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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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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글쓰기.

 

 

 

  웹툰으로 최근 연재되는 만화 중에, N포탈의 돌아온 럭키짱, 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럭키짱이 어떤 만화라고 묻는다면, 쉽게 말하면 학원물이지요. 극화체로 학원의 폭력을 다룬 그런 만화였습니다. 작가 김성모는 이 럭키짱 이후에 여러 작품들을 내놓았고, 수많은 패러디들을 양산했으며, 인터넷을 하던 폐인들은 그에게 경외심을 담아 김화백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최근에 스포츠신문에서 4인조라는 만화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게 된 작품이 돌아온 럭키짱입니다. 여기까지는 김화백의 팬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조금 객관적으로 만화를 살펴보면, 머리를 비우고 보기에는 괜찮은 만화입니다. 보면서 실소와 폭소를 자주 머금게 되지만 딱히 무슨 심오한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닙니다. 학교 폭력물이라서 학생들에게 유해하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면 그보다 훨씬 유해한 매체를 많이 찾을 수 있으며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의 폭력장면이 김화백의 만화보다 더 유해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김화백의 작품은 현실과 제법 많이 동떨어진, 그러니깐 70, 80년대의 공고나 상고에서나 일어날 법한 내용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들도 김화백의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서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라며 잠긴 교실문을 열지는 않을 것이고, 중학생들도 ‘아, 만연한 인터넷 냄새’ 라고 말하면서 학교의 싸움 잘하는 아이들, 소위 말하는 학교짱을 탐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초등학생들도 ‘슈슈슉’ 하면서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고 말이겠지요. 이미 우리들은 인터넷의 생활화로 인하여 초등학생조차도 현실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저 웃을 뿐 따라하려고 마음먹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돌아온 럭키짱, 그리고 이외에 다른 웹툰들 모두 좀 유해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웹툰이라는 단어부터 고쳐야 할까요, 웹툰뿐만이 아니라 만화책들도, 소설책들도 모두 우리나라 말을 아끼지 않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영어를 섞어쓰고 우리나라 말을 우그러뜨리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다 못해 쓴 책이 바로 이 ‘뿌리 깊은 글쓰기’ 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 저자가 읽었을 책들에서 108가지의 잘못된 우리나라 말 사용례를 뽑아서 손수 다듬고 있습니다. 저자의 우리나라 말에 대한 애정은 저자의 글쓰기에서부터 깊이 배어있습니다. 저자의 문체는 꼭 시를 읽는 것 같으며, 매 꼭지는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주장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의 전체적인, 큰 의도는 한 문장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책 앞의 일러두기에서 쓰인 것과 책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는 우리 말을 쓰자’ 가 바로 의도겠지요. 더 나아간다면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하자,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면 힘들여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플래카드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공익사업을 벌이는 것이 훨씬 좋겠지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책을 통하여 그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당위성, 그러니깐 근거가 되겠지요. 이 근거라는 말이 매우 딱딱합니다만 간단한 예를 들면 일전의 ‘따뜻한 경쟁’ 의 경우 그 주제는 ‘따뜻한 경쟁을 하자’ 가 될 것이고, 책 내용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따뜻한 경쟁은 어떤 것이며 그 경쟁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진 나라는 있는가, 따뜻한 경쟁을 하면 정말 현실의 문제가 사라질까, 정도가 되겠습니다. 물론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요. 소설의 묘미는 끝까지 읽지 않는 한 예측불능에 있다고 반론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한 번도 읽지 않은, 그래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책은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 ‘뿌리 깊은 글쓰기’는 소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책의 부제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를 보면서 저자의 주장이 책 내부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어떻게 그 근거를 획득하는가를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저자의 주장이 옳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도록 노력을 기울이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책은 감성에 기댈 뿐,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사실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자’ 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도 ‘우리 말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책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것이라면 적절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고쳐야 할 예시로 든 책들을 보면서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떤 책은 시집이었고 어떤 책은 소설책이었으며, 1/3 정도는 외국 책을 번역한 책이었고, 일부는 엮은 책이었으며, 일부는 수필이었습니다. 