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히어로즈
기타가와 에미, 추지나 / 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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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벗어난 계절이 지긋이 나이를 먹는 동안 초록의 숲도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길었던 연휴 내내 아침 산행도 거른 채 마음껏 게으름을 키웠던 나는 오늘 아침 길어진 어둠의 끝자락을 밟으며 어렵게 산을 올랐습니다. 등산로에 깔린 낙엽과 이따금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도토리. 시나브로 만추로 접어드는 가을 풍광에 한해가 다 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깨에 내려앉는 하루의 무게가 새삼스레 느껴지던 아침. 분주했던 하루가 차분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언제나 끝이 있게 마련이지만 유난히 길었던 추석연휴의 여운이 오후의 가을 햇살 속으로 가볍게 흩어졌습니다.

 

기타가와 에미의 <주식회사 히어로즈>를 읽었습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인 <주식회사 히어로즈>는 평범한 주인공 다나카 슈지를 전면에 내세운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이름에서도 얼굴에서도 아무런 특징이 없어 오히려 그리기 어렵다는 다나카 슈지이지만 소설 속에서 그는 마음만은 지극히 선하고 성실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일상이라는 무대에 평범한 인물을 등장시켜 이 시대 평범한 이들을 위로하고자 한다는 이 소설은 평범한 우리 모두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특별한 히어로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스토리 전개가 빠른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금융회사에 취직했던 다나카 슈지는 그의 성실한 근무 태도로 인해 사내에서도 인정을 받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습니다. 사내에 귀여운 애인도 있었고 비교적 순탄한 회사 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출근길에 같은 버스를 탔던 한 여고생으로 인해 180도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여고생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던 다나카 슈지를 치한으로 몰았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던 그는 꼼짝없이 치한으로 몰리게 됩니다. 사회 경험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상황을 회사에 알렸고, 회사에서는 합의를 종용했습니다. 합의를 함으로써 고소는 취하되었지만 그는 결국 모든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범이 잡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회사에서도, 믿었던 애인으로부터도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때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버스만 타면 호흡이 가빠지는 트라우마를 앓게 됩니다. 직장도 잃고 애인도 잃은 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사교성이 좋은 사사키 다쿠로부터 주식회사 히어로즈를 소개받게 됩니다. 주식회사 히어로즈는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의 성공을 돕는, 그야말로 히어로 메이킹 서포터즈들의 집합체였습니다. 단기 알바생 신분이었던 다나카 슈지가 처음 만난 인물은 인기 만화가 도조 하야토였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몹시 괴로워하는 도조 하야토를 안정시키는 일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나카 슈지는 주식회사 히어로즈의 정식 직원이 됩니다. 그의 성실성과 선한 성격이 회사로부터 큰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었죠. 도조 하야토의 호출을 받고 직장 동료 미야비와 함께 급하게 달려가야만 했던 그는 버스 안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지난 경험과 트라우마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회사에 폐를 끼쳤다는 자책도 있었지요.         

 

"한참 말이 없던 미야비가 입을 열었다. "슈지 씨가 신용 받지 못한 것이 아니에요. 슈지 씨 주변 사람들은 다들 생각하기를 포기한 거예요. 인간은 휩쓸리는 동물이죠.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의견이 많은 쪽으로 흘러가요. 그러는 편이 편하니까요. 슈지 씨의 예전 애인도 상사도 다들 휩쓸린 거예요. 인간은……." 미야비는 뭔가 삼키듯이 말을 끊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포기한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그 눈빛에 나는 철렁했다. 다른 사람 같은 미야비가 그곳에 있었다."    (p.140)

 

도조 하야토 이후 다나카 슈지가 만난 의뢰인은 인기 여배우 다사키 마이였습니다. 언젠가 자신도 인기를 잃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다사키 마이를 돕기 위해 슈지는 미야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로 인해 미야비는 다사키 마이의 스토커로부터 공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기도 합니다. 슈지는 미야비로부터 그의 지난 삶을 듣기도 하고, 노숙자에서 주식회사 히어로즈에 입사하여 슈지의 상사가 된 미치노베의 삶도 듣게 됩니다.

 

금융회사에서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다나카 슈지는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어렸을 적 자신에게 매미를 잡아주던 할아버지가 그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존경하는 히어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스토리가 재미를 위해 과장되었거나 작위적이다라는 인상을 받는 건 이 책을 읽는 독자 대부분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라이트 노벨' 작가라고 밝히는 기타가와 에미에게 라이트 노벨이란 '아무튼 재미있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소설은 시종일관 재미를 향해 집중되고 있습니다. 마치 만화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요.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현실이 더 허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하던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일지언정 어느 누군가의 눈에는 더없이 위대한 히어로로 비쳐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지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를 영웅으로 믿는 단 한 사람의 그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요. 연휴 후유증이 어깨를 짓누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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