데, 신을 오빠, 그러니까 레어티스라고 두고, 인간을 햄릿, 또 다른 인간을 오필리어라고 두면 왜 갑자기 저런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 4만명의 신이 있고, 그 신의 사랑을 모두 합치더라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히친스와 도킨스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무신론을 고집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덕을 지키는 것에는 굳이 신이나 종교와 같은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도 여기에 공감한다.)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신이란 존재를 떠올린다면, 그 이상적 존재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한없는 사랑을 베풀 것이다. 그렇기에 충분히 정서적 만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과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과 같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진리가 어떻게 진리라 부를 수 있겠는가? 히친스의 저런 해석의 배경에는 이런 부분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이기 때문에 도킨스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은 정녕 어느 하나가 사라져야만 하는 관계에 놓여있을까?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을까? 스티븐 제이 굴드의 NOMA라는 개념을 가져오면 두 축은 서로 양립할 수가 있다. NOMA는 Non Overlapping MAgisteria의 약자로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 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magisterium의 사전적 의미는 교학권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설명은 모두 치우고, 이 개념은 종교와 과학은 둘 다 중요하며 서로 겹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얼핏 보면 매우 합리적인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들의 지적설계론은 이 개념으로는 대응하기가 어렵다.
지적설계론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지적설계자가 설계를 하였다, 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그러니까 창조론에서 신이 창조했다는 구절을 지적설계자가 창조했다, 라고 바꾼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까지만이라면 차라리 상관없지만 각종 과학적 영역을 지적설계론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그 대표적 논거다. (물론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진 생물은 하나도 발견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지적설계론은 저 명제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지적설계자라면 외계인? 외계인이 창조하였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본질적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설계자는 누가 만들어내었나? 얼핏 보아도 헛점이 보이겠지만, 만약에 이를 종교라 주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선 NOMA개념으로는 과학과 종교는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적설계론은 아무리 보아도 과학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이론이다. 과학적 영역을 침식하려고 드니 말이다. 하지만 지적설계론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종교로 끝까지 주장한다면? 과학자들로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NOMA개념은 정확하지가 못하다.
그런데 진실로 세상을 모조리 규명가능한 법칙이 있는가? 과연 과학이라는 툴Tool로 우리는 세상을 모조리 규명할 수 있을까? 먼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그런 법칙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노력을 하여야 한다, 즉, 과학의 진보를 믿는다, 가 나의 관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막연히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가 정말 의문인데, 과학의 객관성은 우리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에 1970년대의 일단의 학자들은 과학 지식 또한 사회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다음 두 가지 테제를 내세운다. 첫 번째, 관찰의 데이터들에 의하여 과학 이론은 과소결정된다. 두 번째, 관찰은 이론에 의존한다. 이 두 가지 테제는 비록 과학 외부에서 제기된 테제이지만 어느 정도는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저 테제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하자. 과학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칼 포퍼의 이야기에 따르면, 과학과 유사과학은 반증가능성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 포퍼의 이야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이는 듀엠 콰인 테제 - 과학적 가설을 고립적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는 - 로 반박이 가능하다. (물론 물리학에 한하여 듀엠은 약간 입장이 다르지만) 듀엠 콰인 테제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과학적인 가설 설정 방법은 가설-연역법이다. 즉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따른다.
1. 가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하다
2. 이러이러하다
3. 가설은 옳다.
그런데 1번, 가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하다, 는 이 명제 자체에 이미 몇 가지 가정을 품고 있다. 애초에 가설을 설정한 것 자체가 추측이라고 할 수 있고, 옳다면, 이라는 말 또한 추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설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기존 과학 지식에 의거할 것이다. 여기서 확실해진다. 우리는 고립적으로 과학적 가설의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으며, 그러한 가설을 토대로 세워진 과학적 지식 또한 고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그렇다면 새로운 과학 지식이란 기존 과학 지식의 재반복Rephrase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과학적 인식은 중세의 인식과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중세의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그건 왜 그런 것일까?
이 비밀 또한 가설-연역법에 숨어있다. 위의 논리 구조는 논리학적으로 따졌을 때 전형적인 후건긍정의 오류에 해당한다. 후건 긍정의 오류는 예시로 든 논리 구조에서 설령 1번과 2번이 옳다고 하더라도 3번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저 가설-연역구조를 (논리학적으로 따지면) 폐기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이런 경우 귀납법으로 해석하여 얼마만큼 논증이 강한가, 약한가를 따져서, 최대한 강한 쪽으로 우리의 지식을 굳힌다. (귀납 추론의 경우 타당하다, 라는 말 대신 강하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또한 설명할 것이다.) 예시를 들어보자.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검증할 때 이런 논리구조틀이 사용되었다.
1.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옳다면 개기일식시 태양 주변의 빛들이 휠 것이다.
2. 개기일식시 태양 주변의 빛들이 휘었다.
3.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옳다.
