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변태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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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가슴이 먹먹해지고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순간이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강해 보이기만 했던 엄마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작고 초라하게 보였을 때, 뼈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쪼글쪼글 주름이 잡힌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 한동안 말을 잃고 한쪽 귀마저 멍멍해지곤 한다. '이만큼 세월이 흘렀구나. 엄마도 이제 늙으셨구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볼 때가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글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간다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는 더할 수 없이 아픈 때이다. 그의 몸에 새겨진 주름이야 확인할 길 없지만 그의 작품에서 마음에 잡힌 주름을 절절히 느끼게 될라치면 슬몃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을 때도,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었을 때도, 그리고 오늘 이외수의 소설집 <완전변태>를 읽었을 때도 가슴을 훑는 쓸쓸함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지나친 오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모름지기 마음에 주름이 잡히는 순간 소설가로서 그의 생명은 이미 빛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마음의 주름이란 이런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상상력의 부재(또는 경직된 상상력)에서 오는 화석화 된 글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세운 마음의 제약이 수도 없이 늘어나게 되는가 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식의 구분으로 인해 젊은 시절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거침없이 써내려갔던 작가도 나이가 들수록 도덕이나 제도, 삶의 철학이나 자신의 위치에 지나친 신경을 쓰곤 한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작가도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구나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에서 깨우친 모든 것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니 오죽이나 다급했을까.

 

그러나 소설은 잠언집이나 철학책이 아니다. 어떤 깨달음을 주겠다는 생각, 이를테면 주제에 대한 집착은 그 부작용이 너무 크다. 소설은 그저 현실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것으로 소설은 제 임무를 다한 것일 터, 그것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 주제가 무엇이냐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작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길로 독자를 인도하겠다는 생각이면 그는 이제 소설보다는 철학을 해야 한다. 삶의 원리와 삶의 부조리를 밝히는 철학자 말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마음의 주름이 잡힌 작가의 글은 갈수록 비약이 심해진다는 법이다. 인간의 현실을 벗어난 비약,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가을의 공기처럼 메마르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없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절정이 <1Q84>나 <상실의 시대>를 썼을 때라면 작가 이외수의 절정은 <벽오금학도>나 <들개>, <칼>을 썼던 시기가 아니였나 싶다. 누구에게나 삶의 절정이 있게 마련이다. 또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절정을 누리기도 한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마음에 주름이 잡히지 않아야 한다. 소설가가 독자에게 가르침을 주겠다는 욕심, 그것은 단지 욕심일 뿐이다. 소설가는 상황을 만들고 보여주는 사람이지 상황을 분석할 겄까지는 없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예비죄인 아니면 현역죄인 이거나 아니면 예비역 죄인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공범에라도 해당한다. 단지 현역죄인은 감옥 안에 존재하고 예비죄인이나 예비역죄인은 감옥 밖에 존재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p.93)

 

이 책의 표제작인 <완전변태>는 205호실 감방에 수감된 작가와 애벌레를 상정하고 있다. 애벌레는 언젠가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갈 날을 꿈꾼다. 작가 자신도 그 애벌레처럼 완전변태를 꿈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화등선을 하듯. 그 외에도 시골이라면 몸서리를 치는 도시 출신 어느 여선생을 그린 <청맹과니의 삶>, 사랑하는 이로 인해 인생 최대의 유혹과 대면한 한 무명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유배자>, 보기만 하면 일만근심을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돌 ‘해우석’을 찾아 전국을 누비는 탐석광의 이야기를 그린 <해우석> 등 열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어쩌면 자신이 썼던 예전 작품을 보며 조금쯤 부끄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는 다르다. 적어도 젊은 시절의 작가는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기술이 아닌 삶의 방법을 가르칠 수 있기나 한 걸까 하고 말이다. 인생은 그 나이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도 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하지만 진정한 종교 지도자들과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별로 어렵지 않다. 진정한 종교 지도자들은 대개 베풀라는 설교를 많이 하면서 몸소 그것을 실천해 보인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대개 바치라는 설교를 많이 하면서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만 주력한다. 물론 욕심에 눈이 멀어버리면 어떤 부류인지 구분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지만." (p.204)

 

과거에 좋아했던 작가의 쇠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작가의 마음속 주름이 깊어지는 걸 작품에서 확인했을 때, 나는 세상의 어떤 다리미로라도 그 주름을 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주름이 잡히지 않은 그의 글을 단 한번이라도 다시 읽고 싶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박한 평을 할 수밖에 없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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