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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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우의 <스파링>을 다 읽은 후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 사람도 학창시절에는 무협지깨나 읽었겠는걸' 하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남자들에게 무협지는 가장 흔한 소일거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힘과 외모를 중시하는 청소년기의 낭만적인 사내아이들에게 있어 무협지의 주인공은 또래 아이들의 로망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무협지의 서사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등장인물의 이름과 무술의 종류, 또는 주인공이 속한 문파만 달라질 뿐 줄거리는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 시절을 살아본 남자라면 <스파링>을 읽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줄 안다. 부모도 모르는 채 태어난 천애고아가 무림의 고수와 조력자를 만나 각고의 노력으로 무술을 연마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실력으로 중원의 무림을 평정하게 된다는 그런 스토리가 무협지의 주요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 달달한 연애담이 양념처럼 섞이고, 악인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도 무협지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말이다.

 

자 이제 <스파링>의 구성을 살펴보자. 원조교제를 하던 17세의 미혼모가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를 한 명 낳았으니 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장태주 되시겠다. 출생서부터 비루하고 범상치 않다. 그렇게 태어난 장태주가 엄마와 같이 살았냐고?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버련진 아이는 보육원에 맡겨지고 그곳에서 성장한다. 주인공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가 살았던 은혜보육원의 남자 아이 셋과 여자아이 한 명이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내가 이 시기를 잘 벼린 칼날처럼 명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때의 내가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존재하는 군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가 작고 소심했으며 숫기도 없었고 무엇보다 갈등이 빚어지는 상황들을 두려워했다. 늘 혼자 구석에 앉아 조용히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책이나 숨죽여 읽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p.31)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주인공을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선생님들의 차별과 힘이 센 아이들의 괴롭힘은 날로 심해져서 어느 순간에 이르자 그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했고, 원하지 않던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이 세상의 부조리에 맞선 장태주의 첫번째 싸움이었다. 그런데 싸움의 상대자였던 아이를 단 한 방에 쓰러트림으로써 우리의 주인공은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힘의 우위에서 오는 달콤한 권력을 맛보게도 된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장태주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또래 아이들 간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자 부모의 재산을 후광 삼아 그 지역의 중고등학교 일진들을 규합한 선도연합회 회장이 장태주를 찾는다. 그러나 장태주가 그 자리에서 반기를 드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지고 그 건으로 장태주는 소년원에 들어간다.

 

소년원에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낸 덕분에 장태주는 가퇴원 심사 대상자가 된다. 그러나 감독 선생을 향해 흉기를 휘두른 아이를 저지하기 위해 장태주는 그 아이와 어쩔 수 없이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그 바람에 가퇴원 심사도 철회되었다. 이를 지켜본 소년원의 담임 선생님이 장태주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설득하여 권투를 배우게 한다.

 

구호 처분 만기 보름을 앞당겨 퇴원한 장태주는 자신의 거처를 보육원에서 담임의 집으로 옮기고 학교도 옮겨왔다. 담임과 그의 부인 그리고 담임의 권투 스승이기도 했던 담임의 장인으로부터 이제껏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 장태주는 그들의 사랑과 가르침 속에 승승장구한다. 장태주는 자신을 누구보다도 아껴주는 담임의 부인을 누나라고 부르며 따른다. 담임의 장인인 할아버지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은 장태주는 처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언론에 관심을 받지만 대한권투연맹의 제의를 거절한 후 출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그들의 농간에 의해 탈락한다. 그러나 장태주는 담임을 비록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담임의 친구인 한영기는 미국에서 유명한 프로모터이다.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한 장태주는 그의 제안으로 프로에 데뷔한다. 그는 프로 데뷔 불과 삼 전 만에 챔피언 결정전에 나가게 되고 최연소 세계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삼 라운드를 넘기지 않는 전 경기 케이오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세계 4대 복싱기구 라이트급 통합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한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중원 무림을 평정한 셈이었다.

 

"나는 스물 한 살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제 장태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내겐 부조리한 조직 시스템에 굴하지 않고 최고 자리까지 오른, 불굴의 스포츠 스타라는 이미지까지 덧대어졌다. 나는 공정성의 신화처럼 여겨졌다. 부패척결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었고 불행을 딛고 스스로를 일으켜세운 상징처럼 일컬어졌다. 한 나라가 우리도 다시 시작해보자는 분위기로 들끓었을 만큼 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p.287)

 

프로모터 한영기가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인 덕분에 장태주는 4체급을 석권하며 명실공히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태주의 마음 한켠에는 늘 허전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돈으로 해결하려 했던 장태주는 어느 날 담임과 심하게 다투게 되고 그 후 그는 호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담임의 집으로 돌아온다. 5체급 석권을 눈앞에 둔 미들급 타이틀매치가 성사되면서 장태주는 누나와 할아버지를 미국에 초청한다. 마지막 시합이 될 수도 있었던 그 경기의 세컨드를 할아버지가 보기로 했기 때문에 장태주는 몹시 들뜬 상태였다. 그러나 오기로 약속했던 할아버지와 누나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담임의 조언을 받아 질 뻔한 경기를 가까스로 이겼다. 관중들의 열기와 환호 속에서 자신의 대기실로 향하던 장태주와 담임은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되는데...

 

"나는 그 어마어마한 열기의 환호 속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대신 나를 들고 있는 담임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 공간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허상과 내가 진짜 지켜야 하는 사람과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나를 들여다보는 일. 나 자신을 먼저 인정하는 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진짜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 (p.316)

 

우리의 주인공 장태주는 그 뒤로부터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돈과 권력으로 치장된 부조리한 현실과 필요할 때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도구화 된 정의 앞에 그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상실감으로 인해 그는 스스로 선택한 자기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소설로서의 재미보다는 주제나 교훈에 더 치중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장태주가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들이 나이와 걸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장태주가 대신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달리 말하자면 작가는 독자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풀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의도를 독자기 미처 알아채지 못하거나 곡해하는 건 아닌지 지레 겁을 먹고는 '이 소설의 주제는 이러이러한 것이니 오해하지 말기를' 하고 당부하는 투다. 또 있다. 부실공사로 인해 바다 위에 놓인 대교가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담임마저 차에 치여 죽게 만들었던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았고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외에도 갑작스러운 장면 변화라든가 불필요한 욕설 등은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아마추어 작가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러한 실수의 노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겨울 방학이면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무협지에 빠져 살던 그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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