지금이야 저런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이 매우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 조금만 들어올리기만 하여도 검증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정도로 기술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자, 어쨌든 위의 논리구조는 사실상 오류다. 전형적인 후건 긍정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귀납법으로 파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귀납 추론의 옳고 그름은 강하다, 약하다, 라는 용어를 쓰는데, 범주화의 옳음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서 파악이 된다. 추론의 참 거짓을 따지기 위하여 다른 정보를 가져온다는 이야기이다. 예시를 들면 1번인 모든 병아리는 노란색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걸 참으로 두고 (지금 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 명제 자체의 참 거짓이 아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는 명제인 2번 모든 병아리는 분홍색이다 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1번 명제가 2번 명제에 대하여 더 옳다고 알 수가 있다. 왜 그런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게 된다. (시간 t에 따른 과거와 미래의 성공적 투사가 노란색이라는 개념에서는 분홍에 비하여 더 많이 일어났기에 더 잘 고착entrenched되었다, 따라서 더 강한 명제다, 굳이 유식한 말로 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포퍼라면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위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리구조도 마찬가지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다른 경쟁 이론에 비하여 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옳다, 귀납적으로는 강하다, 라고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귀납적으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귀납적으로만 획득할 수 있는가? 연역적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가? 당연히 연역적으로도 획득할 수 있다. 어떻게? 다시 저 논리구조를 가져와보자, 이번엔 조금 바꿔서 말이다.
1. 가설이 옳으면 이러이러하다
2. 이러이러하지 않다
3. 가설은 옳지 않다.
이는 논리학적으로 후건부정식이다. 타당하다는 이야기이다. (보통 전건부정과 후건긍정에서 오류가 많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설이 옳지가 않다는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한 번의 반증만으로 바로 가설을 폐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이런 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쌓아나갈수 있다.
이제 다시 위의 두 테제인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과 관찰의 이론의존성으로 넘어가자.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은 이런 의미이다. (원래 과소결정과 과잉결정은 알튀세르의 용어로 알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어떤 과학 이론이 있는데, 그 이론에 의하면 어떤 실험 결과는 반드시 어쩌고 라고 나와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어쩌고 라고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 과학자들은 그 이론의 하위에 있는 가설들을 잘 조절하여서 이론전체를 짜맞춘다, 라는 이야기라고 (다소 과장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험이 이론과 다르더라도 이론 전체를 부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이론의 일부가 잘못되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내가 말한 후건부정식에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가설이 옳지 않은 게 아니라, 그 가설을 뒷받침 하는 다른 보조 가설들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 라고. 관찰의 이론의존성은 비유하기가 훨씬 쉽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라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물론 이것도 좀 과장된 설명이겠다) 이미 어떤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이론 내부에 담겨져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를 통하여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도 주장을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입장에서 볼때 저 두 테제는 시사하는 바는 있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첫 번째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론을 펼 수 있다. 물론 몇 번은 보조 가설을 조절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오류를 지우지 못한다면 저 후건부정식처럼 가설을 폐기할 것이다. 왜 과학자들이 가설을 폐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관찰의 이론의존성에는 이는 선후관계를 잘못파악한 주장이라는 반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관찰이 있기 때문에 가설을 설정하고 이론을 세운다.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관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론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검증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관찰이 힘들다. 그렇다면 더더욱 보고 싶은 것들만 보려고 관찰하지는 않겠나? 이는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관찰하다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몇 번이고 보았다면, 이론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가설을 폐기할 것이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을 결국에는 발견하였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또 한 번 보라고 권할 것이다. 정말 내가 발견한 이 것이 나의 이론에 실제로 합치를 하는 것인지. (CERN의 뉴트리노의 속도에 대하여 수많은 다른 연구소들에게 검증을 권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과학지식의 객관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과학지식은 적어도 종교의 탈을 쓴 이론을 부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객관적이다. 세상을 규명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믿음이다. 그 믿음을 부정할만한 근거가 충분하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일단 객관성은 어찌어찌 확보할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종교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이가 나타난다. 종교적 지식은 저런 가설-연역법을 통과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뿐이다. 그리고 증거가 없으면 없을 수록 더 신성해진다. 바로 이 점을 리처드 도킨스를 위시한 무신론자그룹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 도킨스의 기독교 비판은 차라리 이 책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새롭게 복간된 (오른쪽 표지) 이 책은 그야말로 기독교에 대한 광범위 공격을 퍼붓는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경의 내용과 디오니소스, 오시리스 신화의 내용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 기독교에서 주된 상징으로 삼는 물고기는 사실 두 원을 그려서 생기는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수비학적인 기원을 가진다. 여러 가지 고대 종교의 비의에 기독교는 빚지고 있다. 등을 주된 주장으로 삼고 있다. 결국 이 책에 따르면 기독교는 잘 만들어진 신화다. 사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의 기원 자체는, 이만큼 과격하지는 않더라도 종교학자라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다. 당장 유명한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인 축의 시대를 보아도, 기독교의 기원에 대하여 민족 종교였었다, 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민족 종교였다면 주위의 다른 신화를 융합하는데 도대체 무슨 거리낌이 있었겠는가?
