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 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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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 세 명과 함께 서울 방배동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단독주택의 차고를 개조하여 월세로 놓은 곳이니 난방이 될 리 없었고, 도로 쪽으로는 홑겹 유리 미닫이문이 셔터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면 문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지만 우리는 하나뿐인 연탄난로 주변에 모여 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곳이 마치 로마시대의 지하묘지처럼 음산하다며 '카타콤'이라고 불렀었다.

 

술도 못 마시고 전공도 전혀 달랐던 나는 물과 기름처럼 좀체 섞이지 못하였다.  그들로부터 가끔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안주감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캔버스에서 살아나는 갖가지 형상들과 붓을 잡은 손의 유연한 움직임이 그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재미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밤이 늦도록 이젤 앞에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기곤 하던 그들과 달리 나는 밤이 깊었다 싶으면 으레 냉기가 도는 침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준 후, 간신히 고양이 세수를 마치면 서둘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곤 했다. 

 

그때 같이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은 미술대학으로 유명한 H 대를 다니다가 1학년말 작품 전시회에 걸렸던 자신의 작품에 문제가 있어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이듬해 D 대학 천안 캠퍼스에 재입학 했었다.  당시 그는 전시회 작품으로 정부미 포대를 똑 같이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만 그리면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정부미'를 '전부미'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전두환 정권이었던 당시의 사정은 예술이든, 언론이든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공안정국의 삼엄한 분위기는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검열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친구는 그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교수님과 학교 당국에 호소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했다.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친구는 D대학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미술 관련 모 사단법인의 이사장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사의 평가는 언제나 평론가와 그 시대의 권력자의 몫이었다.  당사자인 작가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시되기 일쑤였고, 의식 있는 평론가의 항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인 지금도 통치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은 법의 잣대로, 또는 평론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처벌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이 책은 예술사에서 평론가의 부당한 해석을 작품을 예로 들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이 당시의 평론가에 의해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일반 독자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부당한 평론가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언어 폭력범이 될 수도 있음이다.김태호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혹은 다른 예술의 영역이든, 당신이 에술을 '살기로'작정했다면 이 책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결의를 굳건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당신이 미학이나 예술사 혹은 예술평론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이 책에서 그 학문이나 활동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예술의 메인 이벤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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