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지금은 사라졌나 모르지만 내가 군에 입대했던 시절, 고참이 된 군인들은 흔히 후임 병사들을 향해 '본전 생각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곤 했다. 이 말인 즉 자신이 신병이었을 때는 지금보다 군기도 세고 고참들의 괴롭힘도 훨씬 심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자신의 군대 생활은 뭔가 밑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의미였다. 이 말과 함께 '(군기가) 빠졌다'는 말도 흔히 들었다. 고참들이 후임 병사를 편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병사들의 군기가 예전보다 흐트러졌다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군대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주된 이유는 이 두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받은 고충을 누군가에게 똑같은 크기로, 또는 더 크게 되갚아야만 속이 후련하지 그렇지 못했을 때는 큰 손해를 본 듯 느껴지는 그릇된 심성, 그것이 갓 입대한 신병들에게 대물림 되듯 전해졌다.

 

페미니즘 소설 <현남 오빠에게>를 읽으며 나는 문득 오래전의 군 생활을 떠올렸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시집 문화가 군대 문화와 어쩜 그렇게 닮아 있는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군대에서는 상급 부대에서 파견된 사람이 예하 부대의 사병들에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부당한 대우를 조사하기 위해 이따금 '소원 수리'라는 걸 받지만 며느리에게는 시아버지나 시조부모로부터 행해지는 '소원 수리'가 일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게다가 군대는 복무 기간만 지나면 제대를 할 수 있지만 며느리는 복무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유진의 할아버지는 효자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내를 자기 집안, 자기 어머니의 사노비 보듯 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빠는 자랐다. 아빠에게 본인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존재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보상을 해줄 여자를 구했다. 어머니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져줄 여자,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모든 궂은일을 맡아 해줄 여자, 친구 하나 없는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주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어머니의 생일상을 새벽부터 일어나 차려줄 여자,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낳고 현명하게 키워낼 수 있는 여자, 아빠는 고액 연봉을 받는 파일럿이었고, 그런 여자를 얻을 자격이 있었다." (p.55 '당신의 평화' 중에서)

 

표제작인 조남주 작가의 <현남 오빠에게>를 비롯하여 최은영 작가의 <당신의 평화>, 김이설 작가의 <경년更年>, 최정화 작가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 손보미 작가의 <이방인>, 구병모 작가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김성중 작가의 <화성의 아이>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작가 7인의 작품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남자인 나로서는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표지의 글귀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거북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말이다.

 

<현남 오빠에게>는 무려 십년 동안을 현남 오빠의 여자친구로 지냈던 여자가 그로부터 청혼을 받고 고민하다가 만나기로 했던 단골 카페에서 청혼 거절의 편지를 쓰는 내용이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낯선 도시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 여자가 우연히 만난 현남 오빠로부터 다방면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나 친구 지은의 조언과 현남 오빠와의 부딪힘을 통하여 잃었던 자아를 찾아가게 된다. 매번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현남 오빠에게 자신은 그저 의지하고 길들여지고 있었을 뿐 기실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음을 아프게 깨닫는 동시에 이별을 결심한다.

 

"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요. 오빠가 헤어지자고 할까봐 겁이 났거든요. 오빠의 도움 없이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내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게다가 저는 '강현남 여자친구'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캠퍼스커플이 헤어지면 어떤 소문이 도는지, 어떤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요. 여자들은 특히 더하죠." (p.21 '현남 오빠에게' 중에서)

 

최은영 작가가 쓴 <당신의 평화>는 결혼을 약속한 남동생 준호가 아빠의 생일에 맞춰 여자친구 선영을 집으로 초대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준호의 누나 유진의 시각으로 그린 작품이다. 노예와 같은 시집살이를 대물림하듯 물려받은 엄마 정순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던 유진은 정순의 한탄과 불만을 군말 없이 들어주며 정순의 편에서 딸처럼, 친구처럼 지내왔다. 그러나 예비며느리 선영에게도 자신이 살아온 삶을 고집하려 드는 정순의 모습에 실망한 유진은 모진 소리를 하고 집을 떠난다. 정순은 옳고 그름은 물론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한다.

 

김이설 작가가 쓴 <경년更年>은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둔 '나'는 이제 막 갱년기를 겪고 있다. 아들 세훈은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다. 학부모 모임에 나갔던 어느날 '나'는 아들 세훈이 같은 학교 여자애들 여럿과 관계를 맺었고, 그것을 통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문을 듣게 된다. 도무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아들이 관계했다는 여자애들 연락처를 윤서 엄마를 통하여 받는다. '나'는 그애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여자애들이 문제가 많은 애들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나'는 초경을 한 딸을 품에 안고 아들과 관계했던 여자애들을 생각한다.

 

"네가 여자여서,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불편함을 이제 어린 너와도 나눠 갖게 된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 내 등을 쓰다듬던 딸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는 생리대를 혼자 붙여보겠다고 끙끙댔다. 그렇게 어린애였다." (p.119)

 

'페미니즘 소설집'을 표방하는 이 책은 그 외에도 리얼리즘 소설이 아닌 다른 기법, 이를테면 느와르나 SF, 추리소설 기법 등으로 쓰인 여러 작품들이 실려 있다. 독이 있는 연못에서 태어난 물고기는 독의 존재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유해한지 알 수 없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유교 문화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남자들 또한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자신의 잘못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이 나라에 사는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도...

 

세상의 모든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오늘은 옷깃을 여밀 만큼 날이 차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어둡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 날씨를 두고 '을씨년스럽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나라에 사는 여성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고, 지금도 그러하여 슬프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사실인 것이다.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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