몇 몇은 만화책(요츠바랑! 이 두 번 정도 나왔더군요) 이었지요. 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하면, 먼저 시집에 수록된 시의 경우에는 과연 책에서 말하듯 ‘그린 농법’을 ‘푸른 농법’, ‘풀빛 농법’ 으로 고쳐야 할까요? 시에서 의도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 시적 허용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시에다가 당장 (내린 처방은 푸른 농법), 이라고 적어두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뀝니다. 풀빛 농법이라고 바꾸어도 마찬가지이지요. 시를 여기다가 옮기지는 않겠습니다만, 발췌된 시는 류기봉씨의 포도 눈물, 에 실린 시입니다. 잔잔한 시의 분위기를 ‘그린’ 이라는 외래어가 현대적인 분위기 쪽으로 붙잡고 있었는데 (국어교과서 참고서에 나올만한 이야기로 하자면 목가적인 분위기를 포스트모더니즘하게 바꾸고 있다고 말하면 될려나요) 푸른 또는 풀빛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그저 평화롭게, 잔잔하게만 흘러가게 만듭니다. 과연 시인이 푸른 혹은 풀빛과 같은 단어를 생각을 못해서 그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저는 그 점에 대해서 좀 회의적입니다. 물론 시의 해석은 누구나 다를 수 있습니다. 푸른 농법이 훨씬 좋은 시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있는 그대로 돌아보고 느끼는 그대로 글로 옮’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시인이 농사를 하면서(류기봉 시인은 농사를 짓는다지요) 느낀 시어가 ‘그린 농법’ 이라면 그것을 존중하는게 옳다고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이야기할 부분은 만화책을 발췌한 부분입니다.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넘어가려다가 제목이 눈에 밟혀서 다시 보니 ‘요츠바랑!’ 이었습니다. 뭐, 개인적으로 만화를 자주 보는 편이라 요츠바랑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저처럼 나이먹고서도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보통 이런 요츠바랑과 같은 만화는 학생들이 자주 보는 만화로 여겨집니다. 앞서 돌아온 럭키짱, 이야기로 이 글의 서두를 시작했지요. 만화에 우리말로 고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사실 끝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웹툰이나 만화에서는 우리말이 그리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무분별하게 쓰는 웹툰들도 있습니다만, 어떤 경우에는 그리 존중받지 못하는 단어가 그 만화나 웹툰이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요츠바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만화책을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순 우리말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과연 만화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있을까요? 이국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만화책이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만화책을 읽는 독자층이 거의 학생층이라고 본다면 재미가 없는 만화책을 누가 과연 사서 볼지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이국적이라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쓰며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도 티셔츠에 ‘한글’ 이라고 써진 글자를 입는 사람들이 있고, 인도에도 가슴에 ‘愛’ 라고 쓰고 춤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이쯤 줄이고,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이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받아들일 까닭이 없는 자리라면 우리나라말을 쓰라고. 확실히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굳이 ‘주전부리’라고 써야 할 자리에 ‘디저트’를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나 이런 만화책에서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꾸어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연스레 읽는 재미를 위해서는 디저트로 놓아두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이국적이라고 느낀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영어를 써서 멋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말로 된 만화책이 나오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만화책같이 학생들에게 파급력이 큰 매체에서부터 이렇게 외국어를 쓰니 큰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저자는 일부러 만화책에서 발췌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린 만화책이라면 모를까 외국에서 들여온 만화책을 번역한 것이라면 점차 원본과 멀어지는 상황은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외국의 만화책을 읽을 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번역된 책은 이상하게 심심하네,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책이라서 그렇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들여오지를 말아야 하는 게 옳은 일이겠네요.

