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 편애하는 마음과 인문학적 시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오직 갈등구조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하루키의 팬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확실한 듯 보인다. 예컨대 페미니즘 소설의 애독자라면 책을 읽기도 전에 여성차별은 '악', 여성을 우위에 두거나 적어도 동등하게 두는 것은 '선'으로 규정하게 마련이다. 만일 이런 원칙에 합당하지 않은 책이라면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거나 구멍난 옷가지보다도 가치 없는 것쯤으로 인식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은 사상이나 철학을 다룬 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케인즈를 신봉하는 케인즈주의자들에게 있어 마르크스의 책은 어쩌면 쓰레기보다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적대적인 갈등 구조를 완전히 제거한 채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어떤 종교나 윤리, 정치와 같은 요지부동의 시스템에 의해 확고한 세뇌교육을 받아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구축해온 어떤 기준이나 이즘을 일시에 제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내 시선에 의해 선과 악으로 양분되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 우리의 판단 기준을 일거에 수거해 간다면 어떻게 될까? 내게도 비로소 완전한 자유가 찾아 왔구나, 하면서 기뻐할까? 내 생각은 정반대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수감(收監)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공허, 또는 결여의 상태가 지속될 테니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이 국지적인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이것입니다. 즉 존재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의 수는 한계가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유하는 인간의 수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p.213)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가 쓴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작가는 30년 동안 하루키 작품을 읽은 열혈 팬의 입장에서 하루키의 문학세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 책에서 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동일한 작가에게 내려지는 극과 극의 평가에 대한 일종의 항변이자 하루키 문학의 부당한 평가에 대한 일종의 변론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팬레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에 쓰인 하루키에 대한 평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팬으로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에 더욱더 깊이 있는 평을 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책에 대한 서평을 일체 읽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예전부터 비평은 '말똥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 반反 비평의 기수입니다. 그의 주장에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이렇게 과격한radical 태도부터 살피는 것은 사물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평이란 비평의 대상에 대한 '식욕'을 돋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비평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식욕을 돋우는 비평'이란 어떤 것일까요?" (p.129~p.130)

 

사실 이 책은 저자가 하루키 문학에 대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 그는 팬으로서의 시선과 사상가로서의 관점을 함께 다룸으로써 독자들이 하루키 문학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평론가의 글을 마냥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런 글들로 인해 접해보지 않았던 어느 작가에 대하여 손톱만큼의 관심이라도 생겼다면 그것으로서 그는 평론가로서의 역할을 다한 셈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매력이 무거운 주제와 산뜻하고 가벼운 문체의 대조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주제와 문체의 중간에 있는 것이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진국을 보여주는 인간성이라든가 신체성은 '중간 지대'에 아주 농밀하게 들어 있습니다." (p.243)

 

인간이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또는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지독한 폭력의 세계를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나의 가치관이나 판단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악으로 간주될 테니까 말이다. 하루키 문학이 추구하는 '중간 지대'란 것은 어느 한 쪽을 편들거나 경도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폭력을 동반한다면, 철저한 중립의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정성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챈들러, 피츠제럴드, 무라카미 하루키 세 사람의 깊숙한 곳에는 강하게 내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할 때에도 '왜 이 사람은 이런 짓을 할까?'하며 가능한 한 공정한 관점으로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가 그것입니다." (p.151)

 

하루키 문학의 전반을 다루고 있는 우치다 타츠루의 평론집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를 블로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고 우치다 타츠루의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이라면 다가오는 시월에는 하루키 소설 한두 권쯤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월이 다 가기 전 어느 날 당신은 이런 독백을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이유도 없이 악의를 저지르는 일이 쇠털같이 많아. 나도 이해할 수 없고, 너도 이해할 수 없어. 그래도 확실히 그런 일은 존재하는 거야.' ('1973년의 핀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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