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백제 - 백제의 옛 절터에서 잃어버린 고대 왕국의 숨결을 느끼다
이병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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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학창시절의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그닥 많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제쳐놓거나 등한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꼭 자발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사는 대학 입시뿐만 아니라 공무원 시험 등 대부분의 시험에서 필수과목이었고 국사를 공부하지 않은 채 사회에 진출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국사에 관심이 없는 학생일지라도 국사로 인해 제 인생의 앞길이 막히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다들 열심히 국사를 공부했었다. 물론 그런 분위기 탓에 마음에서 국사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많은 기회를 박탈당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이병호 관장이 쓴 <내가 사랑한 백제>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무미건조했던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딱딱한 문체와 간간이 흑백 사진이 실린 국정 역사교과서처럼 공부는 그저 흥미나 관심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일 뿐이라는 사실이 크게 부각되던 그 시절. 국사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열정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단 한줌이라도 더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날 한국 고대사 학계는 고조선의 위치 문제나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 임나일본부의 실체 등과 관련해 첨예한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러한 국내외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백제는 소외되거나 그다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백제와 관련된 자료를 접할 때마다 항상 간절함과 뜨거운 가슴으로 대했다. 나는 역사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이고, 관계에 대한 해석이며, 교훈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p.17)

 

딴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유독 백제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반 아는 게 없었다. 저자도 이 책에 쓰고 있다시피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백제가 차지하는 위상은 정말 보잘것없는 게 아니었던가. 단 몇 쪽으로 백제의 역사 전체를 기술한다는 건 어찌 보면 옛 백제인에 대한 모독이자 후손으로서 백제 역사를 등한시했던 우리들의 부끄러운 민낯이기도 했다. 순천고를 졸업하고 한국교원대에서 역사교육과 학사를, 서울대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를, 와세다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던 저자의 화려한 이력 뒤에는 백제 역사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마다 삶의 목표나 의미가 다르지만 나는 삶을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인생이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것을 다시 사회에 '되돌려 주는 삶'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 꿈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백제를 연구하다가 죽는 것이다. 꿈을 얘기하다 갑자기 죽음을 이야기하는 게 다소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공부하는 모습을 꿈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p.27)

 

사료 중심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여 백제의 숨겨진 역사를 밝혀온 저자는 자신의 이력과 연구 성과가 담긴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듯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뿌듯함도 있겠지만 1,400년 전 동아시아 국제 교류의 중심이었던 문화 강국 백제의 진면목을 자신이 쓴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더 큰 듯했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백제왕도 핵심유적 복원 사업'이 국정과제로 선정되는 등 그동안 소외되었던 백제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고는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백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채 개선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저자의 입장에서 그저 안타깝기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백제를 사랑하는 한 명의 역사학자로서 안타까움이 깊게 배인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1부 왜 백제를 공부하는가, 제2부 유물은 어떻게 역사가 되는가, 제3부 이제 백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후기와 참고도서 목록, 부여지역의 주요 유적 분포도까지 꼼꼼하게 실었다. 책을 읽다보면 세계가 인정하고 일본이 탐낸 백제 시대의 역사를 정작 우리만 잊고 지냈던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과 함께 교과서에서는 본 적 없는 다양한 유물과 사료들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백제 유물이 이렇게 많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백제 역사를 잘 몰랐던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백제인의 예술성과 독창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도된 뉴스에는 예산 봉산면 효교리 일원에서 진행되는 발굴조사 현장에서 사비도읍기 백제시대의지역 수장급 인물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횡혈식 석실분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직물 조각이 붙어 있는 두개골이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두개골에 붙은 직물은 베로 추정되고 수장급 무덤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목관 부재도 함게 나왔다는 기사였다. 중요한 역사의 흔적이나 유물에 대한 기본적 상식조차 없는 나와 같은 일반인들이 그와 같은 유물 발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직접 체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큐레이터로서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도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온 백제 이야기를 갈무리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모멘텀을 설정하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백제에 대한 간절함과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꿈꾸고 있다. 10년 뒤에는 좀 더 새롭고 알찬 나의 백제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약속한다." (p.366)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승자에 대한 편애를 너무 심하게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신라가 아닌 백제의 역사, 나아가서는 가야의 역사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보여줄 때이다. 역사의 균형을 찾아가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후손된 임무임을 자각할 때, 우리의 문화는 세계 무대에서 더욱 빛날 것임은 자명한 일, 저자가 사랑한 백제는 이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이 사랑하는 백제로 거듭나지 않을까. 그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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