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추석 명절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와서 하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추석 연휴의 TV 프로그램이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곤 했습니다. 예컨대 철 지나 홍콩 무술 영화라던가, 나 홀로 집에 시리즈라던가,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이라던가, 외국인 노래 경연 대회나 여러 분야의 연예인이 총출동하여 청백 대항전을 펼치는 게 주된 레퍼토리였고 그 중간 중간에 특집 드라마가 단막극으로 방영되고는 했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또 있군요. 빼놓지 않고 등장하던 마술공연이 그것입니다. 유리겔라나 카퍼필드처럼 외국 마술사가 등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국내 마술사가 등장하여 카드마술이나 비둘기 마술을 보여주곤 했었죠. 때로는 어느 유명한 최면술사가 등장하여 연예인에게 최면을 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불려 나온 연예인으로 하여금 한동안 촛불을 바라보게 한 다음 '레드 썬!'하고 외치면서 딸깍 손가락을 튕기면 금세 최면에 빠져드는 식이었죠. 어찌나 신기하고 재미있던지요. 최면술사는 깊은 최면에 빠진 연예인을 마치 자신의 수족을 부리듯 갖고 놀았습니다. 사과를 주겠다고 하면서 양파를 먹게 한다거나 전생여행을 한다면서 눈물 콧물을 쏟게 함으로써 연예인의 단정했던 이미지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보았던 것 중에는 신기했던 게 또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죽었을 때였던가요? 마치 자신의 부모 중 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눈물을 펑펑 쏟는 북한 주민의 모습이 제 눈에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보였었죠. '저게 진심일까?' 몇 번이나 되짚어 생각했습니다.

 

장강명의 소설 <호모도미난스>를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는 내내 이런 생각들이 맴돌았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꼼짝 못하게 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부릴 수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자신이 내린 명령에 따라 다른 누군가가 로봇처럼 그대로 움직이고 그 명령에 반항하거나 일체 저항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마치 최면술사가 최면에 빠진 연예인을 마음껏 농락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 소설은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며 모든 인류의 삶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자들과 그 '힘'을 막고자 조직된 또 다른 호모도미난스들의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온 거대한 '힘'과 그 '힘'의 쓰임  또는 그 '힘'에 반동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힘의 항상성에 대한 고찰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장르 소설의 특성상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런 소설에 어떤 사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의 얼개일 것입니다. 작가는 만화처럼 빠른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게다가 소설 속 인물들은 중국과 라오스, 일본, 한국 등 넓은 무대를 종횡무진 옮겨 다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전자가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을 개발해냈어요. 바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이죠. 우리는 새로운 종, 신인류입니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의 다음 단계, 호모도미난스입니다."    (p.137)

 

이야기는 류잉춘과 저우환위의 수술에서 비롯됩니다. 두 사람은 흑사회의 성주였던 황첸스의 뇌수술을 집도했었고 황첸스는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부모님의 복수를 갈망했던 저우환위와 '정신조정능력'의 위험성을 감지한 류잉춘은 서로 갈길이 달랐습니다. 저우환위의 방바재단과 류잉춘의 백원단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조종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로봇처럼 부림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무제한으로 해결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도 남용하면 시큰둥하고 재미없어질 뿐 아니라 결국에는 사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흰원숭이'로 지칭되는 초능력자들은 어느 순간 자살충동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이른바 '충동사'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취향이라는 것도 애정과 노력, 시간을 들여 배워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은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욕망하는 대상의 특성을 분석하고 자기 기호를 그에 맞추게 된다. 어쩌면 그게 한 인간의 정체성을 쌓아올리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p.80)

 

백원단의 리더였던 류잉춘은 호모도미난스의 능력을 제거하고 인류를 그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그가 죽을 때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 안시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였던 안시현은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실의에 빠져 중국에 갔다가 류잉춘의 눈에 띄어 그의 능력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원단의 단원이었던 천슈란의 추적에 의해 류잉춘의 신분이 노출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안시현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정신조종을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 말입니다. 정신조종을 하는 사람들은 저희가 어떤 기분을 맛보는지 결코 알지 못하실 테죠. 이렇게 정신조종능력자 두 분을 접하고 나니, 미묘하게 그 느낌이 다릅니다. 목소리 음색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요."    (p.150)

 

그래서 어찌 되냐구요? 그것까지 말하면 소설은 재미없어지겠지요. 권력의 속성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노력이나 기다림도 없이 공짜로 얻은 권력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할 테고 결국 끝 지점에서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절대적 행복이 아닌 끝 모를 '허무'일 것이라고 작가는 추측하는 것입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그럴 듯싶습니다. 정권을 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굴복시켜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싶은 욕망이 들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전횡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재미있는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원하는 걸 모두 쉽게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동력이 권력이 아니라 희망인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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