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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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간된 책 중에 어떤 것은 '혹시 이  책이 아주 오래전에 씌어졌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해서 드는가 하면 과거에 발간되었던 또 다른 어떤 책은 '작가는 이미 죽어서 사라졌지만 그가 천국에서 보내온 글을 지금 살아있는 사람 누군가가 그대로 받아적었다가 최근에 발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최근에 발간된 책이 케케묵은 고릿적 얘기를 하고 있거나 아주 오래전에 나온 책이 요즘 세태를 정확하게 꼬집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450여 년 전에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쓴 책이 요즘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현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소설이나 희곡도 그렇지만 개인의 생각을 담은 산문집도 그런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금년에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과 에세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과 에세이도 좋아하는 편이다. 두 사람은 다른 듯하면서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1997년 <타임퀘이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던 커트 보네거트는 이후 잡지 <인디스타임스 In These Times>에 때로는 자신의 가정사를, 때로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때로는 미국의 사회정치에 대한 비판의 글을 발표하였고 <나라 없는 사람>은 그가 <인디스타임스>에 연재했던 약 5년간의 에세이를 모아 엮은 책이다.

 

"어떤 좋은 소식이건 끝이 있다. 우리 행성의 면역계는 인간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p.104)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소설가로 분류되는 그는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의식과 60년대 반전운동에 매진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휴머니스트이자 유머리스트였다. 특히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통렬한 블랙 유머는 읽는 이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만들지만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면 뭔가 가슴 밑바닥에서 퍼지는 찌르르한 느낌이 전해져오곤 한다. 말하자면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그의 글은 독자들에게 웃음과 감동,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조지 W. 부시는 주변에 C학점상류계급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1) 역사와 지리를 전혀 모르고, (2) 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3) 이른바 기독교도이며, (4) 정말 놀랍게도 정신병자, 즉 영리하고 번듯하게 생겼지만 양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다."    (p.99)

        · · · · · · (생략) · · · · ·

"우리의 소중한 헌법에는 비극적 결함이 있지만 그걸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결함은 바로 미치광이 환자들만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나선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다. 정서 장애가 분명한 아이들만 반장 선거에 출마했다."    (p.101)

 

그가 쓴 위의 글을 '조지 W. 부시' 대신에 '트럼프'로 바꿔 놓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글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치광이 환자들만' 우두머리가 되고자 나서고 있으니 말이다. 정서 장애가 분명한 아이들만 반장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형을 따라 코넬 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던 커트 보네거트는 항상 영어 교사를 꿈꾸었다고 말한다. 화학을 전공한 후 테네시 대학, 시카고 대학 등을 오가며 공학자와 작가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던 그는 1943년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징집되어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사흘밤낮에 걸친 연합군의 폭격으로 삼십만 명의 시민들이 몰살당했던 드레스덴 폭격 사건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때의 기억은 23년이 흐른 후에 <제5도살장>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독일계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커트 보네거트는 과학과 예술 양쪽에 재능이 뛰어났던 형과 누나, 그리고 삼촌에 이르기까지 대가족 사이에 낀 그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임을 일찌감치 터득했고, 라디오 방송의 코미디 로를 들으면서 웃기는 재주를 갈고 닦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 게 좋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예술은 생계수단이 아니다.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춰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 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p.32)

 

전장에서 끔찍한 일을 경험했던 작가는 소방수, 영어교사, 자동차 외판원 등의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쓰기를 계속했다.생전의 커트 보네거트는 타계한 SF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뒤를 이어 미국 휴머니스트 협회의 면예회장을 맡는다. 회원들과 커트 보네거트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장례식에서 "아이작은 지금 천국에 있습니다"라는 농담을 주고받았고, 작가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도 이렇게 말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p.126)

 

대통령에 대한 패러디와 농담이 난무하는 요즘, 국민들은 시국의 혼란과 작금의 시련을 그렇게나마 애써 견뎌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커트 보네거트의 염원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끔찍하여 국민들은 농담이고 뭐고 모두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지. 커트 보네거트는 실의에 찬 우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천국에 있습니다."라고. 그 한마디 농담에 시름을 잠시 내려 놓으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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