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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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무슨 대작이 있겠습니까마는 몇 년째 준비하면서도 끝내 쓰지 못했던 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몇 달도 아닌 몇 년째. 남들이 들으면 내가 마치 신춘문예에 출품할 작품이라도 구상하고 있으려니 생각하겠지요. 부끄럽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책을 읽고 느꼈던 그 충만한 감동을, 그 순간의 내 솔직한 감정을, 언어 밖의 풍경으로 그려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허섭스레기와 같은 글을 몇 줄 쓰다가 지우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생각나서 또 쓰고 하기를 몇 년째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짝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냥 쭈볏거리기만 하는 숫총각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작품 속 하나하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의미를 되새기고, 부풀어 오른 감상에 젖어 확대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름의 생각을 끄적거려보기도 했지만 낙서는 낙서로만 존재할 뿐 그것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 하나의 완성된 문장, 마음에 흡족한 글로 재탄생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글로 옮긴다는 게 어찌나 어려운 일이던지요. 거칠고 미욱한 나 자신을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답답하고 속만 뒤집히는 것을요.

 

아무튼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마냥 시간만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어떻게든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겠다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각별했던 책, <그리스 인 조르바>는 그런 책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 대학 캠퍼스를 오가며 짬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던 대학 시절, 힘든 사회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지쳐갈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서 이곳저곳을 펼쳐 보곤 했던 멀지 않은 과거,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하듯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근래의 날들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눈물이 솟을 것만 같습니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p.159)

 

위의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화두 하나를 받아든 느낌이었죠.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던 그 시기에 '산다는 게 말썽'이라는 한마디 말은 왜 나를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했던 것일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의 얼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관념에 사로잡힌 서른다섯 살의 젊은이와 순간순간의 삶을 사랑했던 예순다섯 살의 노인이 크레타 섬에서 펼치는 한 판의 춤사위, 관념과 실재가 어우러진 한 편의 서사시 정도로 해두어야 겠군요.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오." (p.86)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시각에 그 비가 내부의 슬픔을 일깨운다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으로 즐거운 일인가! 그럴 때면 의식의 심연에 숨어 있던 쓰디쓴 추억, 친구와의 이별, 사라져 버린 여자의 미소, 날개를 잃고 다시 구더기가 되어 버린 나방의(구더기는 내 심장으로 기어오르며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덧없는 희망 같은 쓰디쓴 추억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p.141)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삶의 본질을 꿰뚫는 나 나름의 시각을 배웠던 셈입니다. 한때 철학에 매료되어 현실적인 이상이나 꿈보다는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 도덕적 관념이나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했던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열정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조르바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못해 말을 잃게 할 정도였습니다. 단지 인식의 차원에서 머물렀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심장 가까이로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뿐인 삶이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쫓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p.209)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p.209)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후회를 양산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실재하지도 않는관념과 도덕에 얽매어 자신의 삶을 출구가 없는 한 귀퉁이로 몰고, 종국에는 손과 발을 옥죄어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p.415)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p.463)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시간의 궤도를 달려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한의 영역으로 말입니다. 그 어둠의 영역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무한광대의 우주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생명체가 뚝 떨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사람이 살다간 핏방울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뿐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사랑했던 어느 자유인의 절규를 오래도록 기억할 뿐입니다.

 

"꺼져가는 불 가에 홀로 앉아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 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들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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