이런 책들에 대한 반론은 왼쪽의 도킨스의 망상, 그리고 옆의 신을 위한 변론, 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나는 도킨스의 망상, 은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오른쪽의 신을 위한 변론을 지은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 신의 역사,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종교학자인데 무신론자인지 유신론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어느 곳에서는 유신론자라고 말하고 어느 곳에서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내가 볼때에는 무신론자였지만 유신론으로 넘어가는 그런 중간적 위치에 입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바로 이 '신을 위한 변론' 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 은유를 강조한다. 신이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신을 느끼고 싶다. 그러다보니 종교적 의례를 행하게 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게 된다, 라는 것이다. 여하튼 신은 이해할 수 없지만 신을 알아가려는 그 과정속에서 충만함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게 바로 신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아포파시스, 부정의적 신학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에게 꿇어엎드려야만 한다. 신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저 은유적 방식으로 그 편린을 살짝 드러낼 뿐이다. 대략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도킨스의 주장은 그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신화를 깔아뭉개는 것에 다름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주제만 더 이야기를 하겠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정도로 이어지는가? 과학의 세계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엄격히 분리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아무리 마음속으로 번개여 라고 염원하더라도 결코 현실에서는 번개가 치지 않는다. 우연히 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을 이런 명제에 대한 반례로 들지 말기를 바란다. 양자역학을 의식과 연관지으려는 시도는 많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성공적인 예는 아직은 없다. 양자역학에서는 그저 관찰자, 가 중요할 뿐이다. 내가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겼다, 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정신과 육체가 이어져있다면? 그리고 내 정신이 마치 촉수처럼 세계 어디에서든 뻗어있다면? 예전의 어느 TED강연에서는 육체에 의식이 머무는 곳, 이라는 주제로 대략 연수부위에 의식이 존재할 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대중들에게 알려질정도로 눈에 들어올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듯 하다. 또한 초상과학에 대한 연구도 은근히 진행중이지만 여전히 유의한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도 이 정신과 육체의 관계의 닮은꼴일지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과학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정신이 없다고 한다면 좀 쓸쓸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종교가 완전히 와르르 무너져버린다면 좀 쓸쓸할 것 같다, 풋.
이제 이 길고 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루쉰은 자신의 단편소설인 '고향' 을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원래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땅은 본디 길이 없지만,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길이 생겼고, 희망도 필시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데, 종교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신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신이 등장한 것이다. 나는 그 믿음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길이 어느 순간 잘못된 방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끈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길에서 돌아설 것이다.
p.s.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를 하자면, 나는 굳이 따지면 이신론적인 관념과 불가지론적인 관념의 중간을 걷는 중이다.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불교의 비로자나불과 같은 존재를 신이라고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는 인간의 일에 절대로 개입할 수도, 개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생겨난 것은 그야말로 그냥 생겨난 것이다. 존재에 별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꼭 있어야 우리 인간이 신성해지고 멋있어지는가? 그 수많은 확률을 뚫고 세상에 출현한 우리들 자체를 기적이라고 보는게 훨씬 옳은 일이 아닐까? 이런 관념이 내가 가진 관념이다. (동시에 불교에서 비로자나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밀교에서의 대일여래 - 비로자나불과 동일한 격으로 여겨지는 - 는 숭배의 대상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등등 수많은 종교들 - 천지의 창조를 설명하고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하는 - 을 일거에 부정해버릴 생각은 없다. 이 글 전체가 무신론에 치우쳐져 있다고 하여 내가 무신론을 완전히 옹호한다고 여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를 두고 유신론의 공세에 겁을 먹었나,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겁을 먹을 때도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유신론의 공세에 겁을 먹은 것은 둘째치고라도, 나 또한 이신론이라는 막연히 그러리라는 '증거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무신론자라면 이런 비판에 자유롭겠지만 나는 그만큼 자유롭지는 않다. 물론 나는 내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주저없이 내 입장을 포기할 것이다.)
이런 나의 타협(?)도 여전히 유신론자들에게는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지론이 종교에 대한 호의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되어지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예 (감옥에 갇혔을때 간수가 버트런드 러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종교가 무엇인가요? 러셀은 이렇게 대답한다. 난 불가지론자요 I'm agnonostics. 그리고 간수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 모두는 어쨌든 같은 신을 섬기고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 간수는 오해를 한 것이다. 나는 영지주의자요I'm a gnostics)를 보면 불가지론은 사실 유신론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신이 무조건 존재한다, 라고 보는 유신론자들에게는 신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없을 수도 있다, 라는 말들은 기분이 썩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신에 대하여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존재할 수도 있는데, 설령 그렇다고 하여도 그 신은 기독교의 신은, 더 나아가 어느 종교의 신도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기만은 타협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너의 신은 자꾸 기계장치의 신, 이라고 하는데 법칙과 과학의 신인가? 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질문이 잘못되었다. 법칙이나 과학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학과 과학으로 생겨난 세계에 무슨 정서적 만족이 필요하겠는가? 그야말로 도덕경에서 이르듯 천지불인天地不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