위의 만화책들을 발췌한 것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은 번역한 책을 발췌하였다는 것에 그대로 쓰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가들이 작업물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써서 우리말로 순화시켜서 번역하는 경우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도리어 순화시킨 경우가 점차 원래 의미하는 바와 멀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레스토랑을 모두 밥집으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일일이 각 문맥에 맞는 단어를 찾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에는 영어를 그대로 쓰면 된다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하지만, 그 경계는 어떻게 보면 매우 애매모호합니다. 시처럼 쓰인 문장도 좋지만, 저자는 그런 기준에 대해서 좀 더 책에서 밝히는 것이 좋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발췌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번에는 책의 문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문장을 구사합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물정”이란 ~ 겹말인 셈입니다.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만 적어야 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가만히 읽다보면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어를 다 빼고 구조만 보면 ‘그대로 두어도 되나, ~라고만 적어야 한다’ 니. 무슨 말인지 사실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제가 문장의 비문을 가릴 만큼 국어 연구를 깊이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듯 합니다. 저 문장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은 물정이 겹말이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 고쳐야 한다 고 적는다면 낫겠지요.

사실 이렇게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댄다면 다른 책들도 이런 문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당장 지금 이 글만 하더라도 꼼꼼히 살펴보면 문법에 어긋나거나 이상한 문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탈자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책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듯이 그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 책들의 주제에 관한 것이 핵심이지, 문법이나 오탈자는 그런 책들에게서는 어쩌면 조금은 지엽적일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말을 쓰는 것이 그런 류의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플라톤의 철학을 다룬 책에서 이데아에 대한 글을 쓰지 않고 오탈자를 찾아서 글을 쓴다면 그야말로 보석을 동물한테 주는 격이지요. 하지만 이 책의 주된 핵심은 ‘우리나라의 말’ 입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대한 주장을 하는데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이 영어를 순화시킬 수 있는 단어이지 문장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지적할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든 지적하거나 비평하기는 쉽지만, 직접 쓸때는 그만큼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 또한 막연히 우리말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을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쓰게 될 것인가, 등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어를, 비단 영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래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 대화에서 사용하는지 이 책은 자신의 언어 생활 습관을 돌이켜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새로운 단어를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발췌한 책 중에서 저자가 제안한 단어를 쓰면 훨씬 더 바람직하게 문장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세이를 삶글로 바꾸는 것이라던가, 스크랩을 갈무리로 바꾸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의 예가 되겠네요. 마찬가지로 밤은 날밤으로 두는 게 좋지, 생률과 같은 정체불명의 어려운 말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가 제시한 108가지 이야기에 모두 동의는 못하지만, 저자의 말이 옳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우리나라사람이 우리나라말을 아끼며 즐겨 쓰는 것은 옳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야 할 길이 매우 멉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그 대장정의 첫 발자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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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25 06:43   좋아요 0 | URL
국어사전에서 '톺아보다'라는 낱말을 찾아보셔요.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오자'라고 말한다면, 어쩐지 너무 싱겁네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살피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은 어려울는지 모르지만, 마음을 기울여 생각한다면, 말에 담을 넋을 살필 수 있어요. 님이 쓰신 글에서 한 가지만 짚어 본다면, '마찬가지'라는 낱말은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마찬가지'처럼 쓰든지 '그와 마찬가지'처럼 쓰거나 해야 올발라요. 그런데, 이런 말씀씀이를 둘레에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둘레 사람들도 제대로 모르니까, 모두들 잘못 말하거나 글쓰는 줄 모르면서 얄궂거나 뒤죽박죽이 되고 만 말로 넋을 담아내요.

말과 글로 사랑을 빚지 못하기 때문에, 말과 글로 사랑을 빚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제 생각으로는, 에세이를 굳이 삶글로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냥 수필이라 하면 돼요. 삶글로 쓰고 싶으면 삶글이라 하면 되지요. 시를 포엠이라 할 까닭이나 소설을 노블이라 할 까닭이 없다고 여기면, 수필은 그냥 수필이라 하고, 때로는 산문이라 하면 넉넉하니까, 에세이를 이야기할 까닭이 없을 뿐입니다.)

