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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평점 :
뿌리깊은 글쓰기.
웹툰으로 최근 연재되는 만화 중에, N포탈의 돌아온 럭키짱, 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럭키짱이 어떤 만화라고 묻는다면, 쉽게 말하면 학원물이지요. 극화체로 학원의 폭력을 다룬 그런 만화였습니다. 작가 김성모는 이 럭키짱 이후에 여러 작품들을 내놓았고, 수많은 패러디들을 양산했으며, 인터넷을 하던 폐인들은 그에게 경외심을 담아 김화백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최근에 스포츠신문에서 4인조라는 만화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게 된 작품이 돌아온 럭키짱입니다. 여기까지는 김화백의 팬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조금 객관적으로 만화를 살펴보면, 머리를 비우고 보기에는 괜찮은 만화입니다. 보면서 실소와 폭소를 자주 머금게 되지만 딱히 무슨 심오한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닙니다. 학교 폭력물이라서 학생들에게 유해하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면 그보다 훨씬 유해한 매체를 많이 찾을 수 있으며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의 폭력장면이 김화백의 만화보다 더 유해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김화백의 작품은 현실과 제법 많이 동떨어진, 그러니깐 70, 80년대의 공고나 상고에서나 일어날 법한 내용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들도 김화백의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서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라며 잠긴 교실문을 열지는 않을 것이고, 중학생들도 ‘아, 만연한 인터넷 냄새’ 라고 말하면서 학교의 싸움 잘하는 아이들, 소위 말하는 학교짱을 탐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초등학생들도 ‘슈슈슉’ 하면서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고 말이겠지요. 이미 우리들은 인터넷의 생활화로 인하여 초등학생조차도 현실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저 웃을 뿐 따라하려고 마음먹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돌아온 럭키짱, 그리고 이외에 다른 웹툰들 모두 좀 유해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웹툰이라는 단어부터 고쳐야 할까요, 웹툰뿐만이 아니라 만화책들도, 소설책들도 모두 우리나라 말을 아끼지 않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영어를 섞어쓰고 우리나라 말을 우그러뜨리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다 못해 쓴 책이 바로 이 ‘뿌리 깊은 글쓰기’ 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 저자가 읽었을 책들에서 108가지의 잘못된 우리나라 말 사용례를 뽑아서 손수 다듬고 있습니다. 저자의 우리나라 말에 대한 애정은 저자의 글쓰기에서부터 깊이 배어있습니다. 저자의 문체는 꼭 시를 읽는 것 같으며, 매 꼭지는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주장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의 전체적인, 큰 의도는 한 문장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책 앞의 일러두기에서 쓰인 것과 책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는 우리 말을 쓰자’ 가 바로 의도겠지요. 더 나아간다면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하자,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면 힘들여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플래카드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공익사업을 벌이는 것이 훨씬 좋겠지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책을 통하여 그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당위성, 그러니깐 근거가 되겠지요. 이 근거라는 말이 매우 딱딱합니다만 간단한 예를 들면 일전의 ‘따뜻한 경쟁’ 의 경우 그 주제는 ‘따뜻한 경쟁을 하자’ 가 될 것이고, 책 내용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따뜻한 경쟁은 어떤 것이며 그 경쟁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진 나라는 있는가, 따뜻한 경쟁을 하면 정말 현실의 문제가 사라질까, 정도가 되겠습니다. 물론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요. 소설의 묘미는 끝까지 읽지 않는 한 예측불능에 있다고 반론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한 번도 읽지 않은, 그래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책은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 ‘뿌리 깊은 글쓰기’는 소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책의 부제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를 보면서 저자의 주장이 책 내부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어떻게 그 근거를 획득하는가를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저자의 주장이 옳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도록 노력을 기울이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책은 감성에 기댈 뿐,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사실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자’ 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도 ‘우리 말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책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것이라면 적절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고쳐야 할 예시로 든 책들을 보면서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떤 책은 시집이었고 어떤 책은 소설책이었으며, 1/3 정도는 외국 책을 번역한 책이었고, 일부는 엮은 책이었으며, 일부는 수필이었습니다. 몇 몇은 만화책(요츠바랑! 이 두 번 정도 나왔더군요) 이었지요. 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하면, 먼저 시집에 수록된 시의 경우에는 과연 책에서 말하듯 ‘그린 농법’을 ‘푸른 농법’, ‘풀빛 농법’ 으로 고쳐야 할까요? 시에서 의도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 시적 허용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시에다가 당장 (내린 처방은 푸른 농법), 이라고 적어두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뀝니다. 풀빛 농법이라고 바꾸어도 마찬가지이지요. 시를 여기다가 옮기지는 않겠습니다만, 발췌된 시는 류기봉씨의 포도 눈물, 에 실린 시입니다. 잔잔한 시의 분위기를 ‘그린’ 이라는 외래어가 현대적인 분위기 쪽으로 붙잡고 있었는데 (국어교과서 참고서에 나올만한 이야기로 하자면 목가적인 분위기를 포스트모더니즘하게 바꾸고 있다고 말하면 될려나요) 푸른 또는 풀빛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그저 평화롭게, 잔잔하게만 흘러가게 만듭니다. 과연 시인이 푸른 혹은 풀빛과 같은 단어를 생각을 못해서 그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저는 그 점에 대해서 좀 회의적입니다. 물론 시의 해석은 누구나 다를 수 있습니다. 푸른 농법이 훨씬 좋은 시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있는 그대로 돌아보고 느끼는 그대로 글로 옮’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시인이 농사를 하면서(류기봉 시인은 농사를 짓는다지요) 느낀 시어가 ‘그린 농법’ 이라면 그것을 존중하는게 옳다고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이야기할 부분은 만화책을 발췌한 부분입니다.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넘어가려다가 제목이 눈에 밟혀서 다시 보니 ‘요츠바랑!’ 이었습니다. 뭐, 개인적으로 만화를 자주 보는 편이라 요츠바랑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저처럼 나이먹고서도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보통 이런 요츠바랑과 같은 만화는 학생들이 자주 보는 만화로 여겨집니다. 앞서 돌아온 럭키짱, 이야기로 이 글의 서두를 시작했지요. 