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결혼하고 한 10년쯤 지나면 슬슬 버려야 할 것 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는데 기억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개인적 편차가 있겠지만 자신이 쓰던 물건을 버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누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건일 수도, 또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이렇듯 다른 판단이 내려지는 것은 함께 한 세월의 무게가 한 몫 하는 듯하다.  어떤 사물에 있어 그 형태와 쓰임은 세월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러진다 할지라도 세월에 깃든 사물의 영혼은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육체가 쇠잔한 노인에게도 거대한 추억의 구조물이 영원히 살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의미 있는 사물'이라, 참으로 달콤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에 희열을 느끼고 어린 시절 즐거운 한때의 추억과 함께 진한 향수가 몰려올 때 우리는 그런 말을 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참으로 아픈 말이다.  그렇다.  우리 가족은 앞으로 영원히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 가족사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린 내 눈에 이상적이었던, 불행이 시작되기 전의 가족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나는 쉽게 막내 여동생을 그림에서 제외해버렸다."   (P.127)

 

MIT대학에서 예술사학을 가르치는 캐롤라인 A 존스는 어린 시절 자신이 그렸던 한 장의 그림을 보며 서글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사물을 통하여 넘을 수 없는 시간의 벽을 단숨에 통과한다.  그리고 우리가 물리적 시간을 그렇게 거슬러 올라 닿게 되는 어느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감성의 언어를 배우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성의 언어에 종속되어 살았던 긴 시간 동안 우리 행위의 숱한 오류와, 삶의 은유와, 숨겨진 비밀들이 뒤늦게 배우는 감성의 언어를 통하여 제자리를 찾고 많은 비밀들이 조금씩 밝혀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제사 철이 들고, 삶의 보폭이 얼마나 느려져야 하는지 깨닫는다.

 

이 책은 하버드, 코넬, MIT 등의 세계적인 석학 34인이 평범한 주변의 사물들에서 느꼈던 그들만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의 인생철학과 삶의 가치를 전해주고 있다.  누구에게는 첼로가, 누구에게는 발레 슈즈가, 또는 할아버지의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또는 어린 시절 입었던 노란 우비가 어느 순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기억의 저편에서 펼쳐지는 황홀한 축제를 어찌 이성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그 많은 불꽃들을 어찌 식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지나가는 급행열차를 보면 저 반대편의 세상이 떠오른다.  열차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린다.  길게 늘어선 향기로운 유향나무, 공을 주우러 기어올라갔다가 너무 뜨거워 손도 대지 못했던 녹슨 철제 지붕, 불현듯 코끝에 다가오는 흙먼지 속의 빗방울 냄새, 그리고 작고 호기심 많은 한 아이가 있다.  태양이 작열하는 고요한 시골길을, 놀랍도록 젊고 아름다웠던 부모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한 아이가."    (P.212)  

 

나는 지금 누렇게 변색되고 습기를 머금어 찌들 대로 찌든 나의 오래 전 일기장을 읽고 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눈길을 벙어리 장갑을 낀 한 소년이 걷고 있다.  버석버석 심하게 튼 손을 호호 불며 시린 어깨를 옹크린 채 홀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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