가연 2012-03-25 09:53   좋아요 1 | URL
아, 죄송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한번만 찾아보았으면..ㅠ 너무 생소한 단어라 오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자 부분은 지우도록 할께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과드릴께요. 오자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웠습니다.

(톺아보다를 오자로 착각했습니다. 본문에는 톺아보다를 돌아보다로 고치는게 맞지 않을까 라고 적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었기에 지금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된장님이 이 책을 쓰셨죠? 책 앞부분을 읽다가 알라딘 서재에서 머물고 계신 것을 봤지요. 사실 그래서 리뷰를 쓸까 말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는데... 보통은 이렇게 글을 쓰느니 안쓰는 것을 택하지만 평가단이라서 일단 이렇게 쓰기는 했네요. 다른 책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책을 쓰신 분이 글을 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니깐 부담이 많이 되네요. 하지만 이왕 썼으니 조금 말씀드리면, 된장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만, 글 자체에서 좀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이야기드리면, 에세이편에서 보시면 ('수필'이라는 말마디에 당신들 글을 꿰어맞추었습니다, 조그맣든 크든 내 깜냥껏 우리 말과 글로 새로운 낱말을 빚어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혀있지요. 저는 이 문장을 수필이라는 말 자체에도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으신 거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삶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문단 뒤에는 더이상 '수필' 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구요. 뒤에는 '문자 한 마디 자랑질' 이라는 말이 '해몽'을 언급하면서 나옵니다. 이는 '에세이'나 '수필'(같은 한자어니깐 이 단어를 빗댄 것이 더 가능성 높다고 판단했지요)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문자 자랑질이다, 라고 해석이 되었구요. 이 흐름은 마치 삶글이 대안이다, 라는 판단을 내리셨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지요. 물론 책에서는 삶글로 쓰자, 라고 적혀있지는 않지만 흐름을 보건데 가장 적합한 것은 삶글이나 마음글이겠구나, 라는 판단을 내리는데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수필'에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은 듯한 문장, 삶글에 할애된 꼭지 등..) 다시 덧글을 보니.. 이번에는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셔서.. 댓글에서는 수필, 때로는 산문으로도 넉넉하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수필이라는 말은 꿰어맞추기는 했지만 '문자자랑질'이 아니라는 것인지, 혹은 문자자랑질이지만 그냥 써도 괜찮다, 라는 말씀이신건지.. 사실 책 전체 주제에서 보자면 문자자랑질에 해당하든 안하든 영어 대신에 쓰이는 말로는 적합하겠지만, 그렇다면 굳이 책에 문자자랑질, 이라는 말씀을 쓰실 필요가 있었는지.. 이런 부분이 조금 어색하였습니다. 차라리 삶글로 쓰자! 라고 주장하신다면 훨씬 글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삶글을 언급한 이유는, 저 개인적으로는 삶글이라는 단어가 참 좋다고 여겨서 저렇게 써두었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확인하지 못했을 단어겠지요. 사실 제 글이 많이 부족하고.. 하시는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글의 흐름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그 후에 '꼭 할 필요는 없지만', 라고 적혀있으면 이렇게 해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하던대로 써도 되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지요. 사실은 이런 글을 잘 안쓰는데.. 평가단이라서 이렇게 적어두기는 했네요ㅠ 본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제가 이런 책을 쓰기는 정말 어렵겠지요. 지적하는 것은 그에 비해서 훨씬 쉬울테니 말입니다.

숲노래 2012-03-25 12:54   좋아요 0 | URL
어느 쪽으로 적든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는 '글쓴이'와 '말하는이' 마음에 따라 달라요. 어느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느냐에 따라, 아주 쉬운 말글을 쓰더라도 '문자자랑질'이 돼요. 이를테면 '톺아보다'라는 낱말도 문자자랑질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낱말을 처음 듣던 예전에는 문자자랑질이라고 느껴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낱말을 지식인 아닌 여느 흙일꾼 할아버지가 입으로 읊는 말을 한 번 들은 다음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꼭 흙일꾼 할아버지가 이 낱말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자리 어느 흐름에 맞추어 글을 쓰느냐에 따라 느낌과 결은 사뭇 달라져요.