만화에 우리말로 고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사실 끝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웹툰이나 만화에서는 우리말이 그리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무분별하게 쓰는 웹툰들도 있습니다만, 어떤 경우에는 그리 존중받지 못하는 단어가 그 만화나 웹툰이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요츠바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만화책을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순 우리말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과연 만화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있을까요? 이국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만화책이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만화책을 읽는 독자층이 거의 학생층이라고 본다면 재미가 없는 만화책을 누가 과연 사서 볼지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이국적이라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쓰며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도 티셔츠에 ‘한글’ 이라고 써진 글자를 입는 사람들이 있고, 인도에도 가슴에 ‘愛’ 라고 쓰고 춤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이쯤 줄이고,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이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받아들일 까닭이 없는 자리라면 우리나라말을 쓰라고. 확실히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굳이 ‘주전부리’라고 써야 할 자리에 ‘디저트’를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나 이런 만화책에서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꾸어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연스레 읽는 재미를 위해서는 디저트로 놓아두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이국적이라고 느낀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영어를 써서 멋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말로 된 만화책이 나오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만화책같이 학생들에게 파급력이 큰 매체에서부터 이렇게 외국어를 쓰니 큰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저자는 일부러 만화책에서 발췌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린 만화책이라면 모를까 외국에서 들여온 만화책을 번역한 것이라면 점차 원본과 멀어지는 상황은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외국의 만화책을 읽을 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번역된 책은 이상하게 심심하네,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책이라서 그렇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들여오지를 말아야 하는 게 옳은 일이겠네요.
위의 만화책들을 발췌한 것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은 번역한 책을 발췌하였다는 것에 그대로 쓰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가들이 작업물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써서 우리말로 순화시켜서 번역하는 경우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도리어 순화시킨 경우가 점차 원래 의미하는 바와 멀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레스토랑을 모두 밥집으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일일이 각 문맥에 맞는 단어를 찾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에는 영어를 그대로 쓰면 된다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하지만, 그 경계는 어떻게 보면 매우 애매모호합니다. 시처럼 쓰인 문장도 좋지만, 저자는 그런 기준에 대해서 좀 더 책에서 밝히는 것이 좋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발췌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번에는 책의 문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문장을 구사합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물정”이란 ~ 겹말인 셈입니다.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만 적어야 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가만히 읽다보면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어를 다 빼고 구조만 보면 ‘그대로 두어도 되나, ~라고만 적어야 한다’ 니. 무슨 말인지 사실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제가 문장의 비문을 가릴 만큼 국어 연구를 깊이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듯 합니다. 저 문장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은 물정이 겹말이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 고쳐야 한다 고 적는다면 낫겠지요.
사실 이렇게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댄다면 다른 책들도 이런 문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당장 지금 이 글만 하더라도 꼼꼼히 살펴보면 문법에 어긋나거나 이상한 문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탈자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책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듯이 그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 책들의 주제에 관한 것이 핵심이지, 문법이나 오탈자는 그런 책들에게서는 어쩌면 조금은 지엽적일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말을 쓰는 것이 그런 류의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플라톤의 철학을 다룬 책에서 이데아에 대한 글을 쓰지 않고 오탈자를 찾아서 글을 쓴다면 그야말로 보석을 동물한테 주는 격이지요. 하지만 이 책의 주된 핵심은 ‘우리나라의 말’ 입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대한 주장을 하는데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이 영어를 순화시킬 수 있는 단어이지 문장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지적할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든 지적하거나 비평하기는 쉽지만, 직접 쓸때는 그만큼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 또한 막연히 우리말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을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쓰게 될 것인가, 등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어를, 비단 영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래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 대화에서 사용하는지 이 책은 자신의 언어 생활 습관을 돌이켜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새로운 단어를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발췌한 책 중에서 저자가 제안한 단어를 쓰면 훨씬 더 바람직하게 문장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세이를 삶글로 바꾸는 것이라던가, 스크랩을 갈무리로 바꾸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의 예가 되겠네요. 마찬가지로 밤은 날밤으로 두는 게 좋지, 생률과 같은 정체불명의 어려운 말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가 제시한 108가지 이야기에 모두 동의는 못하지만, 저자의 말이 옳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우리나라사람이 우리나라말을 아끼며 즐겨 쓰는 것은 옳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야 할 길이 매우 멉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그 대장정의 첫 발자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