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백시나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산 정약용의 연작시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20수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유배지에서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정약용의 마음을 시에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支離長夏因朱炎(지리장하인주염) 汁汁焦衫背汗沾(즙즙초삼배한점)

灑落風來山雨急(쇄락풍래산우급) 一時巖壑掛氷簾(일시암학괘빙렴)
不亦快哉(불역쾌재)

 

지리한 긴 여름날 폭염에 시달려서

등줄기 땀에 젖어 베적삼이 척척한데

상쾌한 바람 건듯 불어 산비가 쏟더니만

한꺼번에 벼랑 위에 얼음발이 걸렸구나.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마음을 비우는 지혜' 중에서, 정민)

 

시라는 게 묘한 구석이 있어서 반복해서 읽다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곡조의 노래가 되기도 한다. 행복한 순간으로 '뿅' 하고 순간이동을 한다고나 할까. 시에는 그런 힘이 있다. 예컨대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읽어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샤갈의 유명한 그림 '나와 마을'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고 꿈 속에서 보았던 어느 마을이 떠오르는 것이다.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는 풍경' 말이다.

 

오늘 아침 집에서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고 나왔다. 한 손에 시집을 그러쥔다는 건 가을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내게는 그렇다. 말하자면 나는 사계절 중 가을에 주로 시를 읽는다는 얘기가 된다. 아침에 집을 나서려는데 옷깃을 파고 드는 소슬한 바람에 불현듯 백석의 시가 생각났던 것이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생략)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 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생략)

 

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를 기려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평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석의 시는 그가 쓴 다른 어떤 시들을 읽어보아도 시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풍경과 이미지들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가 쓴 언어는 마치 붓의 터치인 양, 짤그랑거리는 소리의 재현인 양 읽혀진다. 그런 까닭에 나 같이 시에는 문외한인 사람도 시 한 수에 울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샤갈이 그린 행복한 풍경 속에 온전히 머물렀던 것처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따라 거나하게 취하여 아름다운 나타샤를 그리워하고, 그리움에 술기운이 깊어지고, 어느 순간 눈길을 뚫고 달려 온 이국의 소녀가 내 귀에 대고 고조곤히 이야기할 것만 같다. '에잇,더러운 세상' 나타샤와 나는 흰 당나귀 등에 올라 앉아 세상을 향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는 순백의 눈이 쌓인 마을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눈이 내린 마을에는 어쩌면 행복을 그리는 화가 샤갈도, 샤갈을 노래한 시인 김춘수도 먼저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편의 시를 읽는 동안에는, 백석의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가을에도 소복소복 흰 눈이 내리고 방울소리 울리며 꿈길을 향해 걸어가는 당나귀 발자욱 소리가 자박자박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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