문학을 이야기하는 글을 쓸 때에는 '삶글'이라는 낱말을 아직 사람들 앞에서 쓰기 힘들어요. 이때에는 그냥 수필과 산문이라고 처음 이야기하면서, 나중에 사이사이 '삶글'이라는 낱말을 곁들일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시나브로 '수필 = 산문 = 삶글'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요사이에는 '에세이'를 넘어 '르포'라는 말까지 들어와요. 수필이든 산문이든 자유롭게 쓰는 글이지만, 자꾸 영어를 끼워맞추면서 글 테두리를 넓힌다고 해요. 이런 흐름에서는 한국말로 또 새로운 말을 빚을 수 있어야겠지요.

제가 이 책에서 '글쓴이가 밝힌 풀이글이나 이야기'가 '대안'이나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까닭은, 이 책을 교과서로 삼지 말고, 스스로 말밭을 일구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삶이 달라, 스스로 좋아하며 받아들이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다 다른 결을 스스로 살피면서 날마다 내 넋을 북돋우면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떤 말을 넣을 때에 서로 즐거운가를 깨달을 수 있어요.

이 낱말은 써야 하고 저 낱말은 안 써야 한다는 틀이란 없습니다. 이런 틀이 있다면 굴레가 될 뿐이에요.

님이 쓰신 이 글에서 한 가지를 짚어 보면, "-하고 계시다"라고 적은 대목이 있는데, "-하고 있다" 아닌 '계시다'를 넣는다고 높임말이 되지 않아요. 틀린 말법이랍니다. 더구나, "-하고 있다" 또한 영어 '-ing', 이른바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중(中)'으로 번역하면서, 이 말투가 한국말에 "-하고 있다"로 탈바꿈했어요. 그러니까, '계시다'를 '있다'로 고쳐야 알맞지만, 더 밑을 살피면 '있다'를 넣은 "-하고 있다"부터 잘못 쓴 말이에요. "적혀 있지요"부터 틀리게 쓴 글입니다. "적혔지요"라고만 적어야 올발라요.

그러나, 올바르게 쓰든 잘못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을 얼마나 잘 드러내거나 나누려 하느냐'가 대수롭습니다.

대수로운 대목을 살펴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비로소 말을 새로 익히며 글로 사랑꽃을 피우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동의하든 동의 안 하든'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아요. 옳은 대목이 없고 그른 대목이 없어요. 동의하느냐 동의 안 하느냐로, 책을 따져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스스로 아름답게 돌볼 내 말삶을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으니, 이 대목을 짚지 못하면, 이 책을 읽었어도 안 읽은 셈이라고 할밖에 없습니다.

가연 2012-03-25 14:12   좋아요 1 | URL
음.. 사실 동의한다, 혹은 옳다... 라고 쓴 것은 그냥 답글만 달려고 하니깐 너무 딱딱해보여서 끼워넣은 말인데, 졸지에 책을 안 읽은 사람이 되었군요;ㅎ

더 이야기를 진행시켜도..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듯 하니 무익할 것 같네요. 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저자이시고 하니 제가 책을 곡해한 것 같다고 여기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앞서 답글에서도 달았듯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좀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이 책이 밑거름이 되어야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밑거름이라면 바탕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요? 바탕이 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수는 없지요. 그래서 얼마나 적절한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데 그걸 밑거름으로 삼는게 좋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황스럽지요. 수학의 공리도 아니구.. 랄까, 이렇게 쓰면 너무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보이려나요ㅠ 사실 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아(고 있다고 저는 스스로 생각을 하지만 님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겠지요.)는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런 부분들이 저같은 사람들에게는 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락방 2012-03-25 21:38   좋아요 0 | URL
가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가연님의 글솜씨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리뷰를 읽으니 새삼 감탄스러워요. 저는 이 책을 읽는다면 가연님과 비슷한 감상이 나왔을 것 같은데, 가연님처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리뷰를 써내지는 못할것 같거든요. 소설가 이승우는 자신의 책,[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에서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읽어야 한다, 라고 했는데 가연님이 이렇듯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게 글을 '잘 쓰신'건 '잘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맛폰으로 가연님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댓글을 달고([초속 5센티미터]에 말이죠.-안 달 수가 없었어요!), 안되겠다 스맛폰으로 댓글 남기는 건 너무 답답해, 라고 생각해서 이리 들어왔어요.

