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개정판
베티 스미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유명하다는 성장소설 한두 권쯤 읽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이따금 성장소설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춘기와는 한참이나 멀어진 지금, 성장소설을 읽는다고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청소년기는 뭐랄까, 인생에 있어 어떤 특별한 시기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아련한 향수 같은 게 몰려오는 것이다.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육체와 정신의 부조화가 정점에 달하던 그 시기를 나는 어떻게 헤쳐왔을까 조금쯤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지금 나이에 성장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나의 청소년기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함께 그 시기를 큰 사건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온 것에 대한 자축의 의미일런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읽었던 성장소설 중에는 지금도 이따금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과 더불어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나 미하엘 옌데의 <모모>,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등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소설의 목록들은 청소년기라는 특별했던 시기와 맞물려 그닥 특별할 것 없는 내 인생의 앨범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청소년기의 평범했던 나의 독서 취향과는 다르게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은 주로 신화와 관련된 판타지 소설을 쓰는 릭 라이어던(Rick Riordan)의 시리즈나 추리소설을 읽는다. 얼마 전에도 스튜어트 깁스(Stuart Gibbs)의 <Space Case>를 사주었더니 며칠 사이에 다 읽어치웠다. 아들이 커서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아들은 어쩌면 판타지나 추리소설이 그리워질런지도 모르겠다.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읽었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겠지만 이 책 또한 성장소설이다.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1900년대 초를 시간적 배경으로 뉴욕의 브루클린을 그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이민 2세대인 케이티와 아일랜드 이민 2세대인 조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 케이티가 이 책의 주인공인 '프랜시'를 낳는 동안 철없는 아빠 조니는 그들이 맡아 일하던 학교의 청소도 하지 않은 채 밤새 술을 마시고 귀가한다. 열여덟 살의 젊은 엄마 케이티 놀란은 자신의 출산을 돕기 위해 달려온 친정 엄마 메리 로멜리에게 묻는다. 이 아이가 자신들과 다른 인생을 살게 하려면 그녀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메리는 이렇게 말한다.

 

"비밀은 읽고 쓰는 데 있어. 너는 읽을 수 있어. 좋은 책을 구해서 매일 이 아이에게 한 쪽씩 읽어주어라. 아이가 스스로 읽을 수 있을 때까지 매일 읽어줘야 해. 그래서 아이가 읽는 법을 배우면 날마다 스스로 읽게 만들어라. 내가 알기에는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야." (p.78)

 

메리는 또한 아이들은 최소한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건 저 아이에게 상상력이라는 놀라운 힘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이야. 저 아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은밀한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러면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해도 저 아이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나 또한 지금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성자들의 놀라운 삶과 위대한 기적을 회상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이상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어." (p.79)

 

프랜시가 태어난 다음해에 동생 닐리가 태어나고 케이트는 그들이 세들어 사는 연립주택 청소일을, 조니는 파티장의 노래하는 웨이터를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케이티는 아이들에게 매일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읽도록 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저금통에 돈을 모으도록 했다. 프랜시와 닐리가 집 근처의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그 학교를 맘에 들어 하지 않던 프랜시는 집에서 먼 학교로 전학을 한다. 생활력이 강했던 케이티와는 달리 조니는 팁으로 받은 돈을 모두 술로 탕진한다.

 

"케이티 역시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니 또한 몽상가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기 아이들에게 이런 특성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물론 이들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가난에 찌든 고통스런 삶을 너무 쉽게 견디어낸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케이티는 만일 자신들에게 이런 특징이 없었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주 처절하게 바라보고 좀더 낫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p.143)

 

술주정뱅이로 낙인이 찍힌 조니는 조합에서도 쫓겨나고 아무도 그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조니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프랜시가 아직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아빠 조니는 그렇게 세상을 떴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랜시는 취직을 하고 닐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프랜시는 학교에서 작문은 언제나 A를 받았는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아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작문을 가르치던 가드너 선생은 그녀가 쓴 글이 형편없다고 말한다. 글에 안 좋은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언젠가 자신이 얘기한 것에 대해 프랜시가 고마워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어른들은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벌써 프랜시의 어깨에는 미래에 감사해야 될 짐이 잔뜩 얹혀져 있었다. 꽃다운 젊은 시절을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며 당신이 옳았으니 감사하다는 말을 하느라고 다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p.248)

 

신문사에서 잡일을 하기로 하고 취직했던 프랜시는 그곳에서 리더(Reader)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여러 지역의 신문만 읽으면서 보낸다. 그러다 문득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학의 썸머 스쿨을 수강한다. 그곳에서 프랜시는 벤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벤은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신문사를 사직하고 오퍼레이터로 재취직을 한 어느 날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소식이 전해진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보내질 때 프랜시는 리 하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고 프랜시는 실연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항상 행복이란 게 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어떤 복잡하고 얻기 힘든 걸로. 하지만 얼마나 작은 일들이 행복을 만들어주는 걸까. 비가 내릴 때 피할 수 있는 곳, 우울할 때 아주 뜨겁고 진한 커피 한 잔, 남자라면 위안을 주는 담배 한 개피, 외로울 때 읽을 책 한 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 행복을 만들어주는 거야." (p.318)

 

주인공 프랜시의 성장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책은 우리나라의 6,70년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끼니를 굶을 정도로 어려웠던 경제 사정이나 미혼모에 대해 차가운 시선으로 대했던 경직된 윤리관이나 그럼에도 동네의 인심이 살아 있었던 풍경은 6,70년대의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던 오늘, 생각에 잠긴 사람들 표정이 흐린 하늘만큼이나 어둡다. 그러나 나는 데이트를 나가는 프랜시의 들뜬 기분으로 또 한 권의 성장소설을 읽었고 찬란했던 5월의 꿈에 잠겨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