:)

가연 2012-03-26 12:21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저 부끄럽네요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비판(?)하는 글은 성향상ㅠㅠㅠ 별로 적고 싶지가 않은데, 이미 써놓고 변명같지만ㅠ 제가 아직 모르는게 많고 부족한 것도 많으니.. 그래서 적고 싶지 않았는데 신간을 두 권씩 받는게 기쁘니ㅠㅠㅠ 별 수 없이 평가단으로 이렇게 써버렸네요. 아직 부족한게 많은 글입니다. 담에는 더 좋은 글을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ㅎ

그리고 초속 5센티미터..ㅎㅎ 이글에 댓글을 이렇게 남겨주신것도 감사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초속 5센티미터에 댓글달아주신것도 매우 기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ㅎㅎㅎ 그 글은 상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글이라...

희선 2013-08-21 00:4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시가 생각났습니다 재미있는 시예요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하게 하는...


우리말 사랑 1



자고 일어나
달리기를 하면 발목 삘까봐
조깅을 한다.
땀이 나
찬물로 씻으면 피부병 걸릴까봐
냉수로 샤워만 한다.
아침밥은 먹지 못하고
식사만 하고
달걀은 부쳐 먹지 않고
계란 후라이만 해 먹는다.

일옷은 입지 않고
작업복만 골라 입고
일터로 가지 않고
직장으로 가서
일거리가 쌓여 밤샘 일은 하지 않고
작업량이 산적해 철야작업을 하고
핏발선 눈은
충혈된 눈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는 반찬을 사러
가게로 가지 않고
슈퍼에 간다.

실컷 먹고 뒤가 마려우면
뒷간으로 가지 않고
화장실로 가서
똥오줌은 누지 않고
대소변만 보고 돌아와
오랜만에 아내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 잠이 들면 될 텐데
와이프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든다.



서정홍



자기 전에 읽어서 그랬는지 꿈속에서 또 읽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말을 잘 쓰기는 해야죠 저는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로 쓰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오덕 님이 쓴 글(우리글 바로쓰기 1~5)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읽었더니 다른 책 읽는 게 쉽지 않더군요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나서 나아졌지만...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고쳐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정말 그래요(초등학교 교과서 지금은 어떨지) 많이 배우지 않고 책을 거의 읽지 않은 분이 우리 말을 더 잘 쓴다고도 하셨는데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지 않고 책을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누구나 알기 쉽게 말하고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죠 어떤 책에서 책을 볼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보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는 글을 쓸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봤습니다(거기에 쓰여 있었던 것은 자신이 글을 쓰는 게 아니고 소설신이 말해주는 것이어서, 하는 게 있었지만...^^)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늘 잊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 말을 잘 쓰는 것은 좋지만, 말의 느낌이라는 것이 있으니 거기에 맞는 말을 쓰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책 읽으면서 왜 이런 말(영어, 한자말)로 쓴 거야 할지도...^^ 사실 이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희선

가연 2013-08-28 00:22   좋아요 0 | URL
이오덕 님의 글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러나 쉬운 말로 풀어야 한다는 말씀엔 동감합니다. 그리고 우리 말이 사실 좀 많이 외국어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뭐랄까, 한편으로는 외국어를 쉽게 표기할 수 있어서 이렇게 